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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비앙카 보스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by Jaime Chung 2026.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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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비앙카 보스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현대 미술은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면? 소위 ‘미술계’가 일반 대중의 진입을 막고 있는 거라면? 합리적인 의심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도대체가 현대 미술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한 저널리스트가 미술계에 ‘그래서 도대체 미술이란 게 뭔데?’라며 말 그대로 몸을 던졌다. 그는 미술을 이해해 보려고 (우리 대신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일단 미술사에 관한 책 읽기부터 시작해서 브루클린에 있는 한 갤러리에 말단 직원으로 일해 보기도 하고, 아트 페어에서 미술 작품을 팔기도 한다. 전시회의 큐레이터도 하고 실제 ‘미술가’의 작업실 조수로 일해 보기도 하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경비원 일을 하며 하루 종일 미술 작품을 접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그놈의 미술이 뭔지 알기 위해 이보다 더 노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 그런 그가 발견한 미술이란 무엇인가?

 

일단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자. 미술계는 외부인(특히 일반 대중)에게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배척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미술이란 오직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에, 많은 이들의 이해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타인을 배척하는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내며 또한 드러내기도 하는 요소는 단연코 언어다. 예술인들의 언어는 남다르다. 마치 그들은 남들에게 이해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일부러 어렵게, 특이하게 말한다.

미술을 잘 아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화법은 프랑스 지식인처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글은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심하게 난도질당했는데 미국의 미술 비평가들이 그렇게 짓이겨진 번역문을 본보기로 삼아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참고할 만한 미술 용어집을 찾다가 미술계 언어―‘인터내셔널 미술 영어’라고 한다―의 기원과 영향력을 추적한 연구를 발견했다. 사회학자인 알릭스 룰Alix Rule과 미술가인 데이비드 레빈David Levine은 13년 동안 미술계에 유통된 수천 건의 보도 자료를 분석한 뒤 미술계 언어가 〈옥토버October〉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1976년 뉴욕의 이름난 미술 비평가들이 모여 창간한 이 잡지는 들뢰즈, 데리다, 바르트를 위시한 프랑스의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에세이를 출판함으로써 미술 비평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옥토버>의 필진은 그들의 에세이를 번역했을 뿐 아니라 본인들의 글도 발표했는데 여기엔 앞의 번역물을 모방한 냄새가 풀풀 났다. 이들은 프랑스어권 지식인들의 특이한 어법, 가령 ‘실재적인 것’, ‘정치적인 것’ 등 심오해 보이는 추상적인 어구를 수입했는가 하면 프랑스어에 발달한 접미사 ‘-ite’를 ‘-ity’로 흉내 내 ‘임계성criticality’, ‘지표성indexicality’ 같은 이해 불가능한 명사를 남발했다. 그 결과 “우편 정치, 제국적 인프라, 잡지 외교의 분야에 나타나는 주권의 열망, 변명, 남용으로부터 지표성과 성상성의 힘이 소환된다” 같은 희대의 난문장이 탄생했던 것이다. 나는 315에 오기 전에 갤러리를 드나들 때부터, 이 업계 사람들이 마치 사전에 갇혔고 그것을 씹어 먹어야만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운명에 처한 양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어 한 큐레이터와 함께 어떤 퍼포먼스 작품이 별로였다고 공감대를 형성했을 때, 나는 그 작품이 ‘지루했다’고 말한 반면 상대는 ‘장시간적’이라고 표현했다. 인터내셔널 미술 영어의 목적은 아마도 소통이 아닐 테다(룰과 레빈의 연구에서 찾은 단적인 예를 들면, 미술계 보도 자료에서는 ‘공간적’과 ‘비공간적’이라는 단어가 유의어로 쓰인다). 인터내셔널 미술 영어의 더 중요한 목적은 과시다. 이 언어는 “미술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배제적인” 암호라고 룰과 레빈은 말한다.

