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Parini Shroff, <The Bandit Queens>

by Jaime Chung 2026. 8. 24.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Parini Shroff, <The Bandit Queens>

 

 

인도계 미국인 작가 파리니 슈로프(Parini Shroff)의 데뷔작. 여성주의, 인도의 현실, 남성의 (제도적, 물리적) 폭력, 여성의 연대 등등 정말 다양한 소재를 꽉 차게 담고 있어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기가 막히게 좋은 소설이다. 배경은 인도의 구자라트 주. 이 동네에는 기타(’guitar’가 아니고 ‘Geeta’, 인도식 이름이다)가 자기 남편 라메쉬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하지만 그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던 남편은 5년 전, 어느 날 그냥 사라져 버렸다. 기타는 굳이 틀린 사실을 정정하려 하지도 않고, 동네의 다른 여자들과 마이크로크레딧 그룹(아래에서 설명할 예정)에 가입해 결혼식용 목걸이를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해 나가며 혼자 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마이크로크레딧 그룹의 일원인 파라가 찾아와 자기 남편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데…

 

일단 여기서에서 시작하자. 애초에 기타는 남편 라메쉬를 죽이지 않았다. 라메쉬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을 뿐인데 동네 사람들은 그가 남편을 죽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는 굳이 오해를 적극적으로 바로잡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보다 남편을 죽인 여자가 훨씬 강력한 존재로 여겨지고, 그런 소문이 그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불쌍한 존재가 되지만, 남편을 죽였다고 소문난 여자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니까! 즉, 사회가 만들어낸 평판이 기타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유를 준다는 역설인 것이다.

 

기타는 인도에서 ‘밴디트 퀸’으로 잘 알려진, 실존 인물 풀란 데비(Phoolan Devi)를 롤 모델로 삼는다. 저자는 그의 삶을 자서전과 평전을 참고해 가며 되도록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는데, 워낙에 살아온 인생이 드라마틱해서 실제 사실만 말해도 (나처럼) 그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이라면 무척 놀랄 것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는 다코잇(dacoit) 계급 출신으로 인도의 (여성) 로빈 후드, 임꺽정 같은 인물이다. 그는 고작 11살의 나이에 여러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갱단에 합류했다. 그는 강간범들을 처벌하고, 하층 계급의 영웅이 되었다. 후에 11년간 복역하고, 결국에는 인도 연방 의원 하원 의원에도 당선되었으나, 2001년에 암살당해 사망했다(위키페디아 페이지 참고). 기타는 풀란 데비의 사진을 집에 붙여 놓고, 힘과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기타를 비롯해 파라(가장 먼저 기타에게 자기 남편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러 온다), 살로니(기타와 어릴 적 친구였는데 기타가 결혼한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다), 프레이티와 프리야(둘은 쌍둥이 자매다), 이 다섯 여성이 같은 마이크로크레딧 그룹이다. 마이크로크레딧은 은행을 이용할 수 없는 저소득층, 빈민층에게 무담보로 소액을 대출해 주는 제도다. 다섯 명이 한팀이 되어, 어느 한 명이 대출금을 갚을 수 없을 때 다른 네 명이 연대 보증식으로 그 금액을 메꾸게 되어 있다. 이 다섯 여자들은 좋든 싫든 연대해야만 한다. 파라가 기타에게 자기 남편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러 왔을 때 내세웠던 근거도, 자기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자기와 아이들을 때리며 자기가 벌어온 돈을 빼앗아가니, 그 남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어서 상대적으로 먹고살 여유가 있는) 기타가 그 부족분을 채워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제도는 이중성을 보이는데, 일단 돈을 빌린 여성 입장에서는 ‘돈을 빌려 사업을 하고 자기 돈을 버니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경제적 독립을, (이론적으로나마) 가능하게 한다(물론 실제로 이렇게 해서 여자가 자기 사업을 해서 벌어온 돈을 빼앗거나, 애초에 그 마이크로크레딧을 노리고 여자로 하여금 대출을 신청하게 하는 남자들의 케이스도 보고된 바 있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는 ‘한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생기니 서로를 감시하고 압박해야 한다’라는, 서로에 대한 의존을 만들어낸다. 여성의 독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오히려 여성들을 서로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점은 내가 이제 곧 서술할 여성 연대와 연결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순히 서로를 도와주는 ‘착한’ 인물들이 아니다. 파라는 기타의 ‘도움’을 받아 남편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태도를 바꾸어 기타에게 ‘네가 내 남편을 죽였다고 소문내겠다, 그게 싫으면 나에게 매주 돈을 바쳐라’라며 돈을 요구한다. 살로니는 기타와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기타가 라메쉬와 결혼하게 된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다. 라메쉬가 (솔직히 예쁜) 살로니보다 기타를 좋아하는 게 질투나서라고 기타는 오해했기 때문이다(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까지 스포일러하지는 않겠다). 어쨌거나 둘의 관계는 단절됐고, 기타는 남편을 잃은 것보다 친구를 잃은 데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즉, 이 소설에서 여성을 규정하고 상처 입히는 것은 남성만이 아니다. 여성들 역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오해하고, 이용한다. 또한 동시에, 결국 여성을 구하는 것도 여성이다. 여성들은 서로 돈 때문에 의존하고, 서로를 감시하고, 협박하고, 이용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돕는다. 이것은 “여자가 여자를 돕는다”라는 페미니즘의 예쁘고 단순한 문구로 설명할 수 없는 연대이다. 기타, 파라, 살로니, 프레이티와 프리야는 서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연대한다. 그리고 그 필요에서 출발한 관계가 진짜 우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실제로 마이크로크레딧 그룹은 매번 대출금을 갚는 자리에서 서로를 돕겠다는 약속을 (처음에는 정말 진심 없이, 영혼 없이) 읊는데, 이 약속이 점차 남성의 폭력과 억압에서 서로를 구하는 여성들의 결속으로 변해 간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 “The Bandit Queens”와도 연결된다. 단수형 ‘밴디트 퀸’이 아닌 복수형으로!

