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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듀나 외 8인, <악인의 서사>

by Jaime Chung 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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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듀나 외 8인, <악인의 서사>

 

 

최근, 트위터에서 시작해 인터넷에 널리 퍼진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말과 관련한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런 논의를 이어가고자 이 책은 악인에게 서사를 주는 것에 관한 여러 작가들의 생각을 담고 있다. 소설가부터 시작해 평론가, 편집자, 연구자, 번역가, 웹소설 작가들 등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눴다. 소재 역시 한국 소설 속 살인자들, 나르시시스트, 범죄 논픽션, 서부극, 마녀, 모녀 서사, 웹소설, 악당 등으로, 각각이 아주 색달라서 무척 흥미를 끈다.

다만, 이 책의 독자를 도대체 누구로 상정하고 썼는지, 읽기 쉽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장벽이자 실망스러운 점이다. 책 소개에서 이미 ‘지금껏 악인의 서사에 관한 논쟁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벌어졌지만, 분량 제한과 휘발성이 강한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상호간의 공통된 이해를 바탕으로 풍부한 논의를 낳는 데까지는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다’라며, 악인의 서사에 관한 논쟁의 무대를 단행본 지면으로 옮겼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딱 이 소개 글만 읽었을 때 이 책은 트위터에서 140자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까지 모두 다 밝히려고 단행본의 형태를 택하되, 여전히 대중과의 소통을 의도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이해가 아닐까 한다. 앞에서 소셜미디어라는 논쟁의 근원도 밝힌 데다가, 대중이 자발적으로 악인의 서사와 관련한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 책은 도대체 누구를 읽으라고 쓴 건지 모르겠다. 대중을 목표로 하고 썼다기엔 정말 너무 말도 안 되게 어려운 말, 논문급의 어휘 및 표현이 많다. 읽는 내내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를 떠올렸다. 나는 인서울 대학도 나왔으며,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해서 책은 꽤 읽었다고,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독해력이 부족해’라고 말할 때의 상정되는 그 ‘요즘 젊은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독해력이 높다고 자부한다. 논문을 줄줄 읽는 수준은 아니어도, 웬만한 입문자를 위한 전문 서적은 읽어 낼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물론, 내가 관심이 있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주제에 한해서). 그런데 이건 내가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저자들의 쟁점, 주장이 헛소리라거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게 아니고, 정말로 글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게 쓰였다는 거다. 자, 보시라. 이 책을 이북 뷰어로 열어 놓고 무작위로 아무 부분이나 찍어서 읽다가 ‘이건 좀 심하다’ 싶은 부분을 몇 부분 골랐다(참고로 아래 인용문에서 페킨파는 이 꼭지에서 다루는 서부극 영화를 만든 감독 이름이다).

분류 체계가 깡그리 붕괴된 폐허야말로 페킨파가 그리려고 했던 지옥이다. 페킨파는 외려 선과 악의 분류 체계를 무너트림으로써 각자도생의 지옥, 생존만이 남은 지옥을 그린다. 그는 <와일드 번치>에 대해 “나의 작업은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두지 않는 외부인, 패배자, 외톨이, 부적응자를 담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페킨파는 외부자(인디언, 흑인, 남부군 포로)들로 이뤄진 내부를 만들고, 그들이 외부의 외부(이를테면 멕시코)로 떠나는 모험을 그린다. 페킨파는 신체를 황량한 광야에 있는 바위로 숨기면서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무화시킨다. 그러한 혼돈은 세계가 무목적성하에 움직인다는 냉혹한 통찰만을 던진다. 그곳에서 인간은 인간성을 통째로 읽는다. 들뢰즈를 페킨파의 세계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명예도 없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환상도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그들은 아무 목적 없는 모험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무런 이득도 없는 모험이거나 아니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만족을 얻게 해주는 모험이다.” 페킨파는 인간을 오로지 자기 보존만을 꿈꾸는 동물로, 인간성 자체를 허구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성싶다. 이러한 통찰은 악과 선, 인간과 동물이라는 구분이 지극히 임의적이며 도구적이라는 사실을 반추하게 만든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직 뇌에 힘을 주고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어째서인지 글의 난도는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특히 맨 마지막 꼭지가 극악의 난도이다. 아래는 그래도 끝에서 세 번째에 위치한, 모녀 서사에 관한 꼭지에서 가져왔다.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 관계론을 두고 이렇게 썼다. “어머니는 최초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실재 속의 절대자로 우리 앞에 귀환한다.”) 클라인이 정립한 대상 관계론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기 이전의 어린아이는 외부 세계의 대상을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구분한다. 이런 분류의 근원은 ‘원초적 젖가슴’, 즉 어머니다.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이 모두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연원했음을 어린아이(자아)는 아직 알지 못한다. 클라인은 바로 여기에서 분열이 발생한다고 지적하며 이 지점을 ‘망상-분열적 위치paranoid-depressive position’라고 일컫는다. 이 위치를 지나 마침내 환상과 증오(혹은 공포)가 단일한 어머니를 구성하고 있음을 깨닫게 됐을 때 ‘우울적 위치depressive position’에 이르게 된다. 크리스테바는 이 자아가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젖가슴을 고갈시키고, 타자를 건설하고 — 비우면서 자기 자신을 건설하고 — 비움으로써 외부 세계로 젖가슴을 몰아낸다.”라고 보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어머니 죽이기’다. 그러나 원초적 대상인 어머니가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지대하기에 환상적 전능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우리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연민과 어머니에게 느끼는 연민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보자. 물론 이들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전제하에.)