 

많은 일반 대중이 현대 미술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난해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품의 ‘의미’가 형태나 기술에 앞선다. 현대 이전의 미술은 의미는 모르더라도(다시 말해, 명화 속 요소들이 상징하는 바를 모르더라도), 감상자가 그 형태나 기술 자체에서 아름다움 또는 뛰어남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이라면, 그 붓질이 얼마나 섬세한지, 색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는 (입체 조각 작품이라면) 얼마나 정말 살아 있는 존재처럼 잘 깎았는지 등을 보고 감탄할 수가 있었다. 반면에 현대 미술은 ‘테크닉’에 예전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래의 인용문에도 등장하지만, 대량 생산된 기성 제품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면(또는 보는 관점에 따라, ‘의미’를 덧입힐 수 있다면) 그것은 미술이 된다.

잭은 작품에서 가장 섬세한 특징까지 예리하게 파악할 줄 알았지만(예를 들어 그가 조지프스는 스마트폰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 색채를 사용한다고 분석하면 나는 조지프스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알고 보니 미술계에서 테크닉의 위상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역사적 변화를 거쳐 왔다. 예일대를 비롯한 전 세계 미술 교육 기관의 원형이 된 학교가 1593년 이탈리아 로마에 설립된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Accademia di San Luca다. 이곳 학생들은 4년 내내 작품 제작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했다. 1학년 때는 기존 미술가의 인체 드로잉을 모사했고 2학년 때는 3차원 모델(인간, 시체, 석고상)을 앞에 두고 인체 드로잉을 모사했으며 3학년 때는 유명한 미술가의 회화 작품을 모사했고 4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400년이 지난 현재, 예일 대학교 미술 대학원에는 암호화폐와 젠더 변증법을 가르치는 수업은 있어도 드로잉 수업은 없다. 또 다른 대학원의 행정관도 드로잉이 “비참할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르셸 뒤샹Marcel Duchamp이 나타났다. 뒤샹은 마치 모두가 그의 이름을 언급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는 1917년 남성용 소변기를 가져다 뉘여놓고 그것이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조각이라고 선언해 사람들을 경악게 했다(그는 이처럼 기성 사물로 제작한 미술에 ‘레디메이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외에도 뒤샹은 〈병걸이Bottlerack〉(말 그대로 병을 거는 도구)와 〈부러진 팔 앞에In Advance of the Broken Arm〉(유머 감각을 가미한 평범한 눈삽)를 만들었다. 그는 누워 있는 나신, 인상파풍의 수련처럼 “만족스럽고” “매력적인” 사물은 우리의 눈을 자극할지언정 정신은 고무하지 못한다면서 미술이 “망막 미술”에서 벗어나 그다음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순히 시각적 산물이 아니라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었다. 물론 뒤샹이 혼자서 시대정신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이후 수 세대의 미술가와 애호가(잭도 그중 한 사람이다)가 뒤샹을 따라 이제 미술 작품의 진정한 핵심은 작품 배후에 있는 아이디어라고 주장했다. 생각이 사물을 이긴다, 예쁘장한 것은 수상하다, 표면의 광택을 믿어선 안 된다, 라고 말이다. 내가 315에서 그놈의 벽에 페인트칠을 할 때 잭이 말하길 자신이 한때는 스기모토 히로시Sugimoto Hiroshi의 정밀한 흑백 사진을 사랑했으나 이제는 그의 작업물에 “장식적”인 작품이라는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했다. 그 이유는 “테크닉이 지나치게 뛰어나서”였다.

 

그렇다면, 정말로 무엇은 미술이고 무엇은 미술이 아닌가? 기성 사물도 미술이 ‘될 수 있’다면, 정확히 언제부터 그것이 미술이 되는가? 답부터 말하자면, 미술계의 사람들이, 즉 ‘맥락’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된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고?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미술을 (직접 하거나 이해)한다는 사람들이 무엇을 미술 작품이라고 하면 그것이 미술 작품이 되는 것이다. 참 쉽죠?

