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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오지은, <아무튼, 영양제>

by Jaime Chung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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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오지은, <아무튼, 영양제>

 

 

현대인 중에 고질적으로 피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영양제로 그 증세를 조금이나마 낫게 해 보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건 취미처럼, 습관처럼 영양제를 먹는 사람의 솔직하고 웃긴 에세이이다.

저자는 하루에 영양제를 13알(”비타민C 4알, 비타민B 3알, 유산균 2알, 프로폴리스 1알, 비타민D 1알, 매스틱검 1알, 테아닌 1알… 13알밖에 안 되네. 휴우….”)이나 삼키는 사람이다. 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영양제를 신경 써서 먹는 편이기 때문에 저자의 글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었다. 영양제를 안 먹는 사람들은, 또는 영양제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양제를 먹는 사람들에게 ‘그거 대신에 제때제때 균형 잡힌 식사를 챙겨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나왔다… 오타쿠를 향한 일반인의 순박하고 잔혹한 질문’도 아니고…). 아니 내가 그걸 모르겠냐고요… 그게 쉽지 않으니까 영양제에 좀 기대어 볼까 하는 거죠…

알고 있다. 적절한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 신선한 재료로 만든 균형 잡힌 식사,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 환경, 충분한 휴식, 매일 15분 이상 햇빛을 쬐는 생활을 한다면 영양제 안 먹어도 된다는 것을.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넓은 강이 있다. 그리고 나는 주로 이쪽 강가에 쭈그리고 있다. 어떻게 안 될까…? 저 너머에 어떻게 좀 다다를 수 없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허브 앱을 켜고 검색 창에 증상을 적는다. 개선시키고 싶은 무언가는 항상 있다. 피로, 무기력, 불면, 소화불량, 면역, 항산화 등등. 규칙적인 생활, 스트레스 없는 하루, 적절한 운동을 대신하려면 일단 5만 원어치면 되겠지? 무료 배송은 넘겨야 하니까.

이 책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종종 저자가 영양제의 효과를 예로부터 알았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나 영양제의 ‘요정’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어찌나 웃기고 귀여운지, 여기에도 조금 옮겨 보겠다.

그런 간 과장을 달래기 위해 우리가 사는 영양제는 아마도 밀크시슬(실리마린)일 것이다. 내 방에도 있다. 친구들의 방에도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밀크시슬은 뭐고 실리마린은 뭐야? 하고 궁금해할 당신을 위해 얘기하자면 밀크시슬은 식물 이름이고 그 안에 든 성분명이 실리마린이다. 그러니까 간에 좋다고 밀크시슬도 사고 실리마린도 살 필요는 없다.

밀크시슬은 대단한 풀이다. 그리스시대부터 간 치료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이런 유의 사실을 접할 때마다 놀란다. 고대 그리스인은 대체 어디까지 알아냈던 걸까? 3천 년 후의 우리에게 브랜드 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대단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즐겼대. 오오오…. 고대 그리스인의 얘기는 앞으로도 이 책에서 계속 나올 것이다.

그렇다. 프로폴리스는 소중한 꿀벌이 만들어준다. 프로폴리스는 꿀벌의 은혜이자, 염증을 억제해주는 자연의 선물이자, 천연 항생제이자, 항균제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유일하게 콧방귀를 뀔 수 있는 고대 이집트인이 프로폴리스를 좋아했는데 심지어 미라를 만들 때 프로폴리스를 썼다고 한다. 이집트인이 미라를 만들 때 쓴 물질이다? 솔직히 진심이라고 봐야지.

프로폴리스는 벌의 타액과 나무 수액과 밀랍이 섞인 것, 그러니까 벌이 흘린 침과 기타 등등이다. 벌이 칠칠맞지 못해 침을 흘리고 다닌 건 아니고 집을 수리하기 위해 분비한 것이다.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 찾아내려는 인간이 프로폴리스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벌들이 벌집 안에서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 집을 뭘로 만들었길래 그렇게 건강해? 왜 병들지 않아? 혹시 항균해?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물질에 프로폴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로’는 ‘앞’, ‘폴리스’는 도시. 도시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그것이 바로 프로폴리스인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고대의 지혜를 현대의 과학으로 설명하는 일은 명쾌하긴 해도 조금 서운하다. 벌의 정령이 목감기와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는 편이 훨씬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그 성분을 플라노보이드라고 부르기로 했고 나는 프로폴리스를 살 때 플라노보이드가 몇 밀리그램 들었는지 본다.
(…)
하지만 보자. 프로폴리스의 항염 작용을 과학적으로 처음 밝혀낸 것이 고작 1965년이다. 혹시 현대 과학이 이집트가 미라를 만들던 기술을 못 따라간 것이 아닐까? 단지 명확한 논문이 아직 안 나온 것 아닐까? 이론은 계속 바뀌어왔다. 인류는 자연의 모든 비밀을 밝히지 못했다. 2050년의 학회에서 벌의 정령설을 누군가 증명하면 어떻게 될까? 정령은 그간 계속 존재했고 그 존재를 드디어 증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물질의 이름을 FZ(Fairy ZZang)라고 붙인다면!

페어리 짱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글을 시작할 때는 ‘현대인’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현대 한국인만큼 바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려면 아무래도 부지런하게 성실하게 사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러려면 아플 때 푹 쉴 여유도 없었을 것이고, 아니 애초에 조금 피곤해할 시간조차 사치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영양제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인 현대 유럽인들은 생각보다 약초를 좋아한다. 약초? 싶다가도 허브라고 하면 아! 할 것이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느냐면 독일 병원에 가면 의사가 허브차를 처방할 정도라고 한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독일은 아스피린의 나라잖아. 바이엘의 나라잖아. 독일 의사들 세상에서 항생제 제일 많이 쓰게 생겨 가지고 조신하게 허브차라니.

하지만 진짜였다. 인터넷 세상에선 독일에 살다가 아파서 겨우 병원에 갔는데 허브차를 처방받고 허망해진 한국인의 후기를 쉽게 볼 수 있다. 게다가 먹다 보니 스멀스멀 좋아졌다는 후기 또한 볼 수 있다. 베를린에서 잠시 지낼 때 드러그스토어에 가보니 한 벽면이 전부 허브차였다. 생리할 땐 생리차, 잠이 안 올 땐 수면차, 위가 쓰릴 땐 위차, 몸살이 왔을 땐 몸살차, 목이 아플 땐 인후차, 더부룩할 땐 소화차, 그리고 물론 간 강화차까지. 10분 이상 우려먹으라는 설명이 약초다워 신뢰가 갔다. 가격도 8개들이 한 팩에 3천 원 정도다! 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다가 허브차를 마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 아마도 감기로 휴가를 내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 삶, 퇴근이 오후 4시인 삶, 신선한 음식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삶, 푹 쉴 수 있는 삶, 그래서 몸의 자연 치유력을 믿을 수 있는 삶 아닐까. 반대로 항생제를 바로 먹어야 하는 삶은 빨리 나아야 하는 삶, 휴가를 낼 수 없는 삶, 퇴근이 밤 9시인 삶, 나약하다는 말이 두려운 삶, 자리가 보전되지 않는 삶, 그래서 힘들어도 버텨야 하는 삶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짧은 휴식이라도 죄책감 없이 누릴 수 있고, 자신을 과하게 갈아넣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면 우리가 영양제에 그토록 의존하지 않아도 될 텐데… 어쨌든 그때까지는 피곤해도 마음 편히 쉴 수 없어서 영양제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을 읽을 때만큼은 조금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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