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피프티 피플(개정판)>

제목처럼 50명(정확히는 51명이지만 ‘피프티원 피플’은 딱 떨어지지 않아서 좀 그러니까)이 등장하는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각 장(章)이 (대체로) 등장인물 한 명의 이름이고,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각자 다른 한 명 한 명이 주인공인 단편소설이 50편쯤 이어진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 등장인물들은 서로 연결돼 있어서 여기에서 주인공이었던 인물이 저기에서 지나가는 말로 짧게 언급되기도 한다. 이렇게 각각 인물들에게 연결고리가 있다는 게 좋았다.
이 인물들이 가진 공통점은 이 소설의 주요 무대인 한 병원과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병원에서 일하고, 어떤 이들은 이 병원에 환자로 방문했다. 마지막에 그 병원과 관련된 일화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들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지 기대하시라.
51명이나 되는 인물들 중 제일 인상 깊은 인물을 꼽아 보라면 가장 먼저 송수정의 어머니이다. 이 소설의 가장 첫 번째 장이 ‘송수정’인데 그의 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았는데도 “9월에 딸이 결혼을 해서 그때까지 외출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라며 담당 교수에게 ‘흥정과 선언의 중간쯤 되는 투’로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수정은 엄마가 마지막 에너지로 돌리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타서 결혼식 준비의 단계 단계를 거쳤다. 엄마 때문에 웨딩플래너의 기미가 짙어진 것 같았다. 엄마는 한국에 있는 모든 웨딩드레스를 다 확인하려는 것 같았고, 사진 스튜디오에 따라와서도 ‘곧 죽어요’ 호소를 하여 최대 촬영 컷 수를 얻어냈으며, 식장을 장식할 꽃에만 한재산을 탕진하려는지 플로리스트에게 가장 화려한 디자인을 요구했다.
“오빠 결혼식은 완전 소박하게 해놓고, 새언니 보기 안 부끄러워?”
수정은 참다가 한마디 하고 말았다.
“아니, 그때는……”
그때는 내가 죽을 줄 몰랐지, 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 또 지고 말았다. 청첩장을 600장이나 보내겠다고 했을 때는 그중에 50장만이라도 자기 몫이었으면 하고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다행히 청첩장에 곧 죽는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았다. 그건 엄마의 동창생들이 나팔수처럼 전파할 셈인 듯했다.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수정은 결혼식 아침에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건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치?”
“그치.”
수정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자기보다도 엄마에게 더 신경 써달라고 조용히 부탁했다. 평소에는 연예인만 담당하는 원장님인데 엄마가 그 아침에 나오게 했다. 그 섭외의 과정을 수정은 알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딸의 결혼식은 보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용감히 이겨내는 엄마나, 그런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결혼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정(과 그 남편)… 아니 첫 에피소드부터 사람을 이렇게 울리기 있냐고요! 🥲
마취과 의사인 김혁현이 ‘천재소녀’랑 썸 타는 에피소드는 또 얼마나 귀여운지. 아이고 숨막히게 귀여워라!
“샘 수술실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요. 유난히 수술이 잘돼요. 그런 거 믿지 않는데 징크스랄까.”
“정말요?”
정말요,라니. 똑똑한 소리를 좀 해봐. 똑똑한 여자 앞에서 똑똑한 소리를 좀 해보라고. 그래, 커피를 마시자. 커피로 어떻게 좀.
“이 건물 위에 극장 들어온대요.”
“정말요?”
