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이민 2세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캐시 박 홍의 에세이.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담았다. 제목의 ‘마이너 필링스’는, 인종 차별적 행위를 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가리킨다(참고로 아래 인용문에 등장하는 프라이어는 잠시 후에 조금 더 자세히 언급할 예정이다).
프라이어는 내가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으로 칭하는 것을 채널링하는 사람이었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격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시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클로디아 랭킨의 시집 <시민>은 소수적 감정을 탐구하는 책으로는 이제 고전으로 꼽힌다. 화자는 인종차별적 언사를 듣고서 자문한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지? 본 것, 들은 것이 다 확실한데도, 내 현실을 남에게 폄하당하는 경험을 너무 여러 차례 겪다 보니 화자 스스로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감각 훼손이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이라는 소수적 감정을 초래한다.
이 책을 구성하는 일련의 에세이들에는 공감할 만한 구절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들.
(….) 미국인 대다수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티슈를 크리넥스라고 부르듯 중국인을 아시아인을 부르는 대유법으로 여긴다. 저들은 우리가 수많은 민족의 느슨한 연합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시아계 미국 사회에서 “우리”를 가늠할 자격 조건은 너무나 많다. 남동아시아인, 남아시아인, 동아시아인과 태평양 섬 출신, 성 소수자와 이성애자, 무슬림과 비무슬림, 부자와 빈민일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아시아인은 모두 자기를 혐오할까? 나를 갉아먹는 자존심이 인종적 현상이 아니라 그냥 나 개인의 빌어먹을 문제라면? “한국인들이 자기를 혐오하는 거지.” 함께 술 마시던 필리핀계 친구가 아시아인은 자기를 혐오한다는 내 말을 정정했다. “필리핀인은 별로 안 그래.”
내가 필리핀인도 아니고, 필리핀인 지인도 없어서 그 말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것만은 알겠다. 진짜로, ‘중국인’이 아시아인을 부르는 대유법이라고 생각하는 백인들이 많다는 것. 아시아가 다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작당모의까지 가세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도 음력 새해를 가리키는 말로 ‘Lunar New Year’ 대신 ‘Chinese New Year’를 쓰는 이들이 많다. 호주에서 정말 여럿 봤다.
저자는 또한 유명한 흑인 코미디언인 리처드 프라이어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면서 이렇게 느낀다.
프라이어를 보며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제도를 상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리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겟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백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이걸 읽고 나는 배우 산드라 오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를 받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점에 대해 한 말(참고)을 떠올렸다. 그는 자기가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불리한 상태에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며,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자라지 않아 소수 인종의 ‘멘탈리티’가 그에게는 없었다고 말했다. 오는 ‘동양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약점을 가진 소수자 중 소수자로서 그 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을 테다. 그러다가 봉 감독이 당당하게 그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그에게는 내가 내면화한 소수자의 부끄러움, 아시아인이라 열등하다는 생각 같은 것이 없구나’ 하고 깨달았을 것이다. 역시나 환경이 중요하다. 적어도 봉 감독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남성으로서, 자기보다 ‘높은’ 또는 ‘나은’ 다른 인종의 존재 없이 성장했을 것이다. 산드라 오도 한국에서 컸다면 적어도 ‘아시아인’이라는 부끄러움 또는 차별은 없었겠지. 하지만 여성이라는 굴레는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테니, 아 어쩌란 말이냐. 그것이야말로 피할 방법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집을 내고 시인으로 데뷔하자, 내가 무슨 글을 쓰든지 아시아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을 결코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육체의 개입이 없더라도 저자로서의 내 정체성은 귀신처럼 독자에게 내 목소리가 도달되는 강도와 범위를 제약했다. 내가 독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신이 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순진한가! 휘트먼 작품 속의 ‘나’가 다중을 담고 있다면, 내 작품 속의 나는 이 나라 인구의 5.6퍼센트를 담고 있었다. 가슴으로 진정하게 느껴지는 내용이라면 뭐든지 써도 좋으나 기왕 아시아인이 아시안에 관한 주제를 꾸준히 다루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독자, 스승, 편집자 등이 여러 방식으로 내게 조언했다. 아시아인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예컨대 자연에 관해 쓰면 자연에 관해서 쓰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할 테니 내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내 피부색은 내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닐 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 깊이 공감했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해 번역가 또는 편집자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는데, “휘트먼 작품속의 ‘나’가 다중을 담고 있다면”이라는 부분은 휘트먼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 부분에 작은따옴표를 넣은 것도 나다. 원문에는 없다는 얘기다. 이건 월트 휘트먼의 가장 대표적인 시 <Song of Myself>에 나오는 “I contain multitudes(내 안에는 많은 이들이 있다).”를 가리킨다. 시 속의 ’나‘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많은, 다양한 이들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걸 모르면 저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쏭달쏭해서 혹시 오역을 한 걸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걸 주석으로 달아 주면 좋았을 텐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전반적으로 번역이 크게 거슬린 곳은 없었으나, 딱 한 군데가 너무 형편없어서 화가 날 정도였다. 책 초반에 저자가 “아시아인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 맥락에서 “아시아인은 미안스러운 공간을 차지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두어 번 읽고 나서 원문을 찾아 확인해 보니 “Asians take up apologetic space.”라고 돼 있었다. 아시아인들은 공간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는 듯 아주 미안해한다는 뜻일 텐데 이걸 이렇게 써 놓다니 어이가 없었다. 직역을 해도 적당히 해야지.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들을 언급하는데, 이쪽에 배움이 짧은 나로서는 더없이 유용했다. 여기가 아니라면 내가 어디에서 김명미, 차학경(테레사 학 경 차), 영진 리 같은 이들의 이름을 들어나 보겠는가.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내가 차학경의 <딕테> 같은 어려운 작품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교육적이었다고 할까, 내 취향 100%의 글은 아니더라도 한번 읽어 볼 만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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