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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by Jaime Chung 2026.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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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솔직히 이 책을 내가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트윗을 보고 이 책을 알게 되어 읽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인용한 부분은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이 책의 나머지 부분들은… 나쁘다는 게 절대 아니고, 나랑 취향이 완전히 정반대여서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시라든지 내가 딱히 읽을 생각이 없는 작품들. 그것들이 형편없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닌데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냥 내 취향이 아니어서, 내 관심사가 아니어서 딱히 집중이 안 됐다. 정말 후루룩 넘기고 끝내 버렸다.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가 뭐한 상황.

 

그래도 뭐라도 써야겠으니 내가 하이라이트했던(전자책의 좋은 점은 내가 아무리 하이라이트를 해도 책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분을 몇 군데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2017)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도 있긴 한데 너무 길어서 여기에서 다 보여 드리지는 못할 듯).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가 이집트와의 전쟁에 승리했을 때, 승전국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는 패전국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토스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패전국의 왕을 길거리에 세워두고, 그의 딸이 하녀로 전락해 물동이를 지고 우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했다. 이 광경을 보고 모든 이집트인이 슬퍼했으나 정작 왕은 땅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곧이어 아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은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포로 행렬 속을 걸어가는 늙고 초라한 한 남자가 자기의 오랜 시종임을 알아본 순간, 왕은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극도의 슬픔을 표현했다.

그리스 시대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이 이야기를 몽테뉴는 이렇게 해석했다. “왕은 이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조금만 그 양이 늘었어도 댐이 무너질 판이었다.” 즉, “딸과 아들까지는 잘 눌러 참았는데 시종을 보자 그 슬픔이 흘러넘쳤다는 것”이다. 반면에 발터 벤야민의 친구 프란츠 헤셀은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왕에 속한 가족들의 운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명은 그 자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가족은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에, 패전국의 왕과 자녀들이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나, 늙은 시종은 죄가 없기에 죄책감에 몸부림쳤다는 것이다.

한편 벤야민의 연인 아샤 라치스는 이렇게 해석했다고 한다. “실제의 삶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으나 무대 위에서는 감동시키는 것들이 많다. 이 시종은 그 왕에게 단지 그러한 배우였을 뿐이다.” 알쏭달쏭하게 들리지만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는 정작 내 가족들의 고통은 무심하게 보아 넘기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때는 뜻밖에 펑펑 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가족에 비해 시종은 확실히 왕에게서 ‘떨어져’ 있는 존재다. 그 ‘거리’ 때문에 왕에게 시종은 일종의 극(劇)화된 비참으로 다가온 것일 수도 있었겠다.

나는 이 부분에다 이렇게 메모했다. ‘남들에게는 세상 호인이면서 자기 가족들에게는 쩨쩨한 그런 남자인 거 아니야?’라고.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 집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해 주는데 오히려 자기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 가족들에게는 그만한 관용이랄지 배려를 베풀지 않는 사람. 그런데 위 인용문을 방금 옮겨 적다 보니까 새삼 이 말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예를 들어 TV 드라마 속 부모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고 우는 때가 있는데, 이건 나의 실제 부모님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극 중 부모님 캐릭터들은 내가 몇십 년간 지지고 볶고 싸운, 살과 피가 있는 진짜 사람이 아니기에, 나의 실제 현실을 이입하지 않고도 감동하거나 슬퍼하거나 할 수 있다는 거다. 할머니와 그다지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도 영화 <집으로…>(2002)를 보면서 울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상황에서 시종, 드라마 속 부모님이나 할머니, 또는 뭐가 되었든 이 인물들에게 나의 현실을 투사하게 되지는 않는달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다시, 폭력에 대해 말해야겠다. 언젠가 ‘폭력’이라는 말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밝히면서 나는 폭력을 다음과 같이 폭넓게 정의해보려고 했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 끝날 일이 아니어서, 그 후로도 자주 폭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앞에서도 언급한 트윗이 소개한, 아이유의 <제제>와 관련해 학대받은 아동의 ‘이중성’에 대한 꼭지의 첫 문단이다.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이라는 부분을 읽다 보면 나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 나도 생각보다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싶다(그러니까 이게 엄청 넓은 정의라는 거죠).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읽지 못하고 있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를 뒤늦게 읽고서야 리베카 솔닛이 카산드라에 대해 더 훌륭하게 적어두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에 옮겨 적는다. “카산드라 신화의 여러 버전 중 가장 유명한 버전에서, 사람들이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게 된 것은 그녀가 아폴론과의 섹스를 거부함으로써 아폴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도 자기 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신뢰성을 잃는 것이 연관된 일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것이다.”(173쪽)

이 말도 물론 맞다. 그런데 나는 어딘가에서 읽었던 말이 떠오른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체로 똑똑한 젊은 여자가 앞으로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예측해서 말하는 걸 그 당시 시대 사람들이 들어 줬을 리가 없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아폴론의 저주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그들은 ‘어린 여자가 뭘 안다고’ 하면서 카산드라를 무시했을 거라는 말이다. 백번 공감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야 아폴론 신이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은 데 정당한(그걸 정당하다고 부를 수 있다면) 이유를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여성 혐오뿐일 것이다.

 

(…) 그러나 대가급의 작가라면 작품 목록이 꽤 길 것이다. 아무리 축제여도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령이 필요하다. 한 작가에 대해 신속∙정확하게 알고 싶으면 일단 세 권의 책을 읽으면 된다. 데뷔작, 대표작, 히트작. 데뷔작에는 한 작가의 문학적 유전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에, 대표작에서는 그 작가의 역량의 최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히트작은 그가 독자들과 형성한 공감대의 종류를 알려 주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있다. 재작년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의 경우라면, 데뷔작인 <조서>(1963),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사막>(1980), 베스트셀러 <황금 물고기>(1997)를 우선 갖춰놓는 식으로 말이다.

꿀팁 감사합니다. 읽어 보고 싶은데 작품 세계가 방대한 작가들이 몇몇 있어서, 이런 식으로 접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저자가 언급한 많은 작품들은 나쁘지 않지만, 내 취향이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냥 훅훅 넘어갔다. 나의 무드가 아니랄까. 하지만 그의 인문학적 통찰은 분명히 뛰어나다는 점을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어차피 저자는 나의 인정 따위 필요 없겠지만. 그렇다고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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