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민지형, 정재윤, 임소라, 미역의효능, 류시은, 들개이빨,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
제목부터 기가 막힌 이 책은 민지형, 정재윤, 임소라, 미역의효능, 류시은, 들개이빨, 이 6인의 작가들이 참여한 앤솔러지이다. 홀수 순번에 나온 작가들(민지형, 임소라, 류시은)은 소설로, 짝수 순번에 나온 작가들(정재윤, 미역의효능, 들개이빨)은 만화로 참여했다. 개인적으로는 미역의효능 작가님을 좋아해서 이 책 발간 소식을 듣자마자 이북으로 나오길 기다렸는데, 마침 또 밀리의 서재에 들어왔길래 바로 읽었다. 미역의효능 작가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2017년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작인 <아 지갑놓고나왔다>와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를 그리신 분이다. 둘 다 여성 서사가 미친 작품이니 혹시 카카오웹툰을 이용하신다면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 어쨌거나 이제 본격적으로 이 앤솔러지에 참여한 작품을 소개해 보겠다.
민지형 작가의 <어느 놈을 죽일까요 알아 맞혀보세요>는 제목 그대로 세상에 죽일 놈이 너무 많아서 누굴 죽여야 할지 골라야 하는 킬러의 이야기이다. 1인 네일 숍을 운영하는 ‘나’는 사실 청부 살인업도 겸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한 여자에게서 자기 딸 가영을 죽게 만든 놈을 꼭 찾아서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원래 타깃이 정해지면 딱 그 사람만 죽이는 ‘나’이지만 가영 어머니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져 이 의뢰를 받아들인다. 이제 ‘나’는 가영 어머니의 말대로 “딸아이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 이 중에 제일 죽어 마땅한 사람”을 찾아 죽여야 하는데, 가영의 삶에는 죽어 마땅한 남자가 한둘이 아니다. 가영에게 성 착취물을 찍은 놈, 그놈에게서 가영을 ‘넘겨받아’ 재미로 갖고 논 놈, 가영에게 폭력을 사용한 놈, 가영의 노동력을 착취한 놈 등등. 이 많은 놈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가영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일까? 그냥 전부 다 죽이면 안 되나?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라는 제목의 앤솔러지의 첫 작품으로 딱 맞는 작품이다. 참고로,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한 친구와 “남자가 여자를 때렸거나, 죽였거나, 성폭행했거나, 디지털 기술로 능욕했거나, 차별했거나, 부당하게 대우했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다”라는 말을 했단다. 여기에서 이 앤솔러지의 제목이 나왔고, 그 친구는 사실 이 앤솔러지에 함께 참여한 류시은 작가라는 반전! 역시 끼리끼리 is 사이언스. 존잘님들은 존잘님들끼리 친구로군… 부럽습니다.
정재윤 작가의 <BUBBLE POP!>의 주인공은 주경이다. 그는 수영장에 다니는데, “벗은 몸을 성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건 수영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덩.”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느 날 그가 수영을 배우는 수영장에 한 미친놈이 나타나 몰카(불법 촬영물)를 찍어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다. “몸은 몸일 뿐이라고 주문처럼 되뇌며 주경이 자신의 세상 안에서 여러 성공과 실패와 혼란과 질문을 거듭하는 동안 주경 밖 세상에서 몸은 정말로 몸만 남아버렸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불법 촬영이 두려워 외출해서도 화장실을 이용하기를 꺼릴 텐데, 그런 점에서 독자들이 공감할 만하다. 참고로 정재윤 작가는 20대 여성의 삶을 9컷 만화에 잘 담아낸 <재윤의 삶>도 그렸다.
임소라 작가의 <순수 러브 캠프>는 <너무 길지 않게 사랑해줘>에 나오는 배예람 작가의 <사랑보다 까눌레>처럼 여자남자들이 억지로 짝지어져야 하는 캠프가 배경이다. 충남 산상군이라는 가상의 지방에서 벌어지는 이 행사는 지방 소멸을 막고 젊은 인구의 결혼율과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남자 여섯 명, 여자 여섯 명이 모인 곳이다. 주인공 일순(대충 <나는 솔로>식의 작명법으로 지어진 가명)은 산상군의 공무원으로, 이 ‘청년 만남 지원 산업’(이게 뭔지 모르겠다면 이런 기사를 보시라)에 여성 지원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차출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아니 안 놀라운 건, 여섯 명의 여성 참가자 모두 일순과 같은 이유로 강제 참여하게 된 공무원들이란 것. 이들은 서로 똘똘 뭉쳐 서로 도와주기로 한다. <사랑보다 까눌레>는 그래도 극단적인 상상이고 허구지만, <순수 러브 캠프>는 그야말로 매드 맥스 같은 디스토피아가 현실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아찔하다.