오늘은 정말요,인가. 하루에 단어 하나밖에 쓰지 못하는 건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잖아. 당신한테 반하는 바람에 이 병원에 남았다고, 당신 수술을 보는 게 가장 즐겁다고, 결혼하자고, 나는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한다고, 경력 단절 같은 거 절대 경험하지 않도록 육아든 뭐든 의학적 재능이 덜한 내가 하겠다고, 당신을 서포트하기 위해 내가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고, 그렇게 몇년이나 몇년이나 생각해왔다고, 아니 아니,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고, 그건 내 망상일 뿐이라고, 당신의 그 기적 같은 손가락을 한번만 살짝 잡아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렇지만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이호라는 1940년생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다. 별명은 ‘슈크림 교수님’.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렸지만 정수리 쪽엔 아직 힘이 있다. (…) 둥근 얼굴에 하얗게 삐친 머리카락이 슈크림에서 새어나온 크림같이 보여서.”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할아버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데 정말 그럴 만한 게, 꼰대가 아니라 정말 존경할 만한 어르신이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할아버지 마스코트 정도인 걸 스스로도 알지만, 그래도 보탬이 되기 위해 출근도 퇴근도 응급실을 통해서 한다. 주로 배가 아파서 온 환자들에게 다가가 촉진을 해본다. 호 선생이 수련을 받을 때는 똑똑한 기계들이 없었다. 있다 해도 부족했다. 청진기와 손가락이 진단 도구였다. 워낙 대단한 기계들이 등장해서 촉진의 중요성이 줄어들었지만, 어쨌든 촉진은 간단하고 빠르다. 빠른 것은 도움이 된다. 슈크림 교수가 환자의 복벽이나 흉벽을 통통 두드리고 꾹꾹 눌러본 다음 “간이야!” “비장이야!” “신장이야!” 말해주면 여러 검사를 할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응급의학과에서는 매번 고마워한다. 대개는 사소한 도움이지만 몇번은 정말 위험한 환자를 간발의 차로 구하기도 했다. 덕분에 ‘출근할 때 세명, 퇴근할 때 세명 구하고 가신다’는 소문이 났지만 과장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존경할 만한 어른이 몇 없어서 조금만 멋져 보여도 신이 나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주목받는 게 싫지는 않기 때문에 좋은 트위드 재킷을 입고 일주일에 한번쯤은 근사한 모자도 쓰고 출근한다.
출근할 때 세 명, 퇴근할 때 세 명, 하루에 도합 여섯 명을 구한다는 점도 멋지지만, 그의 최고 멋짐은 가르치려 들지 않는 데 있다. 어떻게 그렇게 일가를 이루셨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호 선생은 사실 딱히 할 말은 없다. “운이 좋았다.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았다. 그게 솔직한 심경이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민망하다. 듣는 사람도 이 사람 뭔가 싶을 게 아닌가.”
그의 아버지는 수학 교사였고, 덕분에 그는 부유하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서울 유학은 자식이 없는 친척 아저씨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은 나라의 도움으로 다녀왔다. 유학 시절은 영양실조에 걸릴락 말락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굶어 죽기 직전엔 꼭 누가 도와주었다.” 게다가 아내를 만난 것도 완전히 운이었다. 아내분도 호 선생만큼이나 좋은 분으로, 호 선생이 몇 년이나 의료 봉사를 떠나도 뭐라고 하지 않고, 돈을 벌어 오라고 구박도 하지 않았단다. 게다가 미대생 출신으로 미감도 뛰어났던 것 같다. 덕분에 부동산 투자에 성공할 수 있었으니. 아내분 혹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신가… 진짜 너무 멋진 부부다.
호 선생의 에피소드는 마지막에 나오는 달동네 의료 봉사에 가서 만난 한 아이 환자와의 대화가 역시 제일 좋다.
“언제부터 공부 잘하면 의사 될 수 있어요?”
“되고 싶어?”
“네, 근데 공부 잘 못해요.”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도 좀 좋아야 해.”
아이는 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 이해할 것이다.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파도가 부서질 줄 알았는데 계속되었다. 평생 그랬다. 유학생 출신답게 호 선생은 생각했다. ‘그레이트 라이드’였다고. 그 좋았던 라이드가 이제 끝나간다. 그렇다면 나눠줘도 좋을 것이다.
“내가 운을 좀 나눠줄게. 악수.”
아이가 피식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싱거운 할아버지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집에 돌아오니 문밖에서부터 구운 생선 냄새가 났다. 여전히 생선은 맛있다. 어릴 때 먹었던 만큼 맛있다. 충분히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호 선생은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다. 발밑에서 큰 파도가 다 부서져도 좋다. 지금껏 너무 많이 가졌다. 잃어도 좋다.
‘지금껏 너무 많이 가졌다. 잃어도 좋다.’라니! 감사로 가득한 삶의 자세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게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음을 알고 나누는 삶. 이렇게 멋진 어르신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이, 직업, 처한 상황 등이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저자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 싱크홀 사건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서 저자도 밝혔듯이 이 소설이 2021년(이 소설의 개정판이 나온 연도)에 쓰였다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작가는 시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이 소설은 2026년 지금 읽어도 참 좋다. 정세랑 작가 실력이 어디 갈 리가! 나는 이걸 전자도서관에서 빌려서 일주일 만에 급하게 읽어야 했는데(연장 불가!) 워낙에 인기가 있어서 간신히 빌렸기에 불평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좀 더 여유 있게 읽었어도 좋았겠지만. 단연코 읽을 가치가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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