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보니 가머스, <레슨 인 케미스트리>
애플TV에서 제작한 동명의 TV 드라마의 원작 소설. 하도 엄청 대단하다고 해서 읽었는데, 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감상이었다. 애플TV가 이 책을 극화할 권리를 산 건, 아무래도 소재가 너무 좋아서(요리를 가르치는 1960년대 여성 화학자!), 그걸 가져다 쓰려고 한 것 같다. 왜냐하면 문장 자체나 서사가 특히 좋았다는 느낌은 안 들어서…
내용은 다들 대충 아실 것이다. 1960년대, 화학자 엘리자베스 조트는 요리와 화학 공부를 결합한 TV 요리 프로그램 <6시 저녁 식사>를 선보인다. 이것은 그녀의 이야기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녀’의 분량이 내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이 책이 전 세계에 100만 부 이상 팔렸다길래 얼마나 강력한 여성 서사를 보여 주는가 했더니, 내 기대 이하였달까.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엘리자베스 조트는 결혼은 안 했지만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었던 동료 과학자 캘빈 에번스와의 사이에서 딸 매드를 낳는다. 사실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그래서 캘빈이 청혼했을 때도 거절했다),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었는데도(그래도 애는 생겼다). 엘리자베스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연구 업적도 학과장 도나티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성추행까지 당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출산 이후엔, 미혼모라는 이유로 아예 연구소에서 쫓겨난다. 이런 일들은 분명히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고, 이걸 여성 주인공에게 겪게 한다는 것은, 그 시절 추잡한 여성혐오의 민낯을 까발리는 거나 다름없으므로 여성 서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 후반, 그러니까 2권에서도 중반쯤 되면 엘리자베스의 딸 매드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파고들게 되고, ‘여성 서사’는 결국 캘빈이 어쩌다가 생모에게 버림받아 보육원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결국 그 생모가 누구였는지 하는 쪽으로 기운다. 차라리 엘리자베스가 <6시 저녁 식사>에서 무신론자라는 말을 당당하게 해서 방송국이 발칵 뒤집히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쭉 이어가든가, 여주인공의 남편 이야기는 사실 이 소설이 아니어도, 어느 다른 소설에서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이 책의 포인트가 앞뒤가 꽉꽉 막혀 있던 1960년대에 ‘너드’ 과학자 여성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는 줄 알았는데요. 남편 출생의 비밀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해? 남편 이야기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작가가 자기 캐릭터, 특히 주인공을 묘사하는 데 이상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똑똑한 데다가 예쁘기까지 해서 사람들이 다 그녀를 질투하고 미워한다는 듯이 말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잘난 캐릭터를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가 어떻게 잘났는지 그럴듯하게, 잘 묘사하라는 거다! 이상한 묘사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예시를 아래와 같이 많이 보여 드릴 수가 있다. 별로 기쁘지 않군.
자신은 행복하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분에 넘치게 행복한 꼴을 보는 것보다 짜증나는 게 또 있을까. 헤이스팅스 연구소 동료들이 보기에 엘리자베스와 캘빈은 분에 넘치게 행복한 인간들이었다. 일단 캘빈은 똑똑했고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웠으니까. 그런데 그 둘이 연인이 되어버렸으니 당연히 그들의 분에 넘치는 행복도 두 배가 되어서 세상은 더욱 불공평해지고 말았다. 동료들이 보기에 제일 나쁜 건 그 두 사람이 분에 넘치는 행복을 노력해서 받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그들의 분에 넘치는 행복은 고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운 좋게 훌륭한 유전자를 타고났기 때문이란 말이다. 두 사람이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은 서로의 자질을 결합해 사랑하는 연인이자 아주 많이 섹스할 게 분명한 사이로 발전하자,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은 그 꼴을 매일 점심시간마다 목격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세상이 심각하게 나빠졌다고 느꼈다.
장례식에는 사람이 꽉 찼다. 조정 선수 몇 명, 기자 한 명, 헤이스팅스 연구소 직원이 50명쯤 참석했다. 연구소 사람 몇은 어두운 옷차림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그들이 장례식에 온 건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소해하기 위해서였다. 이야! 왕께서 승하하셨군. 그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초췌해진 얼굴에 텅 빈 눈빛을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프래스크는 아주 잠깐이나마 저도 모르게 이 여자가 안 됐다고 생각했다. 저 못생긴 개도 그렇고, 토한 것도 그렇고, 앞으로 다가올 온갖 문제가 다 불쌍하게 느껴졌다. 제아무리 머리가 좋고 미모가 뛰어나고 말도 안 될 정도로 남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여자여도, 조트의 처지는 여타 여자에 비해 나을 게 전혀 없으니까.
