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Charles Yu, <Interior Chinatown>
이 소설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저자인 찰스 유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중국계 미국인 작가로, 국내에도 그의 작품이 몇 권 번역돼 나왔는데(알라딘 내 검색 결과) 2020년작 <Interior Chinatown>은 여태 번역이 안 돼 있다. 2020년 ‘내셔널 북 어워드’ 상도 받고 뉴욕타임스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내가 이 책을 다 끝낸 날 바로 다음날 저녁에 발견한 대로) 디즈니에서 드라마화(IMDB 페이지)되기도 한 이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니 무척 아쉽다.
이 소설은 ‘현실(독자 여러분이 사는 진짜 현실 말고, 소설 속에서 ‘현실’이라고 인식되는 것)’과 영화나 TV 드라마 같은 ‘미디어’가 뒤섞여 있다. 제목의 <Interior Chinatown>은 차이나타운의 (아마도 중국풍) 인테리어를 말하는 게 아니고, 보통 영상 작품 극본에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실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장면의 배경이 ‘차이타나운, 실내’라는 뜻이다. 소설의 주인공 윌리스 우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아버지는 영화에서 쿵푸 ‘사부(중국어로 ‘sifu’)’ 역을 맡은 배우였고, 어머니 역시 영화에서 예쁜 여종업원 역을 맡은 배우다. 둘이 원래부터 배우였던 것은 아니나, 차별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와 살면서 작은 역이라도 맡아 연기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윌리스에게는 쿵푸뿐 아니라 모든 것에 뛰어나고 인기도 많은 형이 있는데, 형은 독립해서 살고 있고 윌리스가 혼자 SRO(Single Room Occupancy, 개인이 사용하는 방들은 따로 있고 공용으로 사용하는 부엌과 화장실이 있는, 한국으로 치면 고시원 같은 건물)에서 살면서 같은 SRO에서 따로 사는 부모님을 돌본다. 그는 아버지처럼, 형처럼 쿵푸를 잘하는 ‘쿵푸남(Kung Fu Guy)’ 지위에 오르고 싶어서 매일 쿵푸를 연습해 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요즘 부쩍 늙었고 자신은 여전히 (소설 속) <로앤오더: 성범죄전담반>풍 <Black and White>라는 수사물 드라마에서 ‘무명 동양남(Generic Asian Man)’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 작은 역에서 벗어나 더 큰 역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데…
이쯤 되면 다쯤 감 잡았겠지만, 이 소설은 동양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차이나타운에 사는 윌리스는 쿵푸 ‘사부’ 역을 맡기를 꿈꾸지만 현실의 그는 그냥 ‘무명 동양남’에 불과하다. TV 드라마에서 대사 하나 없는 ‘무명 동양남’ 역할을 맡는 것과 미국 사회에서 별 존재감 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동양남으로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적어도 윌리스는 그렇게 느낀다). 윌리스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액센트도 없이 완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 한두 줄이라도 있는 역할이라도 맡으려면 영어를 못하는 척해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은 ‘무명 동양인’ 역밖에 없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쿵푸남이 되지 마라. 그 이상이 되렴(Don’t grow up to be Kung Fu Guy. Be more.)”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쿵푸남이 되려고 애쓴다. 나중에 모든 것을 겪고 나서야 어머니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이해하지만. 극 중 잘나가는 수사물 드라마 제목이 <Black and White>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 갈등이라고 하면 대체로 백인과 흑인을 떠올리지, 동양인은 세 번째나 네 번째(라틴계 미국인들 다음으로)로 언급되기 일쑤니까. 그런 상황에서 동양계 미국인이 어떻게 자신도 이 나라의 엄연한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나는 여기 있을 가치가 있다’고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극 중 ‘현실’과 ‘미디어’가 뒤섞여서, 각 장면이 각본처럼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이다. 맨 앞에 배경(예컨대 ‘차이나타운 SRO 내부’)이 서술되고, 대사도 등장인물 이름이 먼저 나온 후 그 인물이 하는 대사가 그다음 줄에 뒤따르는, 각본 형식 그대로다. 주인공 윌리스를 가리키면서 ‘you’라는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서 <Black and White> 속 그린 형사(백인 여자 형사 캐릭터)가 윌리스를 돌아본다는 뜻으로 “Green turns to look at you.”라고 서술하는 식이다. 각본 형식을 따르는 동시에, 독자가 윌리스라는 ‘역할’을 맡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무명 동양남’ 역을 연기하는 윌리스를 연기하는 독자라니!
소설 초반에 윌리스는 아버지가 늙었음을 체감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덕분에 나도 눈물깨나 흘렸다. 아니 이 소설 뭔데 초반부터 독자를 이렇게 울리냐며… ‘고맙다’, ‘미안하다’ 같은 말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딱히 권위적인, 나쁜 아버지여서가 아니라, 가족이니까 그런 건 다 이해되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랬다) 나이가 들어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데, 아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장 보기, 화장실 휴지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기, 아버지가 먹어야 하는 이런저런 약 챙기기, 물건들을 아버지의 손에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놓기, 바닥 닦기, 매트리스 패드가 축축하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갈기, 빨랫감 줍기, 침대 곁 탁자에 쌓인 마른 가래와 피가 묻은 휴지 모아서 버리기, 탁자 뒤와 주변에 모인 휴지 버리기 등등. 노인을 돌볼 때 해야 하는 일들을 현실적으로 묘사해서 읽는 내가 다 마음이 아팠다 🥲
이 소설을 기반으로 한, 디즈니 플러스에서 볼 수 있는 미니 시리즈는 놀랍게도 작가 찰스 유 본인이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미니 시리즈는 소설과 약간 다른데, 아무래도 소설이 아니라 영상물이기 때문에 저자가 생각했던 것을 더 잘 구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이 좀 더 좋지만). 미니 시리즈 속 윌리스 유는 <Love Hard(러브 하드)>(2021)에서도 동양남 주인공을 맡은 (당연함, 본인이 동양남임) 지미 양이 맡았고, 그의 친구 패티 초이(Fatty Choy) 역은 역시나 지미 양 뺨치는 인기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로니 쳉이 맡았다. 영상물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잔뜩 이용해 TV 드라마, 수사물에 대한 패러디라고 할까, 그런 데서 자주 쓰이는 트로프(trope, 이게 무엇인지는 이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했다)를 이용한 장난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소개하자면, 중국계 미국인이 주인공인 <The Truman Show(트루먼 쇼)>(1998)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미니 시리즈도 볼만하지만 역시 소설이 더 좋으니까 소설 꼭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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