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강지영, 민지형, 배예람, 양은애, 최세은, <너무 길지 않게 사랑해줘>
이야… 이렇게 은근히 실망스러운 책도 오랜만이다. 완전히 망쳤다, 시간 아깝다 하는 게(0% 만족) 아니고 뭔가 ‘괜찮다’(50% 정도 만족하는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한 30-40% 정도 만족하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이지북이라는 출판사의 영어덜트(YA) 시리즈인데 ‘YA!’라는 시리즈명 외에 청소년을 타깃으로 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청소년 소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별로다. 이 책은 ‘YA!’ 시리즈에서 첫 번째로 선보이는 앤솔러지 작품이다. 다섯 작가가 참여했는데 마음에 꼭 드는 게 하나도 없다. 그냥저냥 괜찮은 게 하나 있을 뿐이다.
배예람 작가의 <사랑보다 까눌레>는 연애가 ‘필수’가 된 사회를 그린다. 1년간 연애를 하지 않은 ‘장기 연애 휴식자’는 정부의 엄중한 관리 대상이 되어서 “틈만 나면 날아오는 우편물, 끝없는 전화와 문자, 국민 연애 관리공단 앱에서 보내는 알림” 등등을 받아야 한다. 연애가 강제 사항이 되는 이 디스토피아에서 주인공 주영은 “국민 연애 지원사업인 ‘사랑할 기회’”에 참여해, 자신의 친구 은비 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참여자 태우 중에서 한 명을 골라야 한다. 주위 사람들이 연애를 하고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봐왔지만 주영은 그저 “잘못 태어나버린 돌연변이”처럼 “사랑이 왜 모든 것에 대답이 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다. 주영이 이번 합숙에서 연애 상대를 찾지 못하면 “고위험군 장기 연애 휴식자”가 되어 ‘사랑할 기회’ 같은 프로그램에 주기적으로 참여하거나 연애 상담과 소개를 꾸준히 받아 적극적으로 구애 중인 상태라는 것을 국가에 증명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
살벌한 설정은 그렇다 치고, 이쯤 되면 누구나 이 소설이 어떻게 끝이 날지 대충 예상이 가능하다. 연애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연애에 크게 마음이 없고, ‘사랑’만이 정말 답인가 고민하는 주인공. 상식적으로 ‘연애, 사랑을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는 없고 연애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므로 이 디스토피아 사회가 주영에게 연애를 강요해도 그녀는 굳세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것으로 끝을 내야 할 것이고, 대체로 그러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이 소설도 그렇게 끝이 난다. 근데 그 끝이라는 게… 제목에서 암시하듯 주영은 사랑보다 까눌레를 즐기기로 하고, 태우가 소개해 준 베이커리에서 까눌레를 사먹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아니, 주영이 자신의 길을 가는 엔딩은 이해가 되는데, 그냥 까눌레를 사 먹는 걸로 끝이 난다고요? 좀 뭔가 더 멋있게 끝을 낼 순 없었나? 아니면 아예 독자의 기대를 부수고 주영이 ‘사랑 최고, 커플 천국’ 매니페스토에 세뇌되어 공허한 연애를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장면으로 끝을 내든가. <1984>가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라고 세뇌 엔딩으로 끝이 나듯이. 그렇게 끝이 나면 차라리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느껴져서 기억에라도 남겠지. 까눌레를 사먹는 엔딩 뭔데!
민지형 작가의 <너무 길지 않게 사랑해줘>는 엔딩은 그나마 낫다. 이 단편소설도 무시무시한 사회를 설정해 놨는데, 2070년, 공부와 노동이라는 시스템이 대변혁을 맞이해, 사람들은 공부할 필요도, 노동할 필요도 없게 된다. 남아도는 시간을 사람들은 ‘쇼츠’라고 불리는 짧은 영상을 보며 보낸다. 학교에서는 자연스럽게 이 쇼츠를 만드는 기술과 노하우를 가르치게 되었다.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계정을 가졌고,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다. 어렸을 때부터 높은 조회수, 수많은 팔로워를 가진 계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모범생으로 인정받았다.” 읽을 때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리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뭐 이런 ‘매드 맥스식 국가 운영’이 다 있나 싶다. 그 유명한 ‘전국민 유튜버’ 짤이 생각나지 않는가.
