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아라의 소설>

by Jaime Chung 2025. 8. 1.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아라의 소설>

 

 

<옥상에서 만나요>를 쓴 정세랑 작가가 2011년부터 (이 책이 출간된) 2022년까지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작품집. ‘엽편 소설(葉篇 小說)’이라 할 정도로 아주 짧은(200자 원고지 20-30매 분량) 것부터 비교적 긴 것(200자 원고지 70매 분량)도 있고, 소설도 있으며 (두어 편이긴 하지만) 시도 있다.

제목이 ‘아라의 소설’인 건 이 다양한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반(半)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아라’이기 때문이다. 아라는 작가가 “가장 과감한 주인공”에게 붙이는 이름인데, 작가를 닮기도 했고 닮지 않기도 했다. 나는 각 작품 뒤에 나오는, 이 작품이 어디에 실렸고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를 설명하는 짧은 글을 읽는 게 무척 재미있었다.

 

<아라의 소설>이라는 표제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이라이트를 하고 싶을 정도로 기가 막혔다. 다 보여 드릴 순 없고 핵심만 조금 뽑아서 보여드리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맥락은, “차기작은 연애소설이면 좋겠다”라는 담당자의 말에 작가 아라는 “요즘 연애소설이 잘 안 쓰인다”며 멋쩍게 웃어 보인다. 담당자가 돌아가고 나서 혼자 생각하는 아라. 3일에 한 명씩 여자들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성매매 산업이 얼마나 거대하고 처참한지 알아버린 다음에, 화장실에 뚫려 있던 구멍들이 뭐였는지 깨달은 다음에, 어떻게 연애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과연 아라는 이대로 연애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될 것인가?

여성 창작자들만 살얼음판을 걷듯 윤리에 대해 고민한다고 투덜대는 동료들도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남성 창작자들이 해온 것처럼 이런저런 금기 위에서 제멋대로 데굴데굴 구르고 뭉개면 왜 안 되느냐고 말이다. 데굴데굴하는 상상만으로도 위안은 되었지만, 더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걷지 못하면 버려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여성 창작자들에게 한층 가혹했다. 그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금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발을 옮겨놓을 수밖에.

어쨌든 잘하는 걸 하자, 아라는 키보드에 손가락을 가볍게 올려놓았다. 아라가 잘하는 것은 목 넘김이 좋게 당의정 입히기. 그리고 폭력의 희미한 기운을 감지하기. 그렇다면 일단은 연애소설처럼 보이는 스릴러 소설을 쓰면 어떨까? 태연한 얼굴을 한 폭력의 기미를 이르게 잘 발견해서 안전하고 자유로워지는 주인공에 대해 써야겠다고 말이다.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랑 아닌 것에 대해서 치밀하게. 사랑 이야기인 듯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이것이 타협인 줄은 알고 있다. 그러나 계속 가다 보면 타협 다음의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모퉁이를 돌지 않으면 영원히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으니까, 가볼 수밖에. 아라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고민해 볼 법한 질문이다. 독자로서도, 한 여성으로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고. 이런 것까지 생각하다니 역시 이래서 요즘 여자들은 여자 작가들 책만 읽는구나 싶기도 하고.

 

<아라의 소설 2>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문단의 한 동료 작가가 아라에게 “너는 말야, 계속 그런 거나 써.”라고 말하고, 아라는 이에 ‘애초에 그런 거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대중소설? 장르 소설? 여성주의 소설? 그렇지만 여성이 여성적인 목소리로 말하면 안 되나? 내 이름이 어리게 들리는 여자 이름이라 만만하게 보고 그러는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가 다다른 곳은 이곳.

그런 아라였지만 포털의 생년월일을 지워야 하나 잠시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성 작가는 중년에 이르면 권위를 얻는데 여성 작가는 ‘예리함을 잃고 아줌마 소설을 쓴다’고 폄하당한다. 사람들이 “히익, 보기보다 나이 많으시네요” 하고 면전에서 무례하게 굴거나 “동안이시네요” 하고 돌려 말하는 것에 질려 많은 선배가 프로필에서 아예 정보를 빼버렸다. 나이 이야기를 계속 듣는 것도 싫지만 그보다는 일이 끊길까 봐 고민되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지워지지 않기 위해 아라는 매 순간 치열해야 했다. 가만 서 있으면 파도가 발밑의 모래를 끌어가듯이 자꾸 토대가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싸우고 또 싸워야 족적을 남길 수 있으리란 걸 잊을 날이 없었다.

그래도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계시는 듯했다. 세상을 뜨고 나서도 그렇게 생생한, 계속 읽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좋은 가늠이 되었다. 사실 아라가 생전의 선생님을 뵌 건 아주 잠깐, 아주 멀리서였고 그것도 뒷모습이었다. 그때 아라는 대작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다는 기이한 생각을 했다……. 한 올만 뽑으면 안 될까 하고 록스타에게 손을 뻗는 팬처럼 침을 꿀꺽했지만 물론 그런 망나니짓은 하지 않았다. 용기 내 앞에서 인사라도 드릴걸,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따라 걷는 자에겐 뒷모습이 상징적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게 된 건 요즘의 일이었다.

이 작품은 박완서 추모 콩트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실렸다. 정세랑 작가 외에 28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이 작품 뒤에 나오는 코너에서 저자는 “대학로에서 잠시 뵈었을 때 선생님의 머리카락을 탐냈던 것은 실제 나의 경험이다”라고 밝혔다. 나의 존잘님을 만나게 된다면 나라도 그럴 듯… 인정합니다. 다른 작가도 아니고 박완서님인데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참나요…

 

<마스크>라는 엽편은 얼굴을 모두 가리는, 얼굴에 얹는 부드러운 막 같은 마스크를 쓰게 된 근미래를 그린 작품이다. 실내에서도, 잘 때도 써야 하는 제2의 얼굴인데 사람들은 여기에 고전영화 속 배우들의 얼굴을 가져다 쓰거나 기원전 조각, 멸종하고 없는 동식물의 일부, 천체 사진 등등으로 장식하기도 한다고 저자는 상상해 본다. ‘미래의 뷰티’라는 콘셉트로 2019년 3월에 잡지 <W>에 기고한 작품. 저자는 “30년에서 50년 후의 뷰티 프로덕트를 상상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썼다. 썼던 중 가장 짧은 편에 속하는데 이상하게 가장 좋아하는 편에 속하기도 한다. 청탁한 분들이 원했던 내용은 아닐 수 있겠다.”라고 썼다. 마지막 문장 은근하게 웃긴 거 아니냐며 ㅋㅋㅋ

 

이 외에도 귀엽고 재미있는 엽편들이 많다. 아무래도 각각의 작품이 짧고 이어지는 흐름이랄 것도 없어서 언제 어디서 읽어도 좋다. 화장실에서 일 볼 때 읽어도 좋고, 출퇴근길에 조금씩 짬을 내서 읽어도 좋고, 무엇보다 호흡이 긴 작품은 읽기 부담스럽다 하는 분에게도 좋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