 

소설 속 여성들의 남편은 단순히 ‘나쁜 남자 한 명’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남성 권력을 보여 준다. 가장 흔한 게 폭력과 음주이고, 경제적 착취, 성적 폭력, 외도, 심지어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성폭력까지 있다. 이걸 단순히 ‘여자들이 주인공이니까 남자 캐릭터들을 못되게 설정했겠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건, 박완서 선생님 말씀대로, “리얼리즘”이다(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다면 이걸 참고하시라). 왜 이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가? 내가 가장 분노했고 답답했던 건 프레이티의 경우다. 프레이티와 프리야는 앞서 말했듯 쌍둥이 자매인데, 둘이 열여섯 살이던 시절, 프리야에게 구애했다가 차인 남자가 분노해서 프레이티에게 염산을 뿌렸다. 원래는 프리야에게 뿌리려고 한 건데, 프레이티가 가게에서 나오는 순간 남자가 그를 프리야로 착각해서 프레이티가 피해를 입은 것이다. NGO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았으나 프레이티의 얼굴에는 당연히 화상 자국이 남았고, (여기서부터가 진짜 제일 빡치는 점인데) 2년 후에 그 남자는 자매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프레이티와 결혼했다. 왜냐고? 딸 얼굴이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 다른 어떤 남자가 프레이티를 원하겠는가. 그 남자는 그래 놓고 이제 자기 아내(가 된 여자) 얼굴에 그런 지독한 짓을 했으니 카르마 때문에 벌을 받아 다음 생에는 딱정벌레 따위로 태어날까 봐 벌벌 떤다. 그래서 프레이티에게는 온갖 달콤한 말을 하면서 다정한 남편인 척 군다. 기타가 파라를 도와 그의 남편을 살해하는 데 성공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레이티도 기타에게 도움을 청한다. 기타는 처음에 프레이티는 자기 말을 잘 듣는 남편을 왜 죽이고 싶어 할까 의아해하는데, 프레이티는 여전히 그를 용서하지 못했고(당연하다, ‘나에게 이런 일만 안 일어났어도 내 얼굴은 저랬겠구나’ 하고 상기시켜 줄 쌍둥이 자매가 있으니까) 심지어 그놈은 기타를 성폭행하려 든다. 기타는 살기 위해 프레이티의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소설 속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그래서 처벌받지 않는 남자는 살로니의 남편(애초에 언급도 별로 없음)과 카렘(아내를 암으로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홀아비, 기타와 로맨스가 있다), 이 정도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큰 축은 인도의 현실이다. 가부장제, 가정 폭력, 카스트, 지참금, 종교적•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 여성의 경제적 종속, 농촌의 빈곤, 사법•공권력의 한계 등등. 이것까지 다 다루면 글이 엄청 길어질 테니 이쯤 해 두겠지만, 이 모든 걸 다 담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저자는 이걸 ‘인도의 비참한 현실’이라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여 주지는 않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싸우고, 욕하고, 농담하고, 장사하고, 살인도 저지르고, 연대하고, 실수하고, 서로 뒤통수도 치고, 도우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이 여성들을 ‘억압받는 인도 여성’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어 넣을 수 없다. 기타, 파라, 살로니, 프레이티와 프리야,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며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까지, 전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기타가 원했던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혁명도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그냥 냉장고를 가지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의 독립은 거창한 페미니스트 선언문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내 돈으로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사고 싶다’라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듯, 여성의 사회적 해방은 반드시 거대한 혁명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자기 돈으로 냉장고 하나를 사고 싶다는 아주 사소한 욕망에서 시작된다.

