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재인, 재욱, 재훈>

정세랑 작가의 2014년 노벨라(중편 소설). 이게 12년이나 됐구나. 이 소설은 2021년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독자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나는 (전자) 도서관에서 빌려 본 거라서 그냥 처음 출간됐을 때의 그 단순한 표지를 가진 판본으로 봤다.
제목은 주인공 삼남매의 이름들이다. 이 세 명은 각자 나름대로 사소한 초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첫째 장녀 재인의 능력은 손톱이 엄청 단단해지는 것이다. 재인은 화학 물질을 가지고 연구하는 연구원이라 손톱이 계속 부러지고 벗겨지고는 했는데 말이다. 중동 국가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된 둘째 재욱은 설계와 실제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잘못 시공되었을 때의 위험이 클수록 시야가 붉어지는 초능력을 갖게 된다. 이는 위험을 감지하는 데 무척 유용하다. 아직 고등학생인 막내 재훈은 원하는 즉시 엘리베이터를 자신이 있는 층으로 불러오는, 지극히 사소한 초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초능력을 가진 세 남매는 그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하게 되는데…
종이책 기준 172쪽이라 정말 짧다. 집중력만 있다면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줄거리를 소개하기가 좀 뭣하다.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을 피하면서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자면 아마 이 정도일까.
재인은 물론 재욱에 비해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서른한 살이면 배스킨라빈스의 모든 맛을 한 번씩은 다 먹어본 나이였다. 단종되고 교체되는 맛까지 합치면 생각보다 더 풍부한 맛을 말이다. 꽃잎 모양 브로치를 달고 마법 소녀가 되어달라는 요청 같은 걸 받아들이기에는 확실히 늦어 있었다.
손톱은 무기였다. 문명사회에서 태어나 잊고 있었지만 확실히 무기였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한 중략) 한동안 정신없었던 모든 일들이 이제는 끝나게 될까 싶었다. 이상하게 아쉬웠다. 무기를 가지고 있는 기분,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의지는 재인에게 활력이 되었던 것이다. 재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자아이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처럼 누군가에게 구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 여자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구하는 이야기.
“이 영화가 재미없는 건 맞는데,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재욱이 말했을 때 재인과 재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각자 자기가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책 뒤에 ‘작가의 말’을 보면 세 등장인물 모두 작가의 주변 인물에게서 이름과 몇 가지 설정을 빌려왔다고 한다. 재인은 고등학교 친구이고, 재욱은 파견 경험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어 저자가 사막의 모래 한 톨 밟아본 적 없이 재욱이라는 캐릭터의 중동 국가 파견 기간에 대해 쓸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재훈은 작가의 친동생으로 이름과, 정말로 2013년 여름에서 2014년 봄까지 조지아의 염소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빌려 주었다고 한다. 이야, 대단한걸. 짧지만 귀여운 노벨라는 성인 독자들뿐 아니라 학생들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듯하다. 두루두루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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