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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by Jaime Chung 202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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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내가 좋아하는 정세랑 작가의 단편 소설집. 총 여덟 편이 담겼다. 각각의 작품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이 책에서 아마 가장 짧은 듯. 오른손 검지가 사라지는 아이와 그를 짝사랑하는 ‘점핑 걸’, 그러니까 높이뛰기 선수의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정말 그렇다. 한 명은 오른손 검지가 사라지고 다른 한 명은 높이뛰기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랜덤해 보이는 소재를 섞는 걸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정세랑 작가라서 무난하게 읽었다.

 

<11분의 1>은 길다. 주인공은 대학 때 동아리에서 유일하게 여학생이었던 한 여성. 그는 동아리에 있던 11명의 오빠 중 한 명을 짝사랑했는데, 세월이 지나 많은 오빠들은 결혼을 했지만 그 짝사랑 오빠 ‘오기준’만큼은 결혼하지 않았다. 사실 주인공은 그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도, 만나 보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기준과 친하던 다른 오빠가 주인공을 자신의 (무려 남아공에 있는) 집에 초대한다. 드디어 오기준을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리셋>은 어느 날 갑자기 지렁이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 ‘아포칼립스’ 비슷한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문명이 그야말로 ‘리셋’되는 것. 나는 이게 가장 ‘친환경’적인 이야기라고 느꼈다. 설정도 설정인데, 중간중간에 나오는 세계관이 굉장히 그런 식이랄까.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리셋’ 이후 지하도시에서 살게된 인간들은 ‘종차별 금지법’을 만들어 반려동물을 교배하거나 야생동물을 길들이지 못하게 된다. “인류는 더 이상 인류를 위해 다른 종을 굴절시키지 않는다. 울타리 밖의 돼지들을 몰래 바라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이 외에 섹스는 스티커로 대체되고, 이전 세대처럼 ‘패스트 패션’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달라졌다. 나도 과도한 산업화, 천박한 자본주의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단편 소설에 그려진 모습을 보면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사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싶다. 어쨌거나 정세랑 작가가 그리는 환경주의적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다면 이 단편이 그걸 제일 잘 표현한 것 같다.

 

<모조 지구 혁명기>는 지구를 닮았지만 이상하게, 끔찍하게 다른 모습인 ‘모조 지구’가 배경이다. 이곳에 납치되어 온 지구인 ‘나’는 그곳에서 만난 ‘천사’와 사랑에 빠지지만, 괴상한 모조 지구를 만든 창조주(’디자이너’라는 직함으로 불린다)는 그 천사에게 날개가 자라나게 한다. 생살을 뚫고 자라나는 날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나’는 온전한 고양이도, 온전한 인간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창조물 ‘고양이 인간’과 힘을 합쳐 창조주를 막기로 하는데… 내가 이전에 읽고 리뷰를 썼던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에도 ‘천사’와 ‘고양이 인간’이 나오는 이 세계관이 조금 언급되는데, 여기가 풀 버전이다. 기괴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

 

<리틀 베이비블루 필>에서는 치매 환자들에게 3시간 동안 기억을 활성화시켜 주는 하늘색의 작은 약이 발명된다. 원래 의도는 치매 환자가 기억해야 할 것들, 그러니까 집 위치라든가,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 등을 기억하게 도와주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이 약을 남용하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도 아주 다양하다. 정세랑 작가는 작은 것 하나가 변하면 그에 따라 연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관을 상상하는 일을 참 잘하는 듯.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속 한국에는 특수한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 있는데 주인공인 여승균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영어 교사로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열여섯 명이 살인자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에 사람의 폭력 성향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부가 그를 수용소로 데려왔는데, 이곳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그처럼 이상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그들은 친구가 되어 가는데, 의외로 안락한 생활도 영원할 수는 없으니… (더보기) 결국 여승균은 어떻게 제목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인가.

 

<7교시>도 꽤나 환경주의적이다. 지금으로부터 몇 세기가 흐른 미래, 현대사 수업에서 학생들이 과거(그러니까 지금)를 살펴보는 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낯설게 보게 한다. 현대사 수업은 이렇게 현대를 평가한다. “그러니까 여섯 번째 대멸종 이전의 사람들도 생명권의 개념을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 겨우 고려되기 시작한 단계였지만요.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동물을 해치지 말자고, 모피를 입지 말자고, 또 그때까지 식생활의 중심이었던 육식을 줄이자고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처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학생들은 이 내용에 ‘역겨움의 반응’을 보낸다. “2백여 년 전 사람들은 기쁠 때도 위로가 필요할 때도 서로 고기를 사주었다”라는 말에 “뜨악”해하며 요리 프로그램 자료들은 “그로테스크의 극치”로 여긴다. 이 세상에서는 인공 포궁과 필름형 피임도구가 보편화되어,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형태도 많이 달라졌다. 원치 않는 임신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설정은 좋은데, 정말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파트너가 아닌, 완전히 낯선 타인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원할까?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와 자기가 사랑하는 파트너를 닮은 아이를 원하는 게 핵심 아니었어? 나는 아이를 원한 적 없어서 이게 본능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하는 바는 그렇다는 거다. 과연 세상이 그렇게까지 바뀔까?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는 제목 그대로 좀비 시대에 살아가는 양궁 메달리스트의 이야기다. 그는 가장 증오하는 자들을 먼저 쏠 줄 알았으나, “막상 정윤이 쏘기 시작한 것은 반대로 호감을 느꼈던 상대들이었다. 존경했던 교양과 강사, 자매 같았던 동기들…… 정윤은 그들의 변한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가 있을까.

 

전반적으로 재미는 있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환경주의적 이상이랄까,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 점이 조금 거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정세랑 작가는 인기가 있어서 그런지 10년도 더 된 작품이 개정판으로 새롭게 선보이는 일이 자주 있는데, 절판되거나 구하기 어려운 책을 다시 펴내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때마다 개정해서 내는 건 좀 아쉽다. 내가 정세랑 작가를 좋아하긴 하지만 매번 예전 작품의 문장을 손본다든지, 이야기의 부분부분을 바꾼다든지 하는 건 자기 작품에 자신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이미 한번 다 완성해서 썼는데 왜 고치지? 예전에 읽은 독자는 그럼 새로 읽어야 하는 건가? 내 손을 떠났으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건데… 자기 눈에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더 건드리면 안 되지. 개정판 말고 그냥 새로운 이야기를 내 주세요 작가님… (내가 2025년 개정판 대신 2020년 초판을 읽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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