방 안엔 침묵이 감돌았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조금도 신파적이지 않게, 마치 최후의 발언권이 있다는 듯이, 결국엔 자신이 이긴다는 걸 안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는 계속 해고 통지를 거절했다.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그녀의 동료들은 이제껏 불만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과 캘빈의 관계가 절대로 분해할 수 없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처럼, 캘빈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 관계는 변치 않고 영속할 만큼 견고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 역시 어찌나 짜증 나던지.
캘빈도 종종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개는 기억했다. 그때 캘빈은 “난 이러면서 집중하는 거야”라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캘빈이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기만 한다고 불평했었다. 언제 어느 때고 그의 실험실에 가보면 캘빈 에번스가 커다랗고 화려한 실험실 안에서 온갖 고가의 최고급 장비에 둘러싸인 채 음악을 있는 대로 틀어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투덜댔다. 더욱 나쁜 건, 에번스는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돈을 받아간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가장 최악인 점은 그가 놀면서도 상을 많이 받는 과학자라는 것이었다.
캘빈의 예전 동료들도 여전히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토록 많은 상을 탈 수가 있나? 엘리자베스 조트와의 섹스는 어땠나? 그 여자 불감증인 것 같던데, 아니야? 심지어 매들린의 담임인 머드포드 선생님도 이미 오래전에 죽은 캘빈 에번스에 대해 궁금해했다.
이 작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떻길래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잘난 사람을 봐도 ‘와 잘난 사람이구나. 멋지다’에서 그치는데. 엘리자베스가 잘났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데 그 의욕이 과해서 이렇게 된 것인가? 그 답은 작가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이상하게 느꼈던 부분 하나 더. 엘리자베스는 PD로부터 <6시 저녁 식사>에 광고가 붙을 만한 아이템으로 캔 수프를 써 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이 방송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들을 잘리게 만들 수 없단 생각에 결국 수락하고 만다. 그래서 캔 수프를 가지고 방송을 시작하는데 이런 말을 한다.
세 시간 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거 보이십니까?” 그녀는 수프 캔을 카메라에 가까이 갖다 댔다. “이걸 쓰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PD 자리에 앉은 월터는 고마운 마음에 숨을 들이쉬었다. 수프를 쓰고 있구나! “여기에는 화학물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수프 캔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걸 많이 먹이면 결국은 죽게 될 겁니다. 그러면 더는 그들을 위해 요리할 필요가 없으니 시간을 잔뜩 절약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학자가 캔 수프에 “화학물질이 가득 들어 있”어서 나쁘다는 식으로 말한다고? 맛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화학자가, 화학물질을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런 식으로 치면 온 세상이, 우리 주위 모든 곳이 다 화학물질인데. 화학물질인지 천연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한 거 아닌가. 이건 도저히 화학자가 할 말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본인도 요리할 때 일어나는 화학 과정을 전문적으로 설명하는데, 그 캔 수프를 만드는 데 식품 영양 과학이 엄청 공헌했다는 걸 모를까? 차라리 맛이 더럽게 없어서 안 먹느니만 못하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이해나 가지.
이 외에도 내가 보기엔 캘빈 에번스란 남자가 그다지 대단하거나 멋져 보이지 않는데(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는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왜 그와 사랑에 빠진 건지 모르겠다. 딱히 설득력이 없달까… 엘리자베스가 내 친구였으면 그런 놈에겐 아깝다고 말렸을 듯. 그렇다고 캘빈이 막 엄청 감동적이고 로맨틱한 제스처를 취한 것도 아니고… 걔의 어디가 좋은 거지? 하지만 이 얘기까지 하자면 이 리뷰가 더 길어질 것 같으므로 이쯤 해 두자. 전반적으로 ‘쓰레기’라거나 ‘못 읽을 글’까지는 아니지만, 책 광고를 보고 내가 기대했던 ‘여성 서사’에는 미치지 못해서 아쉽고 그냥 그렇다는 느낌이다. 완벽한 단 한 명의 롤 모델을 써내라고 작가에게 요구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남편의 출생 비밀 이야기 따위로 글의 흐름을 틀어 버릴 줄은 몰랐다. 내가 바라던 여성 서사는 어디로 증발했나요? 드라마는 이걸 어떻게 각색했는지 모르지만 일단 원작은 그냥 그렇다… 이게 읽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내가 누구에게 ‘와 이거 개쩔어!’ 하고 추천할 일은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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