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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서귤, <채달금전>

by Jaime Chung 2026.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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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서귤, <채달금전>

 

 

내가 좋아하는 서귤 작가님의 최신작!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채달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의 이야기이다. 시대는 조선 말기. 명성 황후를 호위할 궁녀를 뽑는 선발전이 열리고, 여기에 참여한 조선 최고의 무인들, 그러니까 조삼덕, 김응점, 고대수 같은 여인들 사이에 끼어든 소녀가 있으니 이름하여 채달금. 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잔꾀와 눈치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 그는 세 치 혀와 잔머리로 호위 궁녀 선발전을 헤쳐 나가는데…

 

이걸 ‘판소리 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서술자의 어조가 굉장히 판소리 같기 때문이다. 이걸 보시라.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고종 대왕 즉위 초에 흉년이 이어지고 탐관오리 판을 치니 골목마다 울음소리, 집집마다 원망 소리, 애타는 한숨 소리 끝이 없어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풀칠하기도 분주한데 서양 오랑캐까지 몰려오니 깽깽이 굿판이 무시로 성황이라. 강화에서 펑펑펑, 대동강서 우르르, 인천에서 꽝꽝꽝, 요새 같은 함선에서 천둥 같은 대포가 쏟아지매 애꿎은 백성들만 터져 죽고 맞아 죽고 치여 죽고 베여 죽고 구르다 죽고 내빼다 죽고 자빠져 죽고 놀라서 죽고 트림하다 죽고 딸꾹질에 죽고 콧구멍 구석구석 파다 죽어, 시체 더미가 태산을 이루어 하늘에 닿으니 죽음이 모래만큼 흔한 시대라.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정말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말맛이 있다.

팔도가 들썩들썩 집집이 와글와글. 신분 불문, 가문 불문, 연령 불문, 외모 불문, 오직 용맹과 충심, 두 가지만 보고 호위 궁녀를 뽑는다고 하니 힘깨나 쓰는 여인들이 그 아니 반길쏘냐. 왕비의 최측근이 되어 팔자 한번 고쳐보자며 너도나도 양눈을 번뜩이는 통에 흐린 날에도 조선 하늘이 내내 밝았다더라. 약속된 모월 모일 광희문 앞뜰 보소. 여인 옆에 여인 옆에 여인 옆에 여인이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여인들의 인산인해. 대체 어떤 사연들이 모였는가 살펴보면, 밭 갈던 농촌 부인, 산 타던 약초 부인, 물질하던 잠녀 아이, 새초롬한 양반 아씨, 목소리 큰 시전장사, 팔뚝 굵은 방물장수, 서방질에 이골이 난 과부부터 저승길을 잘못 찾은 노파까지, 대중도 없고 어림도 없는 여인네들이 서로 간에 밀고 밀리며 철썩철썩 사람 파도가 출렁이는구나.

 

다만 판소리에서 종종 그러듯 저속한 농담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이 판소리체가 취향이 상당히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티격태격하는 대화 같은 거다. “두 무리가 싸우는 틈을 노려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소. 여부지리란 말이 괜히 있겠습니까.” “여부지리 아니라 어부지리겠지. 멍청아. 어부한테 여보라고 할 년이네.” 저속한 말투가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취향 존중합니다.

 

소소한 개그는 그래도 통하지 않을까? 이런 거.

그렇게 반나절이나 지났을까. 광희문 앞 높다란 단상 위에 까만 벙거지를 눌러쓴 군사가 나타나 소리치길,
“모두들 정숙하거라!”
이름이 정숙인 여인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좀 조용히들 하라고!”
이름이 조용인 여인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에잇, 육시럴 년들. 입 좀 닥쳐!”
이름이 육시럴인 여인은 없던 탓에 들렸던 손이 내려가고 간신히 소란이 줄었다. (후략)

아니면 나는 이런 것도 웃겼다.

고대수가 진정하라는 뜻으로 호명하자 돼지코가 콧구멍을 샐룩였다. 꼴에 이름은 멀쩡하다. 화를 누르지 못한 채달금이 씩씩대며 좌중에게 쏘아대길,
“너희들이야말로 반의 반의 반의 반푼이들이다.”
가만히 있다가 십육 분의 일푼이가 된 동료 여인네들은 눈알만 뒤룩뒤룩, (후략)

 

대단한 영웅도 아니고 잔머리와 말발로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조그만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서귤 작가님이 한국 문학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오랜 숙원을 여기에서 푸신 게 아닐까… 근데 작가님, 저 아직 <급발진> 후속작 기다려요ㅠㅠ 이거 시리즈 각이었는데… 저는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 저 여기 누워 있을게요, 밟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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