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이슬아, <아무튼, 노래>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의 한 권. 이슬아 작가가 썼다. ‘가수도 아닌 이슬아 작가가 왠 ‘노래’에 관한 책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는 ‘노래방을 장악해보지도 않은 내가 왜 노래에 관한 책을 쓰는가’에 관해 이렇게 답했다.
노래방을 장악해보지도 않은 내가 왜 노래에 관한 책을 쓰는가. 생각해보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에 관한 글을 쓰지 않고 우사인 볼트가 육상에 관한 글을 쓰지 않고 우리 엄마 복희가 요리에 관한 글을 쓰지 않듯, 가왕들은 노래에 관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잘하는 것을 잘하느라 바쁘다. 작가들은 예외다. 작가들은 글에 대한 글을 토할 정도로 많이 쓴다. 심보선이 말하길 시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랬다. 그렇다면 나에게 글이란 한 네다섯 번째로 탁월한 내가 첫 번째로 탁월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다. 애매하게 탁월한 사람은 더 탁월한 사람을 구경하고 감탄하며 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가왕들은 마치 익숙한 차를 몰고 여러 번 지나본 길을 달리듯 노래한다. 아주 좁고 가파른 골목에서도 차로 벽을 긁는 실수따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차폭을 정확히 인지한 운전자처럼 두려움 없이 다음 소절로 힘차게 나아간다.
이슬아 작가의 글발은 언제나 뛰어나지만 이번 에세이는 더더욱 그러하다. 집안부터가 <아무튼, 노래>라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운명 지어진 것 같다. 이슬아 작가의 할아버지는 거실에 노래방 기계를 두고 있었고,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 구민회관 노래 교실에 다녔다.
삼대가 함께 모여 사는 그 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한우다. 한우가 삶은 북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세 병 이상 마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거실의 노래방 기계가 재생되었다. 취한 채로 집안의 여자들을 모두 호출하여 노래를 시키는 건 한우의 술버릇 중 하나였다. 할머니와 엄마와 작은엄마와 당숙모 등이 졸린 눈으로 거실에 나타나 번갈아 노래를 불렀다. 나는 북어 냄새를 맡으며 그들의 노래를 들었는데 그중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던 당숙모의 목소리는 가장 오래된 기억처럼 남아 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라고 당숙모는 노래했다.
그 노래를 듣자 뭔가가 아득하고 걱정스러웠다. 노래에 스민 불행의 함량을 느껴버린 탓이다. 분명 내일은 행복할 거라는데 왜 불안한 느낌인지. 사랑밖에 난 모른다는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건지. 농염한 색소폰 연주와 의미심장한 단조 멜로디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이러한 가정식 노래방에서 한우가 가장 좋아했던 건 그의 아내 향자의 노래다. 우리 할머니 향자는 이틀에 한 번씩 만취하는 남편을 지긋지긋해하며 중얼거렸다. “지랄.” 그러고는 〈천년 바위〉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녘 저편에 먼동이 트면 철새처럼 떠나리라
세상 어딘가 마음 줄 곳을 집시 되어 찾으리라
향자가 당장 다음 날 아침에 집을 나간대도 이상하지 않을 가사였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말이다. 그러나 향자는 한 번도 집을 떠나지 않았고 노래 교실에도 십 년 넘게 출석했다. 수영이든 요가든 한번 시작하면 십 년 넘게 다녔고 툭하면 술 취하는 남편과도 육십 년을 거뜬히 함께 살았다.
동요 <섬집 아기>는 슬프고, 쓸쓸하고, 어찌 보면 조금 오싹하기까지 한 노래다. 하지만 이 한우 씨의 노래방 기계로 말할 것 같으면, 배경 영상 선택 옵션이 ‘성인’으로 설정돼 있었던 덕분에, 어린아이 시절 이슬아 작가는 동요 <섬집 아기>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었다. 무슨 말이냐면, 아래 인용문을 읽어 보시라.
그 와중에 노래방 기계의 화면에서는 어느 해변가의 풍경이 재생되었다. 그동안 〈섬집 아기〉를 부르며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바닷가 마을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수영복 입은 여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금발 머리를 풀어헤친 서양 모델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우리 할아버지 한우의 선택이었다. 당시 반주 기계의 배경 영상 선택 옵션으로는 ‘기본’도 있고 ‘자연’도 있었으나 한우는 굳이 ‘성인’을 골랐다. 노래가 시작될 때마다 수영복을 입은 여자들이 끊임없이 걸어 나왔다. 성인이란 저런 것이구나. 팔다리가 긴 여자. 치렁치렁한 머리를 이리저리 쓸어 넘기는 여자. 비키니가 잘 어울리는 여자….