 

아, 소설 곳곳에 인도의 문화와 언어가 많이 배어 있는데, 예를 들어 여자들끼리 ‘언니’라고 하듯이 존경과 애정을 담아 이름 뒤에 붙이는 ‘-ben’이라는 접사(남자의 경우 ‘오빠/형’이라는 뜻의 ‘-bhai’) 같은 게 정말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살로니는 ‘panchayat’이라는, 일종의 마을 자문 위원회에 속해 있다(아버지가 그곳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자기 편을 한 명 더 들이려고 자기 딸인 살로니까지 앉힌 것이다). 기타는 종종 ‘churel’이라는 인도 여자 귀신 취급을 받는다. 남아시아에서는 여자가 아이를 낳다가 죽거나, 억울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당했을 때 ‘츄렐’이라는 여자 귀신으로 변한다고 믿는다나. 이 츄렐은 추하고, 가슴도 처지고(이런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낸 게 남자인 게 분명하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무엇보다 발이 뒤로 돌아가 있다고 한다. 또한 소설 속에서 여러 번 언급되듯, 인도의 유부녀들은 (책 표지 그림처럼) 코에 코걸이를 한다. 이걸 뺀다는 것은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었다는 뜻. 이렇게 몰랐던 인도 문화를 책을 읽으며 많이 배웠는데, 사실 내가 배운 건 전체의 절반이나 되려나. 내가 놓치고 넘어간 것도 무척 많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개성 있고 탄탄한 여성 캐릭터들, 유머, 사회적 문제 의식 등 정말 매력이 많은 소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The Bandit Queens>는 남편을 죽이는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삶을 되찾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후반부가 초반의 강력한 설정만큼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는 이들도 있는데, 나도 사실 쪼오끔 동의한다. 후반을 못 썼다기보다는, 엔딩에 기타와 라메쉬 말고 다른 여성들이 좀 더 많이 보였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달까. 그렇다고 기타가 라메쉬에게 돌아간 거 아니고 꽉 닫힌 해피 엔딩이니까 관심이 간다면 꼭 시도해 보시라. 여담이지만, 작가 파리니 슈로프는 변호사면서 MFA도 하고 이렇게 기가 막힌 소설을 데뷔작으로 써 냈다고 해서 여러 모로 부러웠다… 추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