나는 어제 갓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판단이 맥락에 따라 대폭 좌우된다는 상식 정도는 안다(증거 제1471호: 그래미상을 수상한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이 워싱턴 D. C.의 지하철역에서 연주했을 때 행인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에서는 ‘무엇이 미술이고 무엇이 미술이 아닌가?’라는 핵심적인 문제 자체를 맥락이 결정한다. 뒤샹의 〈샘〉을 떠올려 보라. 그건 소변기다. 거기다 오줌을 눠야 할지 아니면 찬찬히 감상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긴, 맥락을 알면 된다. 소변기가 화이트 큐브 안에 존재한다는 맥락, 그것이 유명 미술가의 작품이라는 맥락, 잭 같은 사람이 엄지를 척 치켜든다는 맥락. 그런 맥락 속에서 〈샘〉은 미술이다. 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이렇게 썼다. “무언가를 미술로 인식하는 데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미술 이론의 분위기, 미술사 지식, 즉 미술계다.” 우리가 차고에서 유아차를 몇 군데 손보고 그것을 자동차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자동차가 정말로 고속도로를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면에 갤러리에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비평가들에게 그 미술성을 격찬받으면 소변기가 조각 작품이 된다. 미술을 감상하는 법에 관해서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며, 그중 하나인 고립주의는 맥락을 거부하고 작품 이외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고립주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판에서는 영향력 있는 내부자가 미술이라고 부르면 그것이 미술이었다. 작품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붙어 있는 묵직한 이름들, 즉 맥락이었다.

이 점에 대해 따로 길게 말은 안 하겠지만, 미술계야말로 기존 권위나 특권이 상당히 잘 유지되는 곳이다. 흑인 아트 딜러나 미술가는 지극히 적고, 백인이 많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렇게 말하면 미술계는 일반 대중을 혐오하며 일반 대중의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 이상한, 변태 같은, 고집불통의 오만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 같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아마 일반 대중들이 제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게 작품 자체의 의미보다도, 그 작품의 ‘가격’에 있을 것 같은데, 저자는 그 점에 대해서도 파고든다. 일단 미술 작품에 가격을 매기는 과정 자체가 ‘이러이러해서 이런 가격이 나왔습니다’ 하고 투명하고 정직하게 설명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고, 갤러리가 큰 영향을 끼친다. 잘만 요청하면 작품을 10퍼센트(미술관은 최대 20퍼센트까지) 할인된 가격에 살 수도 있지만, 그만큼 갤러리와 작가가 돈을 덜 받는다. “그림 한 점이 4,000달러라고 하면 결코 싸다고 할 순 없지만, 잭이 헤일리 조지프스 개인전에서 그림 아홉 점을 전부 (할인 없이) 팔았다고 치면 업계 표준대로 갤러리와 작가가 수익을 반반(세전 1만 8,000달러)으로 나누어 가졌을 것이다. 그 돈으로는 1년치 집세도 못 낸다.”

작품 가격을 책정하는 또 하나의 보편적인 전략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가격은 조작돼요. 그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에요.” 전에 잭이 그렇게 말했다. 난 이 또한 그의 편향된 의견이겠거니 했으나 어느 날 저녁 로브와 그와 친한 갤러리스트 몇 명과 함께 식사를 하며 듣자 하니 정말로 이들이 작품 가격을 책정하는 논리는 “딜러 셋이 모여 ‘이 가격이면 누가 사겠는데?’ 하면 그 가격이 된다”였다. 딜러들은 몇몇 고객에게 이메일로 작품 구매를 제안한 뒤 “상대가 가격이 너무 높다고 답장하면 500달러를 깎아 준다.” 가격이 높다고 해서 작품을 팔기가 더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가격표에 0이 많이 붙어 있다는 건 그만큼 많은 VIP들이 인정한다는 뜻으로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짜 미술은 3,000달러 미만으로 팔아선 안 되죠.”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갤러리스트가 한 말이다. 어느 컬렉터 부부는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은 가격으로 치지 않는다고도 했다.

