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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류즈위, <여신 뷔페>

by Jaime Chung 2026.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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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류즈위, <여신 뷔페>

 

 

대만 작가 류즈위의 단편소설집. 여덟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모두 대만의 여성들 이야기이다. 앞에 실린 소설에 나온 인물이 후에 다른 작품에서 언급되고, 앞에서는 몰랐던 사실을 뒤에서 암시하기도 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제목인 ‘여성 뷔페’는 여성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취한다는 백래시 표현인 ‘여권 뷔페’를 비튼 것이다. 처음에 나는 ‘여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소비되는 대상이라는 점을 꼬집는 말인 줄 알았다(근데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나?). 어쨌거나 이 소설에도 진짜 여신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작품 <항아는 응당 후회하리라>는 달에 사는 선녀 항아가 현대 대만에서 살아가며 겪는 고난을 그린다. 항아는 달에서 쫓겨나 현대 대만에서 요가 강사 생활을 하며 살고 있는데, 그 삶은 대만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들이 겪는 위험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에 수강생들이 이 주인공을 ‘선녀 언니’라고 부를 때 그게 월궁(月宮) 같은 분위기를 가진 요가 수업 때문에 농담처럼 하는 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은 진짜 달에서 쫓겨난 선녀였다. 와, 이렇게 신선한 설정이라니.

“선녀 언니, 수업을 좀 더 늦은 타임으로 열어 줬어야 했어요.”

수강생들은 나이대가 모두 달랐지만, 다들 나를 선녀 언니라고 불렀다. 누가 나이를 물어볼 때마다 나는 오백 살이 된 뒤로는 딱히 세 보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몇 번씩 캐묻던 수강생들도 더는 묻지 않았다. 내 대답이 바람난 자기 애인 혹은 배우자보다 더 확고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들은 나를 친근하게 선녀 언니라고 불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호칭만큼은 내게 분명히 부합했기에 나도 그들이 그렇게 부르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물론 서왕모의 불만이 그뿐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여러 남자와 데이트했던 일을 두고 천계의 신들이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내가 아녀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나. 그래서 회의가 열릴 때면 그 분노를 서왕모에게 대신 풀었는데, 화가 치밀어 오르면 걸레 같은 암캐 선녀라는 말도 뱉었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서 쓰이는 욕들에 비해 딱히 신선하지도 않았다.

장생불로의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 확실히 신분을 감추고 조용히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인가? 만약 그때 내가 단약을 삼키지 않았더라면, 비열하면서도 옹졸한 한착(寒浞)이 장생불로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이라고는 조회 수가 폭발할 만한 영상을 몇 개 더 올려 그들이 증거를 지우느라 고생하게 만드는 것, 다수의 남성과 섹스하여 슬픔에 젖은 채 독수공방하는 젊은 과부라는, 그들이 바라는 이미지를 와장창 깨 버리는 것뿐이었다.

 

이 단편소설집의 표제작인 <여신 뷔페>에는 여신이나 그에 상응하는 신비한 여인들의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한다. 메두사, 시빌라(예루살렘의 여왕 이름일 수도 있고, ‘여사제, 무녀’를 뜻하는 그리스어 ‘시빌라’에서 유래한 이름일 수도 있다), 플로라, 아테나, 가이아, 릴리스 등. 이 소설에서 딱 한 명의, 모범적이고 완벽한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한 여성은 없지만 모두 제각기 나름대로 여성주의를 실천하고 주장하며 살아나간다. <여신 뷔페>는 그런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메두사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후보로 여겨질 만큼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 페르세우스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이를 어떻게 밝혀야 할지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메두사가 속한 팀의 팀장인 아테나는 남자들 못지않게 잘나가는 여장부인데 ‘고추를 싹둑 잘라 버린다’라는 말이 입버릇이다. 명예 남성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녀는 전남편과 동의 없는 성관계를 통해 아이를 가졌다. 전남편을 사랑하기는 했고, 그도 좋은 남편이었으며 훌륭한 아빠였지만, 그 관계는 그녀의 동의 없이 시작했다. 저자는 단순히 명예 남성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아테나라는 인물에게 이런 서사를 부여해 그녀도 결국엔 여성주의와 거리가 멀지 않음을 보여 주어서 감탄했다.

결국 딸은 아빠에게 불평했고, 아빠는 바깥 남자들의 추근거림을 불평했다. 그러다가 전화를 끊었다. 아테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 추운 날 딸이 밤늦게 돌아온 게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전남편이 딸 곁에 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전남편은 아주 훌륭한 아빠였으니까.

비록 자신과 전남편의 관계는 동의 없는 섹스로 시작되기는 했어도.

이 일을, 혹은 이 단어를, 그녀는 한참 뒤에,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고 나서야 합법이라는 게 꼭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상황은 위법과 합법의 미묘한 경계에 있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합법인지 위법인지는 다 그녀의 말에 달려 있었다고. 그러나 그때 그녀는 그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효성과 각종 디테일을 잘 몰랐다. 심지어는 ‘이 정도면 안 될 것도 없지.’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마음으로 전남편과 사귀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전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너 미국에 가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 ‘동의 없는 성관계’에 대해 아테나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오늘까지도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음주 뒤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그날 밤, 그녀의 거절은 충분히 단호했을까. 얼마나 단호해야 충분한 걸까. 그날 밤의 자신이 정말로 동의하지 않았던 거라면, 연애, 결혼, 출산, 이민이라는, 자신이 그 뒤로 밟아 온 정상적인 노선들은 다 뭐가 되는 걸까.

전남편을 사랑했던가? 사랑했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 다만…… 정상적인 교제와 시작이 좀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면 안 되었던 걸까…… 혹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되는 거였을까?

그녀는 여성들의 롤 모델이 되어야 하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다니.

 

저자가 책 마지막에 실린 ‘한국어판 <여신 뷔페> 작가의 말’에서도 썼듯, 대만은 아시아 국가 중 성평등에 가장 근접한 나라다. 일례로, 대만은 여성 의원 비율이 거의 40%로, 동북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다(출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 작가가 보는 여성 운동의 실상이 이러하다? 물론 거기라고 천국은 아니겠지만, 성평등 지수가 아시아 중 가장 높은 곳에서도 이렇게 치열하게 여성 운동을 해야 할 정도라면 도대체 여성이 살 만한 곳은 어디란 말인가. 맥이 탁 풀리고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여권 상승을 위해 애쓰는 수밖에 없지, 뭐. 참고로, 국내에 소개된 류즈위의 작품은 아직 이것뿐이지만,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어 들어온다면 그것들도 한번 읽어 보고 싶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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