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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케이트 가비노,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by Jaime Chung 202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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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케이트 가비노,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이 책은 우연히 알게 되어 제목에 끌려 보관함에 담아 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발견해서, 어차피 리디 북스에 캐시도 넉넉히 충전해 놨겠다, 한번 사서 읽어 보았다. 솔직히 다 읽은 지금도 그림체가 예쁘다거나 무척 잘 그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그래픽 노블이다.

대학 시절, 같은 소설 창작 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세 아시아계 여성인 시린, 실비아, 니나는 졸업 이후로도 같이 사는 룸메이트들이다. 니나가 제일 먼저 취업에 성공하고 그다음이 실비아였다. 친구 둘이 출근하고 나면 집에 혼자 남은 시린은 너무 그리워서 “벨을 잘못 누른 배달원에게 말을 거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린은 이 배달원에게 음식을 받아 아래층에 사는 베로니카 보라는 이름의 이웃에게 직접 전달해 준다. 베로니카는 92세 할머니인데 시린은 그날 하루 종일 그녀의 아파트에서 베로니카의 책꽂이를 구경하고 화분에 물을 줄 정도로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진다. 시린이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서 ‘책을 100만 부나 판 짱 멋진 할머니’를 만났다는 메시지를 전하니, 니나가 베로니카의 <폭동>이라는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있으며 그가 부커상 수상자였다고 답한다. 아니 정말로 우리 아파트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고?

 

생각해 보시라. 내 아파트 이웃이 부커상 수상자라면? 너무너무 설레고 두근거려서 어떻게 하면 그 이웃과 ‘이웃사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할 것 같다. 나는 좋은 글, 좋은 책,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를 할 때 늘 생각나는 구절이 있는데,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이 대략 ‘좋은 책을 쓴 작가가 친구여서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다(정확히는 이렇게 말했다. “What really knocks me out is a book that, when you're all done reading it, you wish the author that wrote it was a terrific friend of yours and you could call him up on the phone whenever you felt like it. That doesn't happen much.”). 내가 이런 걸 꿈꾼 작가가 한둘이 아닌데 아직까지 현실로 일어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 그래픽 노블에서는 부커상 수상자 작가가 이웃사촌까지 되다니 정말 너무너무 부럽다!

 

이 그래픽 노블 주인공 셋 다 책을 좋아해서(실비아는 글도 쓴다) 세 명 다 책과 편집 일을 하게 된다는 점은 좀 비현실적이었지만(애초에 원제가 <A Career in Books>다), 그렇기에 결국 이 셋이 커리어와 인맥을 이용해 베로니카의 소설을 재출간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시라. 내가 친구 둘이랑 같이 사는데 우리 셋 다 같은 업계에서 일한다면 서로의 고충을 잘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진짜 너무 좋겠다…

아시아계 여성 셋이 주인공인 것도 좋았다. 백인이나 남자 한 명쯤 끼지 않고 온전히 아시아계 여성 셋이 주인공? 이만큼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작품을 또 어디 가서 보겠느냐고요! 참고로 니나는 일본계, 시린과 실비아는 필리핀계이고, 베로니카는 베트남에서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왔다는 설정이다. 게다가 시린은 레즈비언이고, 한국인 캐릭터 이수와 썸씽도 있다! 소주라든지 찜질방처럼 한국이 종종 언급되기도. 이 정도로 다양한 배경 출신의 인물들이 등장하다니, 이 책을 다 읽은 내가 봐도 놀랍다.

 

나는 이북으로 봤기에 280쪽일 종이책과 달리, 한 컷 한 컷이 한 페이지여서 분량이 총 945쪽이나 됐다. 그건 괜찮은데 왜 <안나 카레니나>를 ‘안나 카레리나’라고 오타를 낸 건지 모르겠다. ‘카레닌’이라는 성을 가진 남편의 아내라서 ‘카레니나’인 건데 이게 이렇게 헷갈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대명작의 제목을 어떻게 틀리지? 심지어 원문에는 그냥 ‘Vronsky’라고만 쓰여 있는데 그걸 설명해 주려고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키’라고 썼다가 거기에서 틀린 거다. 하… 그리고 베로니카가 가게 되는 요양원은 ‘웰스프링’이라는 곳인데 처음에는 그냥 ‘스프링’이라고 했다가 두 번째에는 ‘월스프링’이라고 오타를 냈다. 그래픽 노블은 그림 자체가 PDF로 되어서 독자 입장에서는 밑줄도 못 긋고 메모도 못 남겨서 불편한데, 또 출판사 입장에서는 이렇게 실수가 생긴 곳은 아예 그림 파일 자체를 수정해야 해서 더 귀찮겠지… 애초에 책 만들 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봐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림체가 미형이거나 그림 솜씨가 뛰어나지는 않다. 인체나 표정이 어색한 부분도 보인다. 하지만 그건 잠시 흐린 눈 하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그래픽 노블이다. 어차피 그래픽 노블은 ‘그래픽’ 반, ‘노블’ 반 아닙니까. ‘노블’ 부분에 집중해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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