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오후, <아름다움에 밑줄 치지 말 것>

‘정답만 찾는 시대, 농담처럼 읽는 삐딱한 예술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예술 에세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의 의견이 별로 나랑 안 맞아서 이 작가의 책은 다시 안 읽을 것 같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자신의 관점을 ‘삐딱하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그게 쿨한 거라고 생각해서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크게 신경 안 쓸 테니 나랑 별로 안 맞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책은 초반에는 괜찮게 시작한다. 예술의 역사를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데다가, 군데군데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서 아주 가볍게 잘 읽힌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이 트윗에서 언급하는 부분부터가 작가에 대해 약간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래 인용문은 약간 역겨울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라.
뜬금없이 백남준의 미담을 소개한 이유는 앞으로 안 좋은 이야기를 할 거라 균형을 맞추는 의미로 깔아둔 것이다. 백남준과 구보타가 한창 전위예술을 하던 시기에 그가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의 은밀한 부위(성기)에 붓을 꽂고 관객들 앞에서 그림을 그려줄 수 있겠소?”
고급스럽게 말했는데 속마음을 풀어보자면, ‘내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그게 관객들한테 쪽을 좀 팔아야 해. 네가 해 줘. 너 나 좋아하잖아’인 셈이다. 구보타는 이 제안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역시 연애에서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
1965년, 뉴욕에서 열린 플럭서스 퍼포먼스에서 구보타 시게코가 〈보지 페인팅Vagina Painting〉을 선보였다. 움직임을 위해서 붓을 실제로 성기에 꽂지는 않았고, 팬티에 붓을 고정한 채, 커다란 흰 종이에 붉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생리혈 혹은 출산의 하혈을 연상시키는 퍼포먼스에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젊은 여성이 성기에 붓을 꽂고 그림을 그린다니, 생각만으로도 강렬하지 않은가? 여기서 백남준에게 반감이 생겼다면 아주 정상적인 사람이다. 사람의 감정을 이렇게 이용하다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네 똥구멍에다 박고 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백남준이 엉덩이로 글씨를 썼어도 센세이션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웃긴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백남준은 의미만 있다면 쪽팔림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아티스트다. 그런데 그는 왜 구보타에게 부탁했을까? 남성 예술가가 엉덩이로 그리는 것과 여성 예술가가 보지로 붉은 피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 어느 것이 더 예술적으로 느껴지는가? 직감적으로 후자라고 판단되지 않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시 평론을 읽어보자.
이 작품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빗대는 동시에 그 작품을 뒤집어 버렸다. 이 퍼포먼스는 의도적으로 ‘여성적’인 몸짓으로 그림의 과정을 창조했다. 여성 육체 중 창조의 핵심인 곳에서 흘러나오는 그림은 사정하듯 던지고 떨어뜨리고 흩뿌리는 기존의 남성적 액션 페인팅과는 대조를 이룬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평론을 쓴 분이 크게 감명받은 건 확실한 것 같다. 백남준이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뒤집기 위해 이 작품을 여성에게 부탁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는 이 작품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파벨만스〉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처럼, 훌륭한 예술가들은 더 좋은 방식이 있으면 기어이 행하고 만다.
훗날 구보타는 이 퍼포먼스가 “너무 직설적이고 메시지도 단순했다”라며 “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몇 차례 한 적이 있다. 보지 페인팅은 구보타가 평생에 걸쳐 진행한 작업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비디오와 조각 작업을 주로 해왔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그녀의 작품을 14점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남편인 백남준과 동일한 숫자다. 구보타의 작업이 백남준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수준임을 보여주는 지표다. 하지만 보지 페인팅 하나가 다른 작업 전체보다 세간에서 더 많이 회자되니 그녀의 후회가 충분히 이해된다.
백남준이 구보타 시게코에게 ‘제안한’ 일은 역겨운 일이다. 나도 저자 말마따나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네 똥구멍에다 박고 해’라고 일침을 놓고 싶다. 하지만 왜 자꾸 이 퍼포먼스를 언급하면서 ‘보지’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ㄴ원문의 ‘Vagina’라는 영단어는 여성의 성기, 질을 가리키는 아주 의학적이고 건조한 단어다. ‘보지’라는 속어 표현에서 느껴지는 저급함은 없다. 원문이 ‘p——y’라거나 ‘c—t’라는 속된 표현이었으면 또 모를까. 그냥 ‘질’이라고 하면 되는데 왜 자꾸 저속한 표현을 쓰지?
