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스티븐 킹, <피가 흐르는 곳에>

국내엔 2021년에 출간된 스티븐 킹의 중편 소설집. 내가 이전에 리뷰를 쓴 영화 두 편, 그러니까 <The Life of Chuck(척의 일생)>(2025)과 <Mr. Harrigan’s Phone(해리건 씨의 전화기)>(2022)가 여기에 실린 동명의 중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이 외에 표제작인 <피가 흐르는 곳에>와 <쥐>라는 작품까지 총 네 편이 실렸다.
영화로 만들어진 두 작품은 이미 영화 리뷰에서 원작 이야기도 많이 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줄거리 소개 정도만 하고 넘어가겠다(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한 영화 리뷰를 참고하시라).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은퇴한 부자 해리건 씨네 댁에서 책 읽어 주는 소일거리 아르바이트를 하던 소년 크레이그의 이야기이다. 그는 해리건 씨가 죽고 난 후 그가 쓰던 아이폰에 전화를 건다. 그의 전화(정확히는 그의 음성 사서함에 남기는 메시지)는 이상하게도 응답받는 듯한데… 문제는 그 응답이, 크레이그를 괴롭히는, 또는 그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공포물이지만 엄청 무섭거나 잔인하지는 않다. 원작 소설을 읽는다면 영화까지는 볼 필요 없다. 영화가 너무 그냥 그래서…
<척의 일생>은 3막으로 되어 있는데 3막에서 시작해 2막, 1막 순으로 진행된다. 포문을 여는 3막은 혹시 아포칼립스물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지구 종말이 가까워진 듯 열악한 상황(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 재해)을 보여 준다. 마티는 고등학교 교사인데 그와 상담을 하는 학부모들조차 자녀들의 발달 또는 학습 상황보다 지구가 망하느냐 아니냐에 더욱 관심을 가진 듯하다. 그는 집으로 가던 중,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이라는 광고판을 보게 된다. 이 광고판은 마티가 가는 곳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심지어 3막 마지막에는 어둠이 깔린 저녁, 집 창문들에까지 이 ‘척’이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무슨 일일까? 참고로 이건 의외로 감동물이다. 이건 영화까지 보면 좋다. 영화를 잘 만들어서 볼 만할 가치가 있다.
<피가 흐르는 곳에>라는 제목은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라는, 기자들 사이에서 통하는 경구에서 유래했다. 탐정 사무소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는 홀리 기브니는 한 중학교에 폭발물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는데, 그 뉴스를 보도하는 현장 기자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낀다. 이것은 ‘이방인’? 나는 이걸 다 읽고 나서야 알았는데, 이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스티븐 킹의 장편 소설 <아웃사이더>에서 다루어진 소재고, 홀리 기브니는 이미 빌 호지스 3부작이라 불리는 <엔드 오브 왓치>, <미스터 메르세데스>, 그리고 <파인더스 키퍼스>에 이미 등장했더랬다. 이 이후에 스티븐 킹은 <홀리>라는, 홀리 기브니를 아예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 소설도 냈다(국내에는 2024년 8월에 출간). 아… 나는 스티븐 킹 소설을 그렇게 열심히 시리즈로 주루룩 읽은 게 아니라서 몰랐다. 하지만 홀리의 이야기를 읽을 의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피가 흐르는 곳에>는 이 중편 소설집에서 제일 살 떨리게 무서운 공포 소설이었다. 내내 홀리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면서 읽을 정도로.
“하지만 있잖아요, 내부의 악과 외부의 악의 핵심은 이거예요, 홀리. 내가 보기에는 차이가 없다는 거. 홀리가 보기에는 있어요?”
그녀는 그녀가 아는 모든 것과, 이 청년과 빌과 랠프 앤더슨과 겪은 모든 일을 곰곰이 생각한다. “아니.” 그녀는 말한다. “없어.”