쥘리아 크리스테바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대중, 입문자나 비전문가에게 의사소통하기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쥘리아 크리스테바를 아는 비전문가가 도대체 몇이나 된다고?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저술자, 철학자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니체처럼, 철학을 잘 몰라도 이름은 수없이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고전 철학자도 아니고, 동시대 철학자는 어디 윤리나 철학 교과서에 잘 언급되지도 않는다. 진짜 전문 서적에나 나오고, 이런 사람은 진짜 ‘찐’들이나 아는 거지, 대중이 어떻게 아냐고. ‘그게 뭔데 씹덕아’라고 되받아치고 싶어진다. 최소한 크리스테바가 어떤 철학자인지 간단히 설명하기라도 해라. 크리스테바가 이순신 장군처럼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의 영역에서뿐이다.

 

내가 제일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 가장 마지막 꼭지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즐비하다.

요컨대 오카자키 교코의 만화는 (도덕의 구축 자체는 존중하면서도) 도덕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전부가 되려는 것에 대한 나름의 저항으로서 숭고한(그리고 그만큼 황당무계한) ‘조작’이다. 도덕이 결코 충분히 이해하고 포괄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있다고, 혹은 도덕 바깥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기. 스탠리 카벨이 ‘시민적 삶civic life에의 항체’라 불렀던 일,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변증법의 세속적 갱신을 위한 사투랄까? 그 속에서 우리는 ‘악’과 ‘악당’과 ‘부정적인 것’이, 헤겔이 『대논리학』에서 논한 ‘부정적인 통일’, 즉 중층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서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걸 생생히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리버스 에지>나 <헬터 스켈터> 등의 만화로 잘 알려진 오카자키 교코가 그린 <치와와>라는 만화에 대한 글인데, 만화라는 대중적인 소재를 가지고 굳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글을 썼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떤 작품이든 정말 깊이를 담아 잘 만들면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토론이나 분석할 거리도 분명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그에 대한 글을 어렵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는 스탠리 카벨이 도대체 누구인지 역시나 단 한마디의 설명, 수식어조차 없다. 헤겔의 저서를 누구나 다 읽어 봤을 거라고 상정한 듯 ‘부정적인 통일’이라는 전문 용어까지 사용했다. 부정적의 통일이 뭔지 아는 일반 독자가 몇이나 될까?

오해는 마시라. 깊이가 있거나 복잡한 글, 어려운 글은 절대 쓰지 말라거나 대중이 그런 글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주제에 관해 대중과 ‘같이’ 논의를 나누고 싶었다면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표현을 하는 게 맞는 거다. 아무리 어려운 개념이더라도 쉽게, 어렵지 않게 설명하는 게 진짜로 잘 가르치는 사람의 재능이고 미덕이듯이. 보통 사람들이라면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초등학생에게, 중학생에게,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을 상대로 할 때 쓰는 어휘를 각각 달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상식이니까. 근데 이 저자들은 아예 대중과 의사소통하기를 포기한 듯, 그냥 자기들이 학자들, 전문가들을 상대로 기고하던 논문이나 비평지에 쓰던 그 습관대로 똑같이 썼다. 그게 나는 당황스러운 것이다. 트위터발 소재를 가져와서 쓰고는 싶은데, 트위터의 주 이용자가 될 만한 다수들이 읽고 이해할 만한 수준의 글은 쓰기 싫다? 상아탑에 갇혀서 학자가 아닌 이들과 평범하게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내가 위에 링크한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 후기에서도 썼듯이, 글을 쓰는 사람부터가 타인의 눈높이에 맞춰 의사소통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다면, 그런 저자가 자기 세상에 갇혀서 일반인들이 이해 못하는, 자기 관심사만 늘어놓는 오타쿠랑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정말로,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책의 문제이다.

악인에게 서사를 주는 것이 용납할 만한 일인지, 악인은 어떻게 정의되고 악이 무엇인지 아는 것, 악의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선해지는 것, 또는 도덕이나 윤리를 지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지 등의 논의는 아마 백 년 동안 쉬지 않고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이에 대한 대중의 의견도 달라질 것이고 말이다. 분명히 의미가 있을 이 논의를, 나는 학자들이 자기네들끼리 쉬지 않고 떠드는 걸 그냥 콘퍼런스 룸 한쪽 구석에서 멍하니 구경만 한 기분이다. 그게 이 책을 읽은 내 감상의 한 줄 요약이다. ‘대중, 독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는 저자의 글을 내가 왜 읽어야 하지?’ 하는 의문만 남았다. 이 책을 쓴 저자들에게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를 강력히 추천한다. 다음번에는 그들이 조금 더 소통하기 쉬운 글을 쓸 수 있기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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