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데이나 슈워츠, <당신의 불행을 선택하세요>

이 책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한 여성의 인생을 따라가는 게임북? 심리 테스트 비슷한 ‘당신이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라면, 어떤 직업이 어울릴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해 자신이 선택한 선택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유형의 에세이/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것은 저자의 진짜 인생일 것이고, 어떤 것은 창작일 것인데 뭐가 뭐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게임북 같은 형태를 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제의식은 놀랍도록 선명하다. 저자 데이나 슈워츠는 작가로서의 재능도 있고 페미니스트인 여성이지만 자신이 너무 통통하다고 생각하고 섭식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다. 또한 유부남을 만나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빠져든다. 상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없는, 그저 육체적 관계에만 관심 있는 남자에게 매달려 어떻게든 자신이 뉴욕에서 어쨌든 남자 친구를 둔, 성공한 여성임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란 젊은 여성으로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몸, 연애, 섹스… 커리어는 이에 비하면 차라리 쉬운 편이다.
앞에서 어떤 것이 저자의 진짜 인생이고 어떤 것이 창작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때가 있다고 했는데, 어떤 것들은 저자의 이야기임이 꽤 명확하다. 저자가 실제로 운영한 ‘예술대학원의그남자(GuyInYourMFA)’ 트윗 계정에 얽힌 뒷이야기가 그러하다. 저자는 워크숍 수업을 위해 같은 반 학생들이 쓴 단편을 읽어 가야 했는데, 그중에서 남학생들이 쓴 흔해 빠진 이야기에 넌덜머리가 난다.
세 편 모두 수업을 같이 듣는 남학생들이 쓴 것이다. 칼라에 구멍 난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몰스킨 노트에 필기하며 여학생이 제인 오스틴을 언급하면 눈알을 굴리는, 그런 부류의 남자들이다. 그들은 ‘록’(존 록펠러가 그의 이름을 딴 브라운대학 중앙도서관을 ‘존’ 대신 ‘록’이라고 부른다는 것에 언짢아했다는 일화는 학교 투어에서 늘 언급되는 이야기다) 밖에서 담배를 피운다. 마치 삼각형의 빗변처럼 언제나 그 도서관 바깥 계단에 기댄 채, 한쪽 발은 벽을 받치고 서 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허세 가득한데, 더 큰 문제는 지루하다는 점이다. 당신은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국가가 자기에게 빚진 게 뭔지 알고 싶어 하는 외로운 백인 남성이 궁금하지 않다. 여성과 섹스한 뒤에 그 여자(섹스한 다음 여성은 ‘그 여자’가 되곤 한다)가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개탄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허접한 글은 꼭 샐린저나 헤밍웨이, 존 업다이크나 존 치버의 설정을 가져와 “나도!(Me too!)”라고 외치며 동굴로 쏙 들어가 숨어버린다. 죄다 주인공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내일 다섯 명의 남학생 중 누군가는 와비 파커의 렌즈 뒤에서 눈알을 굴리고, 콧등을 만지며 “화자에게 보편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해명할 게 분명하다. 자기는 《율리시스》 를 이해했으니, 이 중 누구보다 낫다고 확신하면서. 하지만 당신은 안다. 그 글은 별로고, 괜찮아 보이기 위해 그럴싸한 장식 뒤로 숨었다는 걸.
“불평불만 많고, 허세로 가득하고, 고의로 사람들의 말을 곡해하고, 자기가 교수보다 똑똑하다고 굳게 믿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읽지 않는 고집스러운 글들만 써내는 부류”, 그게 바로 ‘예술대학원의그남자’들이다. 저자는 이들을 꼬집는 트윗 계정을 만들어 “미친듯이 게시물을 작성해, 자정이 되기 전에 24개의 트윗을 올린다.” 사람들은 그 트윗을 리트윗하고, ‘좋아요’를 누른다. 그는 순식간에 트위터에서 유명 인사가 된다.
저자가 자신이 겪었던 섭식장애를 담담히 털어놓는 장면도 그러하다. 이 게임북은 흔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너무나 명확하게도 구체적인 개인, 즉 저자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섭식장애로 인한 우울증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미녀와 야수> 속 마녀에 대한 비판도 물론 정당하지만, 우울증이 인간성까지 앗아가 버린다는 것도 너무너무 맞는 말이다.
