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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수은, <평균의 마음>

by Jaime Chung 2025.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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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수은, <평균의 마음>

 

 

무려 편집자로 22년간 일한 저자가 풀어내는 책 이야기. 아니 어떡하면 한 일을 22년이나 할 수 있죠…. 어떤 일이든 이만큼 오래 했으면 무언가 할 말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말을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이리라. 그래서 한번 읽어 보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는데 나 자신도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저 글에서,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그의 삶에 대한 일화들에서 마초적이라는 인상을 받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에서, ‘외로움의 문체 - 어니스트 헤밍웨이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꼭지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헤밍웨이의 어머니 그레이스는 자녀들을 엄격하게 훈육하는 통제적인 부모였는데, 그냥 통제형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루스는 음악 레슨을 해주는 제자 루스와 지나치게 가까웠고, “머지않아 헤밍웨이네 집에 아예 들어앉아 레슨을 받으면서 아이들의 보모와 가정부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헤밍웨이의 아버지 클래런스가 참다못해 ‘내 아이들이 있는 집에 루스는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하자 그레이스는 자기 돈으로(그는 음악 레슨으로 의사인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 집 맞은편에 루스가 기거할 별채를 지었다. “두 여자의 은신처”가 완성되자 부부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1928년 클래런스 헤밍웨이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레이스와 루스는 그 뒤로도 평생 우정을 이어갔으며, 헤밍웨이는 자기 아들들이 “양성애자 할머니”와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 심지어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센세이셔널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고요? 나도 불륜은 싫어하지만 이건 어딘가 모르게 통쾌하다. 왜냐하면 나는 헤밍웨이의 글에서 느껴지는 여성혐오적인 면모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남자 중의 남자’인 척하는 헤밍웨이도 결국 자기가 만족시킬 수 없는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나약한 남자였던 것이다.

그레이스가 일관되게 주장한 대로, 두 여자는 그저 진실한 “영혼의 단짝”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삼각관계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남성의 연적이 다른 남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의 남자다움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헤밍웨이 부자父子에게는 상처 그 이상, 남성성에 대한 모욕이었다. 헤밍웨이 소설에 나타나는 동성애 혐오는 이 가망 없는 삼각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남자답게 행동하고, 여자에 연연하지 않는, 오로지 남자로만 사는 남자가 된다. 여기에 더해, 충분한 경제력을 가진 자유로운 여성까지도 마음 내키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그의 승리감은 자아도취를 완성한다.

그의 단편소설집 제목인 <여자 없는 남자들>은 (헤밍웨이 입장에서는) ‘여자가 필요 없는 강인한 남자들’을 의도한 것이겠으나, 나에게는 그래서 ‘여자 없이 사는 구질구질하고 불쌍한 남자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자들은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고 비난하면서도 어쨌든 여자를 놓지 못하고 여자를 원하는 남자들처럼.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남자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여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남자라니. 그런 남자가 대단한 남자일 리가 없다.

 

재미있게도 헤밍웨이에 대한 꼭지 바로 다음이, 헤밍웨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피츠제럴드에 관한 것이다. 이름하여 ‘돈은 왜 쓰고 싶나 - 스콧 피츠제럴드 <리츠 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나는 문학, 특히 고전 문학을 읽을 때 문학 자체만 두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 저자의 삶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둔 적이 없다. 그래서 피츠제럴드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 기회에 알게 되었다(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나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의 관계 대해서는 책 한 권도 부족할 것이므로 그 얘기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 정도는 안다).

스콧의 어머니 몰리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딸로 장사로 돈을 모아 신흥계층에 안착한 “부끄러운” 출신 배경이 있었다. 반면, 아버지 에드워드는 생활용품 제조사인 프록터앤드갬블의 영업사원으로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지만, 피츠제럴드 가문은 미국 건국 초기 동부에 자리 잡은 명문가 중 하나로, 스콧에게 “자랑스러운” 성姓을 물려주었다. 스콧은 촌스럽지만 돈과 실권이 있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뼈대 있는 집안 출신으로 교양을 지녔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자신이 원래 왕족의 핏줄로 태어났지만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지금의 보잘것없는 양친의 집 앞에 버려졌다는 상상”을 하면서 부모에 대한 이중적 열등감을 달랬다. 이 정도만 해도 자아상에 대해 인지부조화를 겪기 충분한 조건인데, 스콧의 경우는 하나의 변수가 더 작용했다. 천사처럼 예쁘게 생긴 외아들을 “하느님이 보낸 선물처럼” 여겼던 몰리는 스콧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줄 준비가 된 채로 언제나 주위를 맴돌았다. 아들을 세인트폴의 상류사회에 들여보내기 위해 최고급 주택가 인근 연립주택에 월세로 살면서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시켰고, 아버지가 직장에서 해고되어 형편이 어려워졌음에도 동부의 명문 사립인 뉴먼스쿨에 보냈으며, 프린스턴대 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시카고 최고 부유층 자제이자 사교계 명사였던 지네브라 킹과 데이트하는 데 성공하게 했다.