“내가 보기에 그건 새예요.” 제롬은 말한다. “꾀죄죄하고 희끗희끗한 회색으로 뒤덮인 커다란 새. 그 새는 여기저기로, 온 사방으로 날아다녀요. 브래디 하츠필드의 머릿속으로도 들어갔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를 난사한 그 남자의 머릿속으로도 들어갔다가.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1999년 콜로라도주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13명을 살해하고 동반 자살한 2인조—옮긴이) 안에도 그 새가 있었어요. 히틀러. 폴 포트(킬링필드로 상징되는 대량 학살을 지시한 캄보디아의 독재자—옮긴이). 녀석은 그들의 머릿속으로 날아 들어가고 살인이 자행되면 다시 다른 데로 날아가요. 나는 그 새를 잡고 싶어요.” 그는 주먹을 쥐고 그녀를 쳐다보는데 그렇다, 눈물이 맞는다. “그걸 잡아서 빌어먹을 모가지를 비틀고 싶어요.”
아, 그리고 홀리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도 작가가 정말 생생하게 잘 썼다. 아니, 모녀 관계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죠, 킹 선생님? 홀리 어머니 진짜 너무 숨막혀…
“사랑해요, 엄마.” 홀리는 전화를 끊는다.
진심일까? 그렇다. 사라진 것은 좋아하는 마음이고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사랑은 양쪽에 족쇄가 달린 쇠사슬과도 같다. 그녀가 그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족쇄를 잘라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특히 어머니가 도널드 트럼프(으웩)에게 투표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이후부터 앨리 윈터스와 그 가능성에 대해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그래볼까? 지금은 안 되고 어쩌면 영영 못 할 수도 있다. 샬럿 기브니는 홀리의 어린 시절 내내 (끈질기게, 심지어 어쩌면 좋은 뜻에서) 그녀는 생각이 없고 대책도 없고 운도 없고 조심성도 없는 아이라고 가르쳤다. 남들보다 열등한 아이라고 가르쳤다. 홀리는 내내 그런 줄 알고 살다가 빌 호지스를 만났다. 그는 그녀가 남들보다 훌륭하다고 여겼다. 이제 그녀에게는 나름의 인생이 생겼고 행복할 때가 많다. 만약 어머니와 절연한다면 그녀가 전보다 못한 인물이 될 것이다.
마지막 중편소설 <쥐>는 여태까지 단편 소설만 쓰다가 살면서 처음으로 장편 소설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한 작가 겸 교수 드류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 작품을 집필하는 데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서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적한 시골로 떠난다. 그곳은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살던 통나무집. 그는 혼신을 다해 글을 쓰지만, 기상은 악화되고 갑작스레 닥친 태풍으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게다가 감기까지 걸려서 몽롱한 상태인데 거기에서 만난 쥐 한 마리가 그에게 파우스트 같은 제안을 해 온다. 당신이라면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도 엄청 무섭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사람을 압박하는 심리적 스릴러라 할 수 있겠다.
“어렴풋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3년 전이라면 그가 『언덕 위의 마을』에 빠져 있었을 때였다. 아니, 빠져 있었다기보다 발목이 잡혀 있었을 때였다. 손발이 묶이고 재갈까지 물고 있었을 때였다. 말 그대로 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 상태였을 때였다.
이 부분은 그냥 뜬금없이 웃겨서 ㅋㅋㅋ <언덕 위의 마을>은 극 중 작가인 드류가 예전에 쓴 소설인데, 이걸 쓰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한 게 너무 웃겼다.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는 어쩜 이렇게 쉼 없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명성을 유지할 만한) 퀄리티를 유지하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참고로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것(It)>은 이미 1986년에 출간됐고, 2017년과 2019년에 개봉한 (빌 스카스카드가 페니와이즈로 열연한) 영화들보다 먼저 1990년에 TV 시리즈로 만들어졌다(위키페디아 페이지). 나는 이런 사실에서 스티븐 킹의 기나긴 경력을 새삼 실감한다. 이렇게 진짜 오랫동안 글을 썼는데 어떻게 퀄리티는 웬만큼 유지되고 또 어떤 것들은 아주 대박이 나지? 그저 부럽습니다, 킹 선생님… 하지만 이 킹 선생님의 최고로 놀라운 점은 이렇게 오랫동안 작가 활동을 해 왔는데도 불명예스러운 추문이 없다는 것이다. 보고 있냐, 닐 게이먼 외 추악한 작자들아?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작가 본인이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덕이 아닐까… 여튼 존경합니다, 킹 선생님. <피가 흐르는 곳에> 중편 소설집을 읽고 나니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의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되어 곧바로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기 시작했다. 여자 캐릭터도 잘 쓰시는 킹 선생님의 만수무강하세요… 어쨌거나 이 중편 소설집은 아주 알차니까 한번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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