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문보영, <아무튼, 전화영어>

전화를 받기 싫어하는데 아침에 걸려오는 전화영어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가 있다? 그게 바로 이 <아무튼> 시리즈의 신작, <아무튼, 전화영어>의 저자 문보영 시인이다. 전화영어를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되었지만 영어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전화영어 선생님들을 부르는 통칭인) ‘수잔’들과의 추억은 많이 쌓였다.
고백하건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영어 실력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서툴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단순한 진심을 단순한 어휘를 사용해 말하는 게 좋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고 누군가 나의 불면을 걱정해주는 게 좋고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습니다. 수많은 수잔들(어쩌면 제게는 수백 명의 언니들이 있는 셈이군요)은 제가 이 더딘 말하기를 이어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죽었다 깨도 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겠지요. 그러니 앞으로도 무수한 수잔에게 기대어보렵니다. 영원히 혼자 탈 수 없는 자전거를 수잔이 뒤에서 잡아주는 게 좋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영어 실력이 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진단한다.
제 영어 실력이 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아서입니다(저는 전화 공포증이 있어서 벨 소리만 울리면 심장이 콩닥콩닥 뜁니다…).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어를 공부해야 할 뚜렷한 동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아침에 깨워줄 사람이 필요해서 전화영어를 시작했는데, 초기 론칭 가격이 워낙 저렴해서 멤버십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사이 플랫폼이 성장하면서 수업료가 다섯 배 이상 인상되었지만 저는 초기 프로모션 가격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한 달에 4만 원이 안 되는 금액이었으니 공짜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저는 전화를 받지 않거나 장기간 수업을 쉬는 등 꽤 불성실하게 지냈습니다. 이후 카드 정보를 변경하면서 그간 누리던 혜택도 끝나게 됩니다. 저는 전화영어 없이는 아침에 눈을 뜰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저자는 서른이 넘어 영문과 문예창작 석사 과정(MFA)을 밟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된다. 이때 전화영어가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좋았겠으나, 그 효과는 미약했다고 한다. 역시나 그 이유를 찾아 본 결과, 저자는 잠결에 전화를 받기 때문에 “빨리 질문에 답하고 다시 자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질문할 기회와 동기가 부족”했단다.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서는 적절한 질문이 서로 오가야 하는데 말이다.
(…) 하물며 평서문 끝의 억양만 올리면 의문문이 되기도 하는 한국어와 달리 영어는 문장의 어순이 완전히 뒤바뀌기 때문에(저는 이것을 ‘피부가 뒤집힌다’라고 표현합니다)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습니까? 가령, ‘I ate lunch today’를 의문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Did(조동사)+you(주어)+eat(동사원형)+lunch(목적어)+today(부사어)?
우선 동사가 ‘ate’에서 ‘did’와 ‘eat’ 두 개로 분리되는데 하나는 시제를 하나는 기본형을 표현합니다. 왜 동사는 영혼을 분리할까요? 여기에 의문 부사어까지 추가되면 뇌가 세 번 쪼개집니다. 개인적으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것은 전화영어가 아니라 영어라고 생각합니다….
‘피부가 뒤집힌’, ‘뇌가 세 번 쪼개진다’, ‘가성비가 떨어지는 것은 영어다’ 등 아주 주옥 같은 표현이 넘쳐난다. 어쨌거나 저자는 의문문 학습의 필요성을 자각했음에도 타성에 젖은 대화를 지속해 나갔고, 어느 날 “거기서 거기인 대화를 하는 것에 지친” 저자는 수잔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그리고 “친구랑 절교한 이야기, 전남편에게 복수한 이야기, 인생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 사고들, 망한 연애 이야기, 온갖 흑역사와 남몰래 하고 싶었던 자랑들” 등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저는 이내, 영어가 느는 구간은 의문문을 구사하게 되는 시점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궁금한 타인이 내 인생에 나타났는가?’ 그것이 열쇠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조금씩 의문문에 익숙해졌고 기초적인 의문문을 구사하기 시작했으며 학과 친구들에게도 다가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친구가 생겼냐고요?
그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미있고 공감했던 부분은, 저자가 MFA(예술 분야의 석사 학위)를 지원하며 받았던 거절 메일과 웨이트 리스트 메일을 분석한 꼭지였다. 거절 메일은, 어느 나라나 대체로 그렇듯, ‘지원해 주어서 고맙지만 유감스럽게도 너는 탈락이다. 행운을 빈다’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웨이트 리스트는 “불합격도 합격도 아닌 상태로, 합격자가 다른 학교로 빠지면 공석이 생길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웨이트 리스트 메일은 교수진이 직접 발송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불합격 통보 메일과 달리 친밀감이 느껴집니다. “Dear poet” 대신 실제 이름을 호명(“Dear Boyoung”)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웨이트 리스트의 본질이 ‘어장 치기’이기 때문입니다. 어장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통제된 친밀성’이지요. 관리당하는 쪽은 강한 친밀감과 희망을 느끼지만 관리하는 쪽은 거리를 유지합니다. 어장 관리자는 상대가 떠나지 않을 만큼만 여지를 주지만(“앞으로도 편하게 연락주세요. 작품 즐겁게 잘 읽었어요!”), 완전히 붙잡히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합니다(“분명한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기회가 열려 있으나 불확실한 상태,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을 연옥이라 불렀습니다.
웨이트 리스트의 본질을 ‘어장 치기’라고 보고,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애매한 상태를 연옥이라 부르는 이 미친 표현력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시인은 달라! 어쨌거나 저자는 다섯 대학 중 어느 곳에도 한 번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저자가 가고 싶어 하던 아이오와 주가 아닌) 미시간 주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 대학에서 연락을 받아 그곳에 입학하게 된다.
종이책 기준 154쪽의 얇은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가 전반적으로 전화영어에 대한 기억이라면 2부는 전화영어를 통해 만난 다양한 수잔들의 이야기, 그리고 3부가 그중에서도 제일 유난히 튀는 수잔이었던 ‘앤 무어’(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 소설 <앤 무어의 삶>에서 빌려온 가명)의 이야기이다. 이 앤 무어라는 전화영어 선생님이 아주 독특한 인물인데, 특이한 인물에 대한 연구라 봐도 좋을 정도다.
(…) 이제는 연락이 끊겼지만 문득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 사이트에 들어가 이름을 검색해보곤 합니다. 플랫폼에는 강사마다 강의 만족도와 후기가 공개되어 있는데 앤 무어의 평점은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후기는 대체로 정확했습니다.
▼이야기가 자꾸 본론에서 벗어나고 주변에서 개 짖는 소리와 잡음이 섞여 수업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
▼밝고 유쾌한 에너지를 지닌 분이지만 말씀을 너무 많이 하셔서 회화라기보다는 듣기 위주의 수업처럼 느껴졌습니다. ★★☆☆☆
▼영어 실력은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타갈로그어를 사용하십니다… ★☆☆☆☆
▼늦은 밤에도 활기찬 에너지로 수업을 이끌어주셨습니다. ★★★★☆
▼사전에 수업 자료를 정하고 뉴스를 읽기로 했는데 선생님이 본인 이야기만 하다 시간이 가기 일쑤였고 결국 제가 수업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
이 기가 막힌 인물의 이야기가 또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우니 꼭 한번 읽어 보시라.
역시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답게 이번 편도 좋았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AI 전화영어 광고가 많이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전화를 놓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전화영어를 지속하는 힘은 전화를 놓쳤을 때의 죄책감이기 때문에. 전화영어의 장수 비결은 미안함이다.”라고 평하는 저자라니. 문보영 시인을 알게 되어 기쁘고,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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