왜 이렇게 설정을 했는지, 제목이 왜 <너무 길지 않게 사랑해줘>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이수는 학교에서 일 등인 인플루언서이다. 그는 학교의 평균 조회수와 팔로워 수를 깎아먹는 학생, 정원을 도와 달라는 학교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이 부탁을 들어 주면 교장 선생님이 누적 조회수 일 억은 넘겨야 들어갈 수 있다는 회사의 대표에게 말을 잘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에) 정원이 더 나은 인플루언서로 거듭날 수 있게 돕기로 한다. 정원은 말투도 느릿하고, 쇼츠 영상도 잘 보지 않으며, 무려 1시간 40분이나 되는 옛날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좋아한다. 대충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감이 잡히시는가? 이수는 정원을 도우면서 긴 시간을 들여 집중해야 하는 일(영화 보기, 여행하기 등)의 매력을 알게 된다. 집중력이 쇼츠에 길들여진 이 세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지 않은가. 이건 엔딩은 괜찮은데 역시 ‘매드 맥스식 국가 운영’이 너무 웃겨서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최세은 작가의 <오차범위는 작게> 속 세상도 기이하다. 어느 날, 사람들은 게임 UI처럼 내 일상과 연관되는 질문과 선택지를 보게 된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 희준은 같은 편의점에서 일하는 동료 이민우에게 아르바이트 대타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런 선택지를 본다.
동료 이민우가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선택지를 고르세요.
1. 거절하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
2. 수락한다.
빅데이터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탄생한 일상 알고리즘은 ‘선택지 신드롬’으로 불리고, 사람들은 생체 렌즈를 인식해 이 선택지를 삶의 한 가이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렌즈 삽입이 불가능한 눈을 가진, 우리의 주인공 희준 같은 경우는 안경을 통해 이 선택지들을 본다. 그런데 모종의 사건이 생겨 이 안경이 부서지게 되고, 새 안경이 맞추어지는 3주간 희준은 안경 없이, 즉 다시 말해 선택지 없이 살게 된다. 다들 예상할 수 있다시피, 그 기간 동안 희준은 선택지에 의지해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건 제일 ‘그냥 그래’ 싶은 작품이었다.
강지영 작가의 <1나노그램만큼 사랑해>는 회피형과 통제형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에 대입해서 통제형인 엄마와 회피형인 자식으로 풀어냈다. 엄마는 딸에게 다이어트를 시키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한하고, 생리통이라는 딸의 말에 “덱시부프로펜 300밀리그램 하나 먹어. 안 들으면 타이레놀 추가.”라고 구체적으로 명령을 내릴 정도다. 엄마가 너무 통제형이라 읽는 내가 다 괴로웠는데, 내 불만은 그것보다 다른 데 있다. 이 작가는, 특히 이 작품에서 왜 그렇게 묘사를 브랜드로만 하는 거지? 그냥 하이힐도 아니고 ‘지미추 하이힐’, 그냥 베이글도 아니고 ‘코스트코 블루베리 베이글’, 크림치즈는 ‘마담로익 크림치즈’. 굳이 모든 것을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소설을 읽는 건지, 보그 같은 패션 잡지를 읽는 건지. 이것도 묘사로 치나? 또한 다른 작품들은 ‘신드롬’이라고 할 만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구체적인 현상을 가지고(예를 들어 연애, 쇼츠, 선택지) 소재를 잡았는데 이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회피형과 통제형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 건가? 나에겐 모녀 사이의 애증이 더 크게 느껴졌는데.
마지막 작품, 양은애 작가의 <시크릿 캔디>는 극 중 청소년 사이에 유행이라는 ‘파피캔디’를 말한다. 이 사탕을 먹으면 눈 색깔이 그 사탕 색깔로 바뀐단다. 노란색 사탕을 먹으면 노란색으로, 보라색 사탕을 먹으면 보라색으로. 국정감사에 이 ‘파피캔디’를 만드는 식품 회사의 대표가 참석할 정도로 선풍적인 유행이라는 설정. 당연히 한국답게 처음에는 (학생들이 이 사탕을 자주 사고파는) 중고거래 앱의 사용을 금지한다. 아이들은 눈 색깔이 같은 아이들끼리 놀고, 다른 눈 색깔 아이들을 차별한다. 결국 정부는 ‘파피캔디 관련 사회 안정화 대책’으로 파피캔디의 색을 회색으로 통일하기로 하는 엔딩. 해경이 문제가 되니 해경을 해체하는 한국식 해결법다운데, 어, 이미 눈 색이 바뀐 애들이 그 사탕을 자발적으로 먹을까요? 🙄
다섯 편이나 실려 있는데 ‘이거다’ 싶은 작품이 하나도 없고 뭔가 하나씩 부족해서 실망스러웠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기에 망정이지, 직접 사서 읽었으면 화났을 듯.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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