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서해, <여름은 고작 계절>
종종 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책들을 만나곤 한다. 이 책이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민음사TV 영상을 통해 알게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의 서재에도 들어왔길래 바로 읽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김서해 작가의 전작은 “주인공이 너무나 나 같다”라는 평을 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하는 거라 뭘 기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읽고 나니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접해서 좋은 경험이었다는 느낌이다.
일단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주인공 제니는 2000년 즈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악착같이 영어를 배우고 미국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던 제니는 어느 날 학교에 전학 온 한나를 만난다. 한나는 영어도 잘하지 못하면서 매번 영어식 발음 ‘해나’가 아니라 한나라고 불러 달라고 말하는 조금 독특한 아이다. 그는 축구부에서 활동하고 영어도 잘하는 제니를 존경하고 부러워하며 잘 따른다. 제니는 영어를 배워서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려는 의욕도 없어 보이는 것 같고 매번 자기에게 통역사 역할을 부탁하는 한나가 귀찮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에게 스며드는 제니. 그러던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마는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제일 인상 깊었고 공감했던 건, 중국 출신인 셰리네 엄마와 제니가 나누는 대화였다.
그 비위는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공항에서 어렴풋이 예견했던 불안에서 기인한다. 나는 틈에 낀 종이 신세였기 때문에 틈만 나면 변신했다. 증명하려고, 정당하려고. 빨리 적응하려고. 어느 날은 로렌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새라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한나 엄마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책이나 드라마에서 본, 내가 영어를 공부할 때 참고했던 캐릭터들이 되었다. 끝도 없이 펄럭거렸다. 또 어느 날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엄마가 되었고, 우리 아빠가 되기도 했다. 그 종이들은 나와 아주 닮아서 부분부분 구김새가 똑같았다.
내가 된 적은 별로 없었다. 인격이 매일 이리저리 바뀌었다. 페르소나의 정글에 갇혔다. 인생은 하난데 내가 연기하는 인물은 자꾸 바뀌어서 매일 새롭게 적응해야 했다. 적응이라면 신물이 나는데도 그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민자의 신이 이민자들에게 내리는 복이자 벌, 축복이자 저주, 가호이자 징크스는 바로 산산조각 난 정체성이다. 그 조각들은 계속해서 다르게 조합되고 결합하며 모양을 바꾼다. 이것이 인간들에 대한 나의 강한 비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셰리도 이민자 가정의 딸이니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리를 얻고 싶은 마음, 다시는 쫓겨나고 싶지 않은 마음,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연기하는 마음 말이다. 그 애는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해준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적어도 너는 여기서 태어났잖아’ 하고 반론을 펼치고 싶었다. 너는 여기서 자랐잖아. 네 이웃들이 네 인생을 다 알잖아. 너도 똑같이 인종차별을 겪었겠지만 적어도 네 모국어는 영어잖아. 나는 네가 아닌데 어떻게 너와 같은 마음이겠어, 나는 네가 아닌데 어떻게 너의 눈으로 나를 보겠어, 하고 말이다.
“넌 만약 한국에 돌아가면 어떨 것 같은데?”
“거기선 적어도 칭챙총 소리를 듣다가 어떤 애를 때려눕히고 ‘혼자’ 정학당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거기선……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셰리 엄마는 고개를 흔들더니 아주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는 오솔길을 걷다가 골목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건 행복하지 않은 네가 만들어내는 환영이야.”
나는 발끈하듯 되물었다.
“그럼 저는 어딜 가도 행복하지 않은 건가요?”
“그런 뜻이 아니야. 행복하고 말고는 결국 너에게 달려 있어. 고향에 돌아간다고 차별을 겪지 않을까? 그곳만의 방식이 있겠지. 잘 봐, 한국에서는 제니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까? 네가 기억하는 곳이 그대로 있을까? 기억은 제대로 나고?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서.” 우리는 내가 사는 아파트 건물 앞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거의 동시에 속도를 조금 낮추었다.
“아니겠죠.”
“가끔 친척들을 만나러 중국에 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 ‘쟤는 미국에서 온 사람이야, 아주 글렀어. 미국에서 좀 살았다고 중국어를 못하는 척해. 어떻게 중국인이 중국어를 잊어?’ 그런데 내가 중국의 문화나 정치, 어떤 사안에 관해 말하려고 하면 ‘미국인이 감히 중국에 대해 떠들어?’라고 하고.”
이도 저도 아니어서 부딪히고 깨진, 산산조각이 난 셰리 엄마는 말했다.
“어차피 어딜 가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어.”
그는 인사를 건네더니 나를 우리 아파트로 밀어 넣고 돌아섰다. 진눈깨비 비슷한 성긴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셰리 엄마에게 소리쳤다.
“그럼 아줌마는 행복하세요?”
셰리 엄마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끼워 넣은 채로 몸을 굽히며 깔깔 웃었다. 그렇게 속 시원한 웃음은 난생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민자 또는 유학생처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닌 타국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느끼는, ‘나는 이곳(지금 있는 나라)에도, 저곳(모국)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는 감정. 나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여기에서 만에 하나 자식을 낳고 기른다고 해서 내가 이곳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이곳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여기게 될까? 내 결론은 이거였다. 내가 여기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 그게 뭐가 중요한가. 애초에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도 별로 느끼지 않고 혼자 하고 싶은 거,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하지 마라. 애초에 세상은 나를 가진 적이 없다’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인종 차별처럼 분명히 말로 표현할 수 있고 현존하며, 또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 문제는 물론 나도 피하고 싶지만, 어딘가에 속한다는 감정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라 어디가 됐든 자기가 엉덩이 붙이고 살기 나름 아닌가.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 송환이나 추방 같은 이슈가 없으면 그냥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에서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가족이었나,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공부를 하러 갔는지, 가서 성공했는지 어쨌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딱 이 한 부분만 기억이 난다. 인터뷰이는 자녀가 있는 남성이었는데, 미국과 한국의 교육 제도를 비교하는 이야기를 했더랬다. 마지막에 인터뷰어는 ‘따님이 미국에서 살길 바라나’ 같은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그의 대답이 의외였다. 그는 자기 딸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디에 있든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도 예전에 이 인터뷰를 처음 봤을 때는 ‘어, 그래도 미국에서 좋은 대학 가고 돈 잘 벌면 좋은 거 아닌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불행해질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이 인터뷰이의 말에 100% 공감한다. 상황이 어떻든 본인이 중심이 잘 잡혀 있으면 어느 나라에 있든 행복하겠지. ‘한국은 이래서 불행하고 어떤 나라에 있어야지만 행복해!’라고 한다면, 뭐, 그 나라에 있는 동안은 행복하겠지만 거길 벗어나면 곧장 불행해진다는 뜻일 거다. 물론 한국의 어떤 점이 한국인을 힘들게 하는지 나도 너무너무 잘 알지만(특히나 그 무한 경쟁 문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나라에 있든 행복할 수 있는,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소설 후반에, 적당히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하자면, 결국 다른 친구를 통해 다시 우정에 대한 믿음을 되찾았달까,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었달까, 그렇게 되는 게 좋았다. 한 사람이 준 상처는 결국 다른 사람으로 치유되는 법. 그게 우정이든 사랑이든 이 점은 마찬가지다. 약간 어둡고 씁쓸하고 마음이 갑갑해지는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결국 결말이 그렇게 되어서 어쨌든 다행이라는 느낌. 내 취향 100%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누가 읽어 보겠다고 하면 괜찮다고 한마디 할 법한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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