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모리미 토미히코, <셜록 홈스의 개선>

아마도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로 가장 잘 알려진 모리미 토미히코의 신작. 내가 대학생 때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고 이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최근 다시 찾아보니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는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고, 초판 출간 16년이 지나 <다다니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라는 공식 속편까지 나왔더라. 와, 세월의 흐름이 야속하여라…
어쨌거나, 이번 신작은 셜록 홈스 이야기다. 그냥 셜록 홈스 오마주라든가 팬픽션과 뭐가 다르냐고? 이 셜록 홈스는 빅토리아 시대 교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게 큰 차이다. 우리가 아는 큰 뼈대는 같다. 셜록 홈스라는 뛰어난 명탐정이 있고 그의 이야기를 글로 옮겨 사람들에게 전하는 든든한 조력자 존 왓슨, 존 왓슨이 껌뻑 죽는 아내 메리, 홈스가 세들어 사는 곳의 집주인인 허드슨 부인, 셜록 홈스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레스트레이드 경감, 그리고 홈스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여성 탐정 아이린 애들러. 저자들은 이 인물들을 빅토리아 시대의 도쿄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 오고(그래서 그 유명한 ‘런던, 베이커 가 221B번지’는 ‘데라마치 거리 221B번지’로 탈바꿈한다), 모리어티 교수에게 ‘사실 모든 범죄를 계획한 천재 지휘자’라는 설정 대신 ‘슬럼프에 빠져 은퇴한 응용물리학 교수’라는 설정을 주었다. 아, 맞다. 셜록 홈스 역시 슬럼프에 빠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내가 말했던가? 왓슨은 그가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그래서 제목이 <셜록 홈스의 개선>이다.
사실 이 ‘개선’이라는 키워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다르게 전개되는데, 그게 반전이자 이 책의 매력이다. 이건 진짜 끝까지 읽어야지 ‘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고 감탄하게 되는 거라서 여기에서 스포일러를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굉장히 메타적이면서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정도는 말해 두겠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야기 진행이 초반에 상당히 느리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거의 첫 두 장(章)은 ‘셜록 홈스가 슬럼프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 짧은 포인트 하나를 빙빙 돌려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다는 느낌을 준다. 아니, 셜록 홈스가 슬럼프인 건 알겠는데 그것 외에도 글의 전개를 위해 깔아야 할 포석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좀 더 자세히 하셔도 좋고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어도 되는데 진짜 1-2장 내내 ‘셜록 홈스 슬럼프’무새만 여러 가지 형태로(홈스 본인 입으로, 레스트레이드 경감 입으로, 왓슨과 메리 입으로 기타 등등) 돌림노래를 듣는 것 같다. 진짜 한두 번만 말해도 독자들은 알아듣는다고요… 왜 이렇게 앞부분을 지루하게 길게 질질 끌었는지 모르겠다. 후반부에 있는 반전은 진짜 기발하고 짜릿한데,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힘들다. 개인적으로 100쪽, 아니 50쪽만 줄었더라면 좀 더 타이트하고 긴장감 있고 좋았을 것 같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을 나누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프롤로그는 이렇다. ‘왓슨이 있기에 홈스가 있다.’ 여기에서부터 내가 좋아하던 모리미 토미히코의 재기발랄한 문체가 확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아닌 게 아니라 셜록 홈스는 천재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홈스 혼자만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무미건조해질 수 있는 사건 기록을 ‘피가 끓고 몸이 절로 들썩거리는 로맨스’로 꾸민 사람은 누구인가. 일부러 ‘무능한 조수’를 연기해 독자의 공감을 얻어온 사람은 누구인가. 편집자의 요구에 응해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책상에 들러붙어 있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나, 존 H. 왓슨이다.
‘왓슨이 있기에 홈스가 있다.’
자, 제군, 복창하라.
‘왓슨이 있기에 홈스가 있다.’
이 불멸의 진리를 제군이 가슴에 새겨 존 H. 왓슨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에 대해 합당한 경의를 표해준다면 내 소소한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다가 홈스와 왓슨은 추잡하게 싸웠다. 왓슨이 홈스에게 빈둥거리지 말고 사건을 조사하라고 했더니 홈스가 화를 냈기 때문이다. 금붕어에게 왓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진짜 왓슨을 대신하겠다니 정말 유치하네요…
나는 어둑어둑한 방을 가로질러 벽난로 앞에 놓인 긴 의자로 다가갔다.
셜록 홈스는 회색 가운을 입고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수염이 꺼칠하게 났고 눈은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어항에서는 투실투실하게 살찐 금붕어 ‘왓슨’이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물에 떠 있었다.
볼멘 얼굴의 담수어는 홈스가 가을 축제 때 야점에서 손에 넣었다. 지금으로부터 2주 전, 홈스는 내게 갖은 푸념을 늘어놓더니 “자네는 완전히 남의 일 대하듯 하는군”이라고 화를 내며 금붕어에게 ‘왓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새 파트너로 발탁하겠다고 말했다. 그 일이 발단이 되어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지자 허드슨 부인이 달려와 꽃병의 물을 끼얹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삼십 줄에 들어선 신사들이 할 짓이 아니었다.
셜록 홈스의 팬이라면 알겠지만 ‘그 여자’라는 표현은 홈스가 아이린 애들러에 대한 나름대로 존경과 애정을 담은 호칭이다. 그런데 이제 그걸 왓슨의 아내 메리가 홈스에 대해 쓴다는 것이, 그리고 그 표현에서 존경의 의미가 사그라든다는 게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것이다.
아내 메리는 셜록 홈스를 항상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녀의 홈스에 대한 심적 거리를 나타내는 표현인 셈인데, 그게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는 것뿐이라면 그런대로 대화의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메리에게 홈스라는 존재는 그런 우아한 수법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홈스 선생님’에서 ‘홈스 씨’ 그리고 ‘그 사람’으로 호칭이 바뀔 때마다 아내의 세계에서 홈스는 변모했다. 바야흐로 홈스는 ‘남편 동료’도 ‘남편 친구’도 아니었다. 남편이 독자에게 비난받는 것, 진료소 경영이 어려운 것,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 그 모든 일의 원인을 따지면 반드시 셜록 홈스라는 가증스러운 존재에 도달했다.
이제 메리에게 홈스는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세상 모든 문제를 낳는 제악의 근원, 악의 화신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앞부분이 다소 반복되고 질질 끄는 감이 있지만, 후반부에 가면 반전이 드러나면서 쫄깃해지니까 딱 거기까지만 버텨 보시기를…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감상/책 추천] 이수은, <평균의 마음> (1) | 2025.11.21 |
|---|---|
| [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탈출 전략> (0) | 2025.11.19 |
| [책 감상/책 추천] 이슬아, <아무튼, 노래> (2) | 2025.11.17 |
| [책 감상/책 추천] 산만언니,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1) | 2025.11.14 |
| [책 감상/책 추천] 양다솔,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0) | 2025.11.12 |
| [책 감상/책 추천] 야 지야시, <Transcendent Kingdom> (0) | 2025.11.10 |
| [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로그 프로토콜> (0) | 2025.11.07 |
| [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 (0) | 2025.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