 

저자 말마따나 4,000달러나 하는 그림을 덜컥 살 수 있는 일반 대중은 많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그 돈을 전부 받는 것도 아니며, 그 돈으로 미술 활동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다. 저자가 작업실 조수를 자처했던 한 미술가의 경우를 보자. 이 미술가는 한 작품을 1,350달러에 팔았고, 미술가 본인은 600달러를 받았다. 그런데 그 작품이 2년 후, 최근 경매에서 10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재판매되었고, 당연히도 그에겐 1달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진짜로 그 미술 작품의 가치를 높이 사서 비싼 값에 사는 거라면,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그 값을 다 받는다면, 일반 대중들도 이에 대해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적어도 정당한 노동과 뛰어난 재능의 댓가라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미술가들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입된 후 갤러리 또는 기관 내에서 재판매가 되다 보면 이렇게 천정부지로 값이 뜀에도 불구하고 미술가는 한 푼도 받지 못한다. 또한 “미술계 안에서는 내부자 거래가 전적으로 합법이다”. 다시 말해, 매출세도 내지 않는다. 이러니 일반 대중이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물론, ‘자기네들끼리 다해 먹는’ 장사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일반 대중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술은 높으신 분들이 하시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그냥 그분들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할까? 아니다. 일반 대중도 예술을 즐길 수 있다. 예술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예술이 뭔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예술을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미술계가 ‘미술’이라고 하는 작품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 무엇이든 좋다. 바라볼 수 있는 만큼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만큼 느껴 보라. 저자는 15분간 한 작품을 오래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깊이 느끼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가 억지로라도 미술 작품과 관계를 맺을 때, 작품이 달라지고 자신도 달라진다. 1998년, 당시 예일대학교 의학대학원의 피부과 교수였던 어윈 브레이버맨Irwin Braverman은 피부 병변을 주제로 한 강의에 미술 현장 학습을 추가했다. 학생들에게 예일대 안에 있는 영국 미술 센터를 돌아보게 했다. 그는 이 분과에 나타난 우려스러운 추세에 주목했다. 그 무렵 의사들은 제한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검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잘 알려진 패턴에 들어맞는 정보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환자를 총체적으로 관찰하지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상 여과기가 진단을 좌우했다. 브레이버맨이 보기에 의사는 눈으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이후 예일대의 필수 수강 과목이 되었고 다른 많은 의학 교육 기관에서도 채택한 이 강의에서 브레이버맨은 학생들에게 J. M. W. 터너의 〈도르트레히트 항구의 범선Sailboat in Dordrecht Harbor〉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15분씩 들여다보게 한 뒤 그림에서 본 것을 설명하게 했다(브레이버맨에 따르면 ‘이 활동의 목표는 관찰의 문턱을 낮추어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만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익숙했던 것을 생소하게 만드는 것’으로 바꿔 표현해도 무방하겠다). 학생들은 미술관 현장 학습에서 반점과 사마귀로부터 잠시 해방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브레이버맨을 비롯한 여러 학자의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미술을 이용한 시각적 문해력 강화 수업을 들은 의대생은 (해부학 강의를 듣거나 환자를 촉진하는 법에 대한 강의를 들은) 대조군보다 환자를 더 많이 관찰했고, 자신이 본 것을 더 정교하게 설명했으며, 인간의 얼굴 표정을 더 잘 읽었고, 실수하는 일이 적었다. 뉴욕 경찰국, FBI, 미 해군 특수부대도 그림을 오래 들여다봄으로써 눈으로 사물을 보는 법을 다시 배우는 과정을 도입했다.

 

어떤가? 우리가 예술과 관계를 맺을 때, 미술계니 ‘이런 걸 잘 아시는 높은 분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지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을 분들을 위해 몇 작품을 추천하자면, 중매 결혼으로 결혼을 앞둔 여인의 분노에 찬 표정이 생생한, 오귀스트 툴무슈(Auguste Toulmouche)의 1866년작 “The Reluctant Bride”(위키페디아 페이지)나 자신을 성폭행한 트라키아 군대의 대장을 우물 속으로 빠뜨리는 티모클레아를 그린 엘리사베타 시라니의 1659년작 “자신의 강간범을 죽이는 티모클레아”(위키페디아 페이지)는 어떤가. 어떤 작품이든 좋으니 우리가 스스로 예술과 관계를 맺어 보자. 예술은 인간의 본능이자 누려 마땅한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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