어릴 때 보고 또 봤던 애니메이션 영화 〈미녀와 야수〉를 기억하는가? 거지인 척했던 마녀는 자기를 거절한 야수뿐 아니라 야수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벌줬다. 물론 야수가 야수로 변한 건 딱한 일이지만, 최소한 그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그의 하인들은 시계나 의자, 식기류로 변했는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공정치 못하다.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야수(그에게 이름이 있기는 했나 모르겠다)는 약간 털이 덥수룩하고 몸집이 커졌을 뿐 옷도 입고 식탁에서 식사하면서 인간과 같은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잘못도 없는 하인들은 계단을 오르는 일조차 낑낑대야 한다. 그들은 집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연대하지 않으며 가구며 집기로 변해서도 여전히 하인으로 지내면서 자기들을 이 꼴로 만들고선 돌이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주인을 위해 충성한다. 그냥 떠나면 되잖아! 당신은 스크린에 대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왜 그놈한테 밥을 차려주는 거야?? 이제 나무와 쇳조각일 뿐인데, 왜 인간일 때 하던 업무를 계속하는 거냐고.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어쨌든, 이게 바로 우울증이라는 거다. 어떤 이유로 당신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고, 완벽히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듯 보이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자신들처럼 직업을 갖고 사랑에 빠지고 시험에 통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지금 테이블이란 말이야!” 당신은 소리 지르고 싶다. “테이블이라서, 지금 난 도저히 생물학 시험공부를 하러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고. 그건 테이블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내가 내향적이고, 붙임성이랄지 사교성이랄지 하는 게 뛰어나지 못해서 그런가, 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누가 알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매뉴얼 같은 게 있었으면 그걸 읽고 이 인생이라는 모험을 헤쳐나갈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저자의 아래 인용문에 너무너무 공감했다.
당신의 낮은 신분은 당신의 외모나 옷차림 때문이 아니다. 눈썰미 있는 엄마는 그 동네에서 그해 유행하는 스타일을 정확히 파악해 세 딸에게 입히곤 했다. 그보다는 어떤 행동 방식 때문에 인기가 없는 게 분명하다는 게 당신의 결론이었다. 만약 그 가설이 맞는다면, 당신이 행동 방식을 바꿀 경우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말을 한다면 인기가 생기리라는 가설 또한 성립한다. 인식의 근원을 이루는 이상한 판타지로 다시 돌아오자. 당신은 복권에 당첨되거나 공주나 팝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이 없다. 당신은 자신을 감시하는 장비들을 상상한다. 그 장비에는 아주 작은 카메라와 아주 작은 마이크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주 인기가 많은 사람들이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군용 벙커로 설계된 곳에 모여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당신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어폰을 통해 그들의 지시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게, 어떤 아이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건 ‘최고로’ 인기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인기 있는 그룹 내에 자연스럽게 낄 수 있는 정도의 인기다.
몇 년 뒤에 이 판타지가 다시 떠오르는데, 잘 봐줘야 서열 구조에서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당신의 쭈글쭈글한 모습을 아무도 모르는 캠프에서의 첫날, 당신은 정확히 원하던 상황에 놓인다. 막 열한 살이 된 아이들 사이에서 당신은 작은 카메라도 마이크도 없이 스스로가 자신의 컨설턴트가 되어 무슨 말을 할지 미리 계획하고, 신중한 검토 과정을 거쳐 인기 있는 아이가 할 만한 말만을 하기로 한다.
게임북 형태라는 신선한 콘셉트로 된 에세이라 즐겁게 읽었다. 단 하나 흠을 찾자면, 다들 아시겠지만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 역 배우는 (이 책에서 잘못 쓴 것처럼) ‘캠 패트롤’이 아니라 ‘킴 캐트럴’이다. 이건 어쩌다 오타가 났을까… 어쨌거나 이것 빼고는 전체적으로 번역도 괜찮다. 한 젊은 여성의 성장담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읽어 보시라.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월말 결산] 2025년 11월에 읽은 책들 (1) | 2025.11.28 |
|---|---|
| [책 감상/책 추천] 모리미 토미히코, <셜록 홈스의 개선> (1) | 2025.11.24 |
| [책 감상/책 추천] 이수은, <평균의 마음> (1) | 2025.11.21 |
| [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탈출 전략> (0) | 2025.11.19 |
| [책 감상/책 추천] 이슬아, <아무튼, 노래> (2) | 2025.11.17 |
| [책 감상/책 추천] 산만언니,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1) | 2025.11.14 |
| [책 감상/책 추천] 양다솔,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0) | 2025.11.12 |
| [책 감상/책 추천] 야 지야시, <Transcendent Kingdom> (0) | 2025.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