미역의효능 작가의 <미역 생태 보고서>는 2024년을 살아낸 한국인이라면 이것이 정확히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를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폐미’나 ‘스윗미역’ 같은 말장난이나, ‘계엄치’, ‘내란’, 응원봉, 기장 미역들이 서식지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 이 정도면 줄거리를 소개하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셨을 듯. 그래도 간단히 얘기하자면 이렇다. 옛날 옛적 남해 어디쯤 있는 깊은 바다에 완도 미역과 기장 미역이 사는 미역 왕국이 있었다. 과거 미역의 역사에 의하면 기장 미역은 완도 미역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완도 미역에 대한 차별이 금지된 지 약 100년, 완도 미역은 ‘줄기와 이파리가 작고 얇을수록 품질이 좋고 재색이 빼어난 고급 ‘미(美)역’으로 여겨지고, 이들은 크기가 커지지 않기 위해 지나친 광합성을 피한다. 반면 기장 미역들은 광합성을 많이 해 아주 튼튼하고 두툼하다. 당연히 기장 미역은 크고 두꺼울수록 고급으로 취급된다. 이게 뭘 가리키는 건지 잘 아시겠지요? 각 작품 뒤에는 그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 문제의식과 관련된 내용이 짧게 인용되는데 이 <미역 생태 보고서>는 ‘윤 탄핵 집회에서 2030 여성의 참가율은 27.1%, 2030 남성은 9.9%.’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가 실렸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텐데, 혹시나 이걸 다 읽고도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면, 예… 자신이 미역보다 못한 수준이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류시은 작가의 <최초의 직원>은 보통 어느 곳에서 ‘최초의 여자 직원’이라고 할 때의 그 ‘최초의 직원’이라는 뜻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체감산 한국에서 몇억 광년쯤 떨어져 있는 듯한 D-프로젝트 시추 현장에 파견나온 직원 중 내가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이라는 사실은 이곳에 도착하고 몇 주 지나서야 알았다.” 그는 현지에서 꼭 먹어야 하는 말라리아 예방약의 부작용으로 “눈앞이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올라와” 고생한다. 이 장소는 동남아일 수도, 아마존 근처의 어느 아프리카 지역일 수도, 어쩌면 내가 상상한 것처럼 완전히 다른 행성일 수도 있다. ‘나’는 최초의, 유일한 여성 직원이기 때문에 모든 여성을 대신해 이곳에서 자리를 지켜야 할 막대한 의무를 느끼고, 피로 때문인지 정신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인지, 예전에 알던 유주라는 친구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이 작품 뒤에는 내가 리뷰를 쓰기도 한,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 한 문단 인용되어 있다. 여성도 복용하지만 실제로 여성 피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이 시행되지 않아 실제로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없는 약과 관련해서다.
마지막 작품, 들개이빨 작가의 <남자 패는 만화>는 작가의 혼란스러움이 잘 반영된 만화다. 극 중 만화가 유웅은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라는 한 문장을 보고 떠올린 어떤 내용이라도 좋다는 원고 청탁을 받게 된다. 유웅이 제일 먼저 반사적으로 떠올린 생각은 (남자를) “죽여야겠네.” 하는 것이다. 왜냐? ‘20대 남자 앙심 품고 여자 살해 / 30대 남자 홧김에 여자 살해 / 40대 남자 욱해서 여자 살해 / 50대 남자 실수로 여자 살해 / 60대 남자 이유 없이 여자 살해’ 하는 뉴스를 보니 “그래야 균형이 맞지.”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폐경(완경)과 동시에 (동물, 인간을 막론하고) 상대의 성별을 바꾸는 초능력이 생긴 미혼모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의 콘티를 구상한다. 이 콘티를 짜고 나서 편집자, 모부, 대학생, 심리상담사, 트랜스 친구들에게 보여 주니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작품 속 유웅이라는 만화가가 들개이빨 작가 본인의 반영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 진실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며, 작가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다만 나는 만화 속 트랜스 여성(타고난 성 남성)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시스젠더 여성인 유웅에게 “금테에 (여성 성기)* 두르고 태어난 시스젠더년은 닥치고 있으라”고 했던 말이나, 트랜스 남성(타고난 성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에게 “나 같이 (남성 성기)* 달린 년도 먹니?”라고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괄호 뒤에 별표(*) 붙은 부분은 적나라한 표현이라 내가 순화한 것이다). 아직 남성 성기를 달고 있으면 ‘성별 정정 수술’도 안 한 건데 어떻게 자기를 여성이라고 생각한다는 건지? 여성, 남성이라는 게 단순히 타고난 성기의 문제냐고 할 수도 있지만(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타고난 섹스가 아니라 사회적 성 ‘젠더’가 문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학자 쉴라 제프리스가 말하는 것처럼, 시스젠더 여성의 문제는 여성이라고 사회적으로 인지된다(젠더)는 점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를 하고 있다는 (섹스) 점에서 기인한다. 생물학적인 성 때문에 여아는 태어나자마자 ‘여성’이라는 카스트에 배정받는다. 여장을 하는 남자는 ‘여성복’(젠더)을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자는 여자라는 사실을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없다.”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에서 인용했다.) 이 만화 속 유웅의 엄마가 걱정하는 것처럼, “웬 미친놈이 또 아무 여자가 막 칼로 찔렀"다는 것도 여자가 자신의 생물학적 여성성을 벗거나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심한 밤길, 여성의 신체를 타고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남자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남성의 신체를 가진 이들이 이를 남자로 볼까? 이미 여성 혐오 사회에 남성-여성, 단 둘로 구분되는 생물학적 성을 기반으로 성 카스트가 굳건히 정해져 있는데 젠더만이 중요하고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약간 샜는데, 페미니즘 담론에서 이것도 꼭 논의해야 할 부분인 데다가 만화 내에 트랜스 인물이 등장해서 그렇다. 어쨌거나, 들개이빨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만화였다. 참고로 이분이 그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이 만화 편집자 김해인의 책 <펀치>에도 언급되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제목을 보자마자 끌렸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끝내주는 소설과 만화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현재 밀리의 서재에서 이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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