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내가 좋아하는 정세랑 작가의 친환경적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우주적 규모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주인공인 한아는 저탄소 생활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옷 수선집 주인이다. 그가 하는 옷 수선이란 일종의 재활용으로, 대개 아끼는 사람(고인이나 가족, 친구 등)의 옷을 리폼해 입으려는 이들의 옷을 새롭게 탈바꿈시켜 주는 일을 한다(참고로 아래 인용문에 나오는 ‘환생’은 한아의 수선집 이름이다).
환생은 큰길에서 먼 한가한 지역에, 약간 움츠린 듯 보이는 작은 벽돌 건물 일층에 있는 옷 수선집이었다. 수선을 한참 넘어가는 영역으로 들어선 지 오래지만, 딱히 또 수선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웠고 업사이클링이라는 말도 맞긴 맞지만 어쩐지 그러면 큰 단위로 뭔가를 해야 할 듯해서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환생—지구를 사랑하는 옷 가게’라는 간판은, 그래서 직관적인 듯도 아닌 듯도 했다. 창가에는 패스트패션이 얼마나 기이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환경을 망치고 있는지 한아 나름대로 설명해보려고 노력한 팸플릿이 놓여 있었는데 별로 가져가는 사람이 없어서 가장자리가 나달나달해지는 중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옷들을 새롭게 만들어드립니다’ 같은 손글씨 포스터들도 작게 벽에 붙어 있었다. 철저히 소문과 추천으로 굴러가는 사업인데도 망하지 않은 건, 해외에 있는 건물주가 월세를 올리는 걸 까먹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경민이라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 어딘가 한량스럽고 유성우를 보러 캐나다로 훌쩍 떠나버릴 정도로 여자 친구를 방치한다. 그래서 한아의 절친 유리는 그가 못마땅하다. 그런데 어느 날, 캐나다에서 돌아온 경민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한아를 아끼고 신경 쓰기 시작한다. 그뿐이 아니다. 예전에는 싫어하던 가지무침도 맛있게 먹고, 팔에 있던 큰 흉터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경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믿고 읽는 정세랑 작가라서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는 규모가 가히 우주적이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지만 읽고 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것이다. 이렇게까지 사랑받는 주인공이라니… 로맨틱하고 좋았다.
“경민아.”
한아는 익숙한 이름을 불렀지만 부를 때 이름의 주인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아에게 경민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처럼 여겨졌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이르는 말. 이제 그 사랑의 온전한 소유권은 이 눈앞의 존재에게 있었다. 언젠가 사라질 섬에서, 사라지지 않을 감정을 가지고 두 사람은 잠이 들었다. 경민은 인간처럼 잠이 드는 게 좋았다. 단순히 무의식에 접속하는 게 아니라, 정말 눈꺼풀을 감고 몸을 늘어뜨리는 행위를 모사하는 게 좋았다. 한아가 세상을 슬퍼하거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편안히 잠들면 그 풀어진 표정을 보는 것도 좋았고, 그럴 때마다 지구에 날아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엇다. 그리고 그 안도감 속에서 경민 역시 꿈결에 들어가면, 무의식으로 연결된 먼곳의 속삭임이 경민의 행운을 축하해주었다. 경민은 오만해질 정도로 행복했다. 부럽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얼른 달려가. 하얗게 타는 발자국을 남기면서 열심히 달려가란 말이다.
빠순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주영이라는 캐릭터도 있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성공한 덕후로 산다. 아폴로라는 가수를 만난 이후 그에게 자신의 삶을 바친다고 할까. 존경스럽습니다… 한아와 경민의 사랑뿐 아니라 주영의 사랑 역시 그 규모가 온 우주급이다.
“왜 그러고 사니?”
주영이 아폴로를 발견하고 나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을 정말이지 다채로운 톤으로 들어왔다. 영하 40도의 무시, 영상 23도의 염려, 70도의 흐느낌, 112도의 분노로.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어차피 다른 이의 세계에 무력하게 휩쓸리고 포함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살겠다. 그 세계만이 의지로 선택한 유일한 세계가 되도록 하겠다…… 주영의 선택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고민 없는 아둔한 열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명확한 목표 의식의 결과였다.
다 좋았고 재미있게 읽었는데 한아라는 주인공이 ‘친환경’이라는 소재와 단어를 인간으로 만든 것 같은 캐릭터라, 너무 이 어젠다를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해야 하나,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한아의 일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옷을 리폼해 주는 수선집 사장이자 디자이너이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저탄소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한아와 경민, 유리와 유리 남편, 이렇게 넷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런 대화도 나온다. “요새는 비건 레스토랑이 늘어서 좋죠?”, “사람들이 소고기만 안 먹어도 온난화를 늦추는 데 큰 도움이 될 텐데……”, “다 같이 채식하면 좋겠지만 기후 변화는 당장 막아야 할 문제니까, 밀웜이라도 본격적으로 먹으면 어떨까 싶어.” 그냥 짧게 지나가는 한 장면일 뿐이지만, 이런 사소한 데에서까지 너무 그런 걸 들이민다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정세랑 작가는 좋아하지만 비건 또는 비거니즘, 저탄소 생활에 대해 배우려고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행히 내가 보기에 그렇게까지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린 듯한 ‘저탄소 생활’을 해 나가는 인물을 소설 속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놀랍긴 했다. 약간 학습 만화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가다가 갑자기 ‘공부’적인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만났을 때의 위화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느꼈다. 그래도 우주적 사랑, 로맨스에 초점을 두고 있으면 그렇게 로맨틱할 수가 없는 소설이다. 우주적 사랑의 이야기를 읽고 싶을 때 한번 시도해 보시라.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감상/책 추천] 제넷 맥커디, <Half His Age> (0) | 2026.08.14 |
|---|---|
| [책 감상/책 추천]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0) | 2026.08.12 |
| [책 감상/책 추천] 샘 J. 밀러, <슈퍼히어로의 단식법> (2) | 2026.08.10 |
| [책 감상/책 추천] 트렌트 돌턴, <Gravity Let Me Go> (0) | 2026.08.07 |
| [책 감상/책 추천] 루스 웨어, <우먼 인 캐빈 10> (0) | 2026.08.03 |
| [월말 결산] 2026년 7월에 읽은 책들 (1) | 2026.07.31 |
| [책 감상/책 추천] 이유리, <기울어진 미술관> (2) | 2026.07.24 |
| [책 감상/책 추천] 곽미성, <외로워서 배고픈 사람들의 식탁> (0) | 2026.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