그리고 여성의 신체를 이용한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또 이렇게 썼다. 쿠션어가 아주 덕지덕지 붙어서 숨이 막힐 정도다. 모든 남성이 성범죄자는 아니라는 말을 급하게 덧붙일 필요가 있나?
먼저 여성은 남성보다 본인의 신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여성의 몸은 어린 시절부터 대상화된다. 여성들은 청소년기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성추행을 겪는다. 성추행이라고 하니까 심각해지는데, 꼭 범죄까지는 아니어도 일상에서(대중교통이나 길에서)도 추행의 시선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더 심각한 건 이런 경험을 대부분 청소년 시절에 겪게 된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불안하고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의 경험은 자아를 형성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여성은 좋든 싫든 자신의 몸에 대해 빨리 인식하고 일평생 생각하게 된다. 혹시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모든 남성이 성범죄자라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5퍼센트만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여성의 90퍼센트 이상이 나쁜 경험을 할 수 있다. 반면 대다수 남성은 이런 면에서 고민이 적다. 아무래도 고민이 많은 쪽에서 관련 예술도 나올 확률이 높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과 신체에 관해 작품을 많이 만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고민이 많은 쪽에서 관련 예술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이게 정말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기회’인가? 맥락을 위해 설명하자면, 아래 인용문에서 언급한 <리듬 0>는 젊은 여성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참여형 퍼포먼스로, 여섯 시간 동안 관객이 테이블에 놓인 다양한 물건(장미, 향수, 포도, 와인, 채찍, 가위, 메스, 총알이 한 발 장전된 총 등)을 가지고 예술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비치되어 있었다. 공연은 ‘온화하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옷은 모두 면도날에 찢겼고, 면도날이 그녀의 피부에 닿기 시작했으며, ‘다양하고 소소한’ 성폭행이 그녀의 몸에 수차례 벌어졌다. 이런 맥락을 알고서 아래 인용문을 읽어 주시라.
또한 여성의 신체는 여성 작가에게 몇 안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20세기까지도 예술계의 주류는 남성이었다. 예술은 객관적인 지표가 없기 때문에 평가에 있어서 성별이 중요하게 작동해 왔다. 수준이 비슷하다면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다.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었다. 눈에 띄기 위해서는 남성 작가들은 할 수 없는, 혹은 하지 않는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걸 한다면 남자를 시키지, 여자를 시킬 이유가 없었으니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섹슈얼한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더불어 생리, 임신, 출산, 낙태 같은 것 역시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이런 소재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눌려 왔기에 예술로 표현할 거리도 많았고 극적이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삭발을 해도 여성의 삭발이 더 파괴적이다. 신체를 사용한 것으로 한정한다면 같은 퍼포먼스를 해도 여성들은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도입부에 언급한 〈리듬 0〉의 작업을 남성이 하는 것이 충격적인가, 여성이 하는 것이 충격적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사회가 편견에 휩싸여 자신의 신체를 매력으로 봐준다는데, 자신이 가진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딨겠는가.
이걸 기회라고 본다고요? 아브라모비치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이 사회가, 사람들이 여성의 신체를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저자는 예술가의 의도, 주제는 중요하지 않으며 관객인 내가 느끼는 바가 그대로라고 했으므로 이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해 보았다). 이걸 단순히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 기회를 가지고 ‘아싸 좋구나’ 하고 한 퍼포먼스로 보이는가? 저자는 ‘사회가 편견에 휩싸여 자신의 신체를 매력으로 봐준다는데’라고 썼지만, 예술가든 아니든 그저 여자들은 다 안다. 나의 신체는 매력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도구로 보일 뿐이라는 걸. 여성 예술가에게 주어진 건 기회가 아니고 제약이며, ‘너의 예술은 중요하지 않아/의미 없어’라는 가치 절하이다. 같은 예술을 여성이 해도, 저자 말마따나, 더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왜 세상에 그렇게 인정받는 여성 예술가가 남성 예술가보다 적은 것인가? 아이고, 이걸 여태까지 몰랐던 사람에게 설명하려니 내 입만 아프지.
저자 본인 입으로 ‘삐딱하다’라고 평한 예술 평론은 특히 7장 ‘주제 같은 소리 하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저자가 영화를 전공해서 그런지, 엘리트주의라고 할까, 대중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다음 인용문을 보시라.
