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산만언니,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을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은 ‘세월호’ 사건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난 국가적 재난 사건이었다. 삼풍 백화점이라는 당시 꽤 고급이었던 백화점이 1995년 6월 29일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약 500명의 사망자와 9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붕괴 전에 이미 위험한 조짐이 발견되었고, 사건 당일에는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아 5층 식당가 영업이 전면 중지되었으나, 다른 층은 영업을 계속했고 결국 이 건물은 붕괴하고 만다.
‘산만언니’라는 필명의 저자는 이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의 생존자이다. 그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 딴지일보에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의 생존자가 말한다>를 써서 올렸고, 이를 계기로 <저는 삼풍의 생존자입니다>를 연재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글을 모아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재난의 규모나 영향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붙잡고 있느냐’며 이에 대한 담화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이토록 큰 국가적 참사에 대해 아직 사회적인 이해나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운데 말이다. 그러할진대 그보다 더 오래전 일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은 그보다 더 적은 관심을 받고 있는 듯하다. 아직까지도 그 피해자들이 어렵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느꼈지만, 나는 이런 큰 재난이 일어났을 때 생존자들의 일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사회가 참 이기적으로 변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자는 당시 삼풍 백화점에서 재수생의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친구와 손을 잡고 출구로 나가려고 했지만 어른들에게 치여서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서로의 손을 잡은 우리는 얼결에 사람들이 몰려가는 쪽으로 따라갔다. 좁은 출구로 몰려든 사람들이 서로 먼저 나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친구나 나나 그때는 어려서 사람들이 밀면 밀리고 가라면 가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출구를 코앞에 두고도 드센 어른들에게 한참을 치이다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날의 기억은 훗날 세월호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어째서 먼저 살겠다고 악다구니하며 그 배를 탈출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 나 역시 세월호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였는데, 그때 내 눈에도 사고 직후 먼저 나가겠다고 서로 드잡이하는 어른들의 행동이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아이들도 이때 나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이맘때 아이들은 오랜 세월 공교육을 통해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섣부르게 개인 행동하지 말고, 주변 어른들의 통제에 따르고, 질서를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교육받으니까.
비상 사태가 일어났을 때 노약자들 먼저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어른의 역할이라 자세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느껴진다지만 그래도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을 밀치고 나 먼저, 나 혼자 살겠다고 달려가면 좀 자괴감이 오지 않을까? 어른으로서 가진 책임과 권위는 다 어디에 두고 왔는가. 내가 위에 인용한 부분은 이 회고록의 극초반, 첫 번째 글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나는 이미 이 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못났다, 진짜. 어른이 되어서 그러고 싶나.
반면에 어른다운 어른, 인류애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저자가 붕괴 현장을 탈출한 이후 병원에 갔더니 사람들이 꽉 차서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더니 선뜻 그래 주셨다고.
꽉 막힌 도로를 이리저리 돌아 겨우겨우 도착한 강남성모병원은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이미 응급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응급실 앞 복도 맨바닥까지 피투성이인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걸을 수 있는 정도인 내 차례는 과다출혈로 죽은 다음에나 올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친구를 데리고 무작정 병원 외래동으로 가,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저희 좀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선뜻 알겠다 하더니 자기 차에 우리를 태웠다. 차는 아주 작았고 새 차였다. 아주머니는 초보 운전이었는지 10시 10분 방향으로 핸들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리고는, 눈에 띄게 손을 덜덜 떨면서 백미러로 내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학생, 괜찮아요? 정신 잃지 말아요. 병원에 곧 가요.”
그분이 내게 보여준 친절과 용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큰마음을 먹고 새로 뽑은 차의 시트에 생면부지 타인의 피로 범벅이 되었을 텐데, 그분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우리를 태워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놀랍다.
나도 이런 어른이 되어야지… 진짜 필요한 이들에게 선의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어른이!
여기에서 다 밝히지는 못하지만 저자에게는 이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 외에도 충격적인 일, 가족 내에 우환이 여러 번 있었고 그래서 저자의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다. 남들은 살면서 한번 겪기도 어려운 일을 여러 번 겪으셨으니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은 게 아니며 남도 각자 불행을 안고 산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저간의 사정을 듣고 보니,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여태 모르고 살던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는데, 바로 내가 어지간하면 타인의 불행을 우습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만 해도 오로지 내 상처만 들여다보고 사느라 몰랐는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이유도 저마다의 각기 다른 얼굴만큼 다양했다. 어떤 날에는 내가 하는 말들은 어린애 투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해서 이날 이후로 가급적 나는 남의 일에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저자의 말처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거든 차라리 침묵하자.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공감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의향이 있다면 마음을 열고 한번 들어 보자.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감상/책 추천] 양다솔,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0) | 2025.11.12 |
|---|---|
| [책 감상/책 추천] 야 지야시, <Transcendent Kingdom> (0) | 2025.11.10 |
| [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로그 프로토콜> (0) | 2025.11.07 |
| [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 (0) | 2025.11.05 |
| [월말 결산] 2025년 10월에 읽은 책들 (1) | 2025.10.31 |
| [책 감상/책 추천] 코니 윌리스, <로즈웰 가는 길> (0) | 2025.10.27 |
| [책 감상/책 추천]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0) | 2025.10.22 |
| [책 감상/책 추천]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1) | 2025.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