 

다들 알다시피, 피츠제럴드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위대한 개츠비>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는 건지 이해를 못할 텐데, 그것은 첫 번째, 실제로 개츠비가 하는 짓이 전혀 위대하지 않기 때문이며, 두 번째, 제목이 살짝 오역이기 때문이다. ‘great’이라 함은 (아래 인용문에서도 설명하지만) 그냥 크다, 액수가 많다는 뜻이지 도덕적으로 좋다는 함의는 없다(같은 맥락에서 찰스 디킨스의 <Great Expectations>도 어떤 존경스러울 만한, ‘위대한 유산’이 아니라 ‘무지하게 많은 (어마어마한, 막대한) 유산’이라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몰리는 스콧이 무슨 짓을 해도 전부 다 귀여운 장난으로 여겨서 스콧을 완벽하게 ‘스포일드 차일드’로 만들었다. 잘난 척하거나 애교 부리는 것밖에는 사회적 관계 맺기의 기술이 없었던 “재수 없는 녀석” 스콧은 “열다섯 살 때까지는 다른 사람은 아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몰리와 스콧은 “턱없이 높은 사회적 야망”을 가진 모자였고, 한사코 부자들 속에 있고자 했다. 성장기 양육 환경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의 전형이라 할 만큼 스콧이 평생 시달린 문젯거리들 대부분은 부와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와 관련이 있었다.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부분은 이것이 미국적 환상의 에스프리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기회와 가능성에 대한 낙천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미국인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신념으로 문화나 전통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을 극복한다. 이는 오랫동안 세습봉건제에 시달렸으면서도 배금주의에는 비판적인 유교 문화권에서는 체득하기 힘든 감각이다. 한국인 독자 대다수가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라는 질문에 어떤 설명을 들어도 썩 와닿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위대하다’라는 형용사에는 모종의 도덕성이 담겨 있기에 어떤 대상에 이 수식어를 붙이려면 그에 준하는 탁월한 덕성이 요구된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인물이면 몰라도, 위대한 부자나 위대한 사기꾼은 가벼운 수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어의 ‘great’는 뭐든지 평균보다 많거나 크거나 좋으면 다 붙일 수 있다. great building위대한 빌딩, great dog위대한 개, The Great Wall위대한 장벽, 만리장성, great feeling위대한 기분 등등. great가 좋은 이유는 많기 때문이고, 부는 그중 가장 좋은 많음이다. 이 공식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보편적 사회적 가치로 체계화되었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책과 작가 이야기가 많은데 ‘현대인인 여성이 고전을 읽을 때 -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꼭지 덕분에 <미들마치>를 읽고 싶어졌다(그리고 이게 총 1,400쪽짜리 벽돌책임을 알게 되자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카프카의 <변신>, <심판>, <성>도 읽어야지, 언젠가는…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이야기하는 꼭지에 ‘옹졸해서 좋은 그 사람’이라는 제목을 단 게 재미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그리스 신화 속 그리스인들은 굴욕을 잊지 않고, 무릎 꿇지 않으며, 책략을 쓰는 승부에 반대하고 용서는 신의 몫이라 생각한다. 신은 제 마음에 드는 인간들을 편애하고, 인간은 자신의 필멸성을 받아들인다. 다 공감하는 점들이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저자와 달리 아킬레우스가 쪼잔한 밴댕이 소갈딱지 놈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남자답고 인간미를 가진 위대한 영웅은 헥토르 아니겠습니까. 헥토르 편 여기여기 붙어라(1/n).

 

대체로 고전이라 할 만한 작품을 다루고 있으므로 ‘뭐 고전 중에 재미있는 책 좀 없을까’ 싶을 때, 또는 고전에 관한 관심을 좀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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