미술을 즐긴다고 하는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과거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즐긴다. 이름난 죽은 작가의 전시회에는 몇만 원의 입장료를 내고도 구름 관중이 몰리지만, 동시대 작가의 전시회는 무료로 진행해도 극소수의 관객만이 방문한다. 물론 유명 작가들은 명성만큼 실력이 좋다. 역사적인 작품을 볼 수 있다니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압도적으로 몰리는 것에는 우리가 미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기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다.
미술 전시를 보는 것이 취미생활인 지인이 있었다. 요즘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적다 보니 기억하고 있다가 친구의 전시회에 초대했다. 지인은 고맙다고 하더니 전시회를 둘러보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제가 뭐야?”
그때 깨달았다. 사람들은 답을 모르는 작품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심지어 그게 미술을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의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해석이 없는 작품을 보는 것은 불편하고 재미도 없으며 때론 무서운 일이다. 최소한 “이건 자유롭게 보는 것”이라는 지시 아닌 지시라도 줘야 한다. 사람들은 주제를 묻고, 결론을 확인하고 나면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군다. 하지만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과거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즐기는 게 ‘기형적’이라고 할 정도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기원 후 2,000년이 넘었는데 당연히 과거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예술가들이 지금 동시대 예술가들보다 수적으로 많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을 즐기는 게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게다가 지인 이야기는 은근히 그 지인을 깔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왜 평범한 사람들이 ‘이 작품의 주제가 뭐야?’라는 질문을 하는지 잘 모르는 듯한데, 그건 정말로 모르겠기 때문이다. 현대 미술은 난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저자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왜 현대 미술이 난해한지 그 이유를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 여기에선 시작조차 하지 말자).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다? ‘아, 현대 미술이 대중과 유리되어 있어서 대중이 이를 어렵게 느끼는구나.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이러이러하다고 설명해 주면서 대중도 현대 미술을 즐기게 돕고 싶다!’ 같은 접근이 아니라 ‘그걸 몰라? 왜 자꾸 답을 찾으려 들어? 너희, 예술을 접하는 태도가 완전 빵점이야’ 같은 태도라니, 아주 밥맛이다. 아니 모르니까 알고 싶어 하잖아요. 제대로 좀 차근차근 알려 주면 어디 덧나냐? 일반 대중처럼 ‘그래서 도대체 미술이란 게 뭔데?’라는 답답함에 아예 현대 미술 이해하기에 온 몸을 던진 비앙카 보스커가 쓴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가 그런 면에서 훨씬 더 친절하고 인내심 있고 도움이 되는 책이다. 반면에 이 책은 상대를 비웃기나 하지 도우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가 영화든 뭐든 전공을 해서 더 많이 배웠으면 잘 아니까 설명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비전공자들을 왜 비웃지?
저자도 자신의 그런 태도를 잘 알고 있는지, 마지막 장인 9장 ‘AI와 예술’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내 책을 오래도록 봐온 독자라면 느낄지도 모르는데,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정보 전달의 힘을 빼고,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름 AI 시대에 살아남으려고 바둥거리고 있다. 내 책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면 “본인의 생각이 너무 강하다”라든지 “주관적 생각만 뺐으면 좋은 책이었을 것”이라는 식의 표현이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 주관적 생각이 없다면 내 글은 그냥 잘 정돈된 AI 혹은 그 이하의 글이 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 악평을 쓴 독자분들에게는 죄송하게 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인공지능과 경쟁할 생각이 없으므로 내 스타일과 생각을 더 예리하게 다듬어 강조할 수밖에 없다.
책을 쓴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을 법한 리뷰를 가지고 이렇게 뒷담화를 한다고? 다음 책에는 내 리뷰에 대한 이야기가 실릴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사람들은 본인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의 글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이 담고 있는 내용물)을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앞에서 낸 결론처럼, 저자의 의견이 나와 너무 달라서 다시는 이 저자의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진짜로 예술이 뭔지 이해하고 싶다, 왜 현대 미술은 그렇게 어려운가 고민하는 분이라면 방금 언급한 비앙카 보스커의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를 강력히 추천한다. 조금 길긴 하지만 그런 만큼 차근차근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 미술을 잘 짚어 가며 설명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비앙카 보스커 본인이 우리처럼 현대 미술에 무지했으므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불쾌한 시선 없이, 같은 배를 탄 동지를 대하듯, 정말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어쨌거나, 이 책의 제목을 인용해 평을 내리자면, 이 삐딱한 생각에 밑줄 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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