성인에 관한 최초의 그릇된 이미지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섬집 아기〉를 불렀다. 그것이 자동차 부품 상가에 자리한 ‘양면테이프집 아기’인 나의 운명이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는데 화면에서는 산호색 팬티를 입은 여자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는데 검정색 원피스를 입은 또 다른 여자가 모래사장에서 태닝을 했다.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오는데 때마침 새로운 여자가 티팬티를 입고 해변을 달렸다. 저런 모습으로 아기에게 달려가는 여자라니 경쾌하기만 했다. 더 이상 〈섬집 아기〉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이슬아 작가가 지인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사람으로 섭외된 일에 대한 꼭지도 기가 막히게 웃기다. 일단 이렇게 시작한다.
자신 있는 일과 자신 없는 일 중에서 자신 있는 일만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나지만 돈을 많이 주면 자신 없는 일도 기꺼이 한다. 남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일도 그중 하나다. 나는 음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축가 부르는 사람으로 섭외될 만큼 노래 실력이 대단하지는 않다. 축가 부르기란 결코 자진하지 않을 종류의 일이다. 그러나 페이가 클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액수를 보는 순간 그 일을 감당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없던 자신감이 불쑥 솟아오른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만큼의 예산을 책정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내 노래가 그만큼 좋으시다는 거지. 그렇게 일을 덥석 수락하며 말한다. “큰 만족 드리겠습니다.” 나는 돈과 함께 용감한 사람이 된다.
마침내 축가를 불러야 할 순간이 오자 이슬아 작가는 깨닫는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신랑 신부도 모르고, 결혼식이 뭔지도 모르고, 결혼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고…
새삼스럽지만 나는 오늘의 신랑 신부도 잘 몰랐고 결혼식이 뭔지도 몰랐고 결혼이 뭔지는 더욱더 몰랐다. 어디 가서 축가를 불러본 적도 없었고 직접 녹음한 반주도 실은 엉성했고 노래 제목은 하필 〈사랑밖엔 난 몰라〉인데 사랑이라도 알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사실은 사랑마저 잘 몰랐다. 이 자리에 섭외되기에는 내가 너무 덜 살았으며 그러므로 축가 수락은 여러모로 부적절했다는 판단이 설 무렵 점잖은 사회자의 준엄한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이어질 순서는 축가입니다. 축가를 불러주실 분은 ‘일간 이슬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계신 이슬아 작가님이십니다.”
그 순간 ‘일간 이슬아’가 부끄러웠다. 이슬아도 부끄럽고 부끄러운 이슬아를 무려 일간으로 발행한다는 것도 부끄럽고 신랑 신부와 하등 상관 없는 나의 프로젝트가 이 결혼식에서 잠시나마 언급된다는 것도 송구스러웠지만 나는 돈을 받은 프로이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고 무대에 섰다. 과거의 무대들이 힘을 모아 허리를 펴주었다. 살면서 서본 누추한 무대, 커다란 무대, 실수한 무대, 알몸이었던 무대, 누워 있었던 무대, 입을 꾹 다물었던 무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던 무대가 알게 모르게 내 뒤를 지탱하고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신랑과 신부. 그들 뒤를 빼곡히 채운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 그것은 거대한 역사처럼 다가왔다.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아름답고 복잡할 그 모든 사회적 경제적 혈연적 관계들을 향해 첫 소절을 시작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이게 얼마나 심하게 낭만적인 노래인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떤 노래는 중대한 자리에서 불러야만 가사를 실감하기도 한다. 애절한 노랫말과 뽕끼 섞인 멜로디와 나의 젊은 목소리가 식장에 울려 퍼졌다.
<아무튼> 시리즈가 원래 그렇듯이, 이 책은 (종이책 기준) 144쪽밖에 안 된다. 그래서 이 정도 보여 드렸으면 충분히 많이 보여 드린 듯. 이미 보여 드린 것처럼 엄청 재미있으니까, 부담 없이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한 분들에게 좋을 것 같다. 노래를 잘하든 안 하든 노래를 좋아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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