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스티븐 킹, <돌로레스 클레이본>

캐시 베이츠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Dolores Claiborne(돌로레스 클레이본)>(1995))의 원작이 된 스티븐 킹의 장편 소설.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메인 주 리틀톨이라고 하는 작은 동네에 사는 주인공 여인 이름이다. 소설은 그녀가 자기가 일하던 부잣집 마나님 베라 도너번을 죽이지 않았다며, 세 사람(경찰관 앤디와 프랭크, 속기사 낸시) 앞에서 진술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돌로레스가 이 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자가 글을 얼마나 솜씨 좋게 잘 갈고닦았는지, 중간에 장(章)을 나누지도 않고 본문의 95%를 돌로레스가 다 이끌고 가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흥미진진하다.
돌로레스는 아예 시작할 때 자신은 이야기를 ‘중간’에서부터 시작해 앞뒤 모두 나아갈 거라고 선언한다. 사실 이야기의 가운데부터 시작하는 것(라틴어로 ‘in medias res’)은 그리스로마 신화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서양의 글쓰기 전통이다.
자네, 그거 아나? 난 중간을 택할 거야. 얘기를 앞에서부터 하거나 뒤에서부터 하는 대신에 중간에서 시작해 양쪽으로 나아갈 거라고. 그게 맘에 안 들면, 앤디 비셋, 자네가 빌어먹을 놈이라고 욕하는 놈들 명단에 그 얘기를 적어서 목사님한테 보내.
그리고 정말로 이야기의 중간, 그러니까 돌로레스가 어떻게 부잣집 마나님 베라 도너번네 집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그녀의 성질머리가 어땠고 거기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로 시작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털어놓는다. 이게 진짜 감탄스러운 게, 이야기가 여기에서 저기로, 예컨대 베라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딸 셀리나로 옮겨간다든지 다시 자기 아들 조 주니어, 피트 등으로 넘어가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감쪽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물 흐르듯 잘 이어지게 만들려고 작가가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또한 돌로레스는 초반부터 자기가 남편 조를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베라 얘기를 하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가는지, 그것도 감상 포인트.
그래. 이제 좀 낫군. 아가씨는 케네벙크에서 온 낸시 배니스터라고? 난 바로 여기 리틀톨 섬 출신인 돌로레스 클레이본이우. 내가 아까 시골 장에서 수다 떠는 것처럼 얘기를 많이 할 거라고 했지? 그게 조금도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아가씨도 알게 될 거유. 그러니까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거나 말이 너무 빠르면 그렇다고 말을 해요. 내 앞에서 수줍어할 필요는 없우. 아가씨가 내 말을 죄다 적어 주었으면 하니까. 지금 하는 얘기부터 말이유. 29년 전, 지금 여기 있는 비셋 서장이 초등학교 1학년 코흘리개일 때, 난 내 남편 조 세인트 조지를 죽였우.
어째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날 미워하는 것 같은데, 앤디. 그 망할 놈의 올가미에 날 잡아 넣었으니 그만 가 봐도 되잖아. 어쨌든 자네가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구먼. 내가 조를 죽였다는 건 자네도 알잖아. 리틀톨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 건너편의 존스포트 사람들 중에도 그걸 아는 사람이 절반은 될걸. 아무도 그걸 증명하지 못했을 뿐이지. 저 멍청한 베라 여편네만 아니면, 그 여편네가 항상 하던 대로 고약한 장난만 치지 않았어도, 내가 여기 와서 프랭크 프루와 케네벙크에서 온 낸시 배니스터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사실 이것도 돌로레스와 베라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데, 둘이 레즈비언 불륜 관계였다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니 안심하시라. 그보다는 ‘좋은 여자’들이 ‘나쁜 년’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둘 다 처해 보았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매애라고 보는 게 맞겠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면서 소설을 추천하려니 어렵지만, 이 소설은 괜히 스티븐 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게 아니다. 공포, 스릴러뿐 아니라 드라마, 심리극, 여성의 이야기도 깊고 섬세하게 잘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 작품으로 보여 주었다. 가부장제와 가정 폭력에 억압당한 여성의 삶을 이렇게 잘 보여 주다니. 딱 한 군데, “[조는] 술을 마시면 속에 숨어 있던 여자 같은 본성이 밖으로 나오는데, 그게 항상 월경이 터지기 이틀 전의 여자 같았다니까.” 이거 말고는 딱히 남자 작가가 썼다고 느낄 만한 부분이 없었다. 뭐, 돌로레스가 엄청 여성주의적인 이론을 배워서 여성주의자가 된 게 아니라 살면서 여성주의적인 사상을 몸으로 체득한 거라 완전히 페미니즘적인 지식을 다 알고 있는 게 아니기에 이런 말도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말은 안 하겠지만, 모든 인물이 완벽한, 흠집 하나 없는 페미니즘의 전사여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이해한다면 크게 영향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듯. 이거 하나 때문에 못 읽을 작품 아니니까 진짜 제발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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