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삶에 도움이 되는 철학 개념들을 알아 보자는 아주 실용적인 목적으로 쓰였다.
그래서 그 유명한 칸트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책에서는 배제되었다. 칸트와 그의 철학은 분명 철학사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그의 정언명령은 현재 우리가 보기엔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어쩌라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라는 아웃풋이 아니라 칸트가 그 결과를 낸 사고 과정, 즉 프로세스를 보아야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철저히 실용성 위주로 쓰인 책이기에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제나 흔히 한 번쯤 해 볼만한 고민에 힌트를 주는 꼭지가 많다.
요즘 내가 일로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그런지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라는 개념이 내게는 좋은 의미로 충격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 둘 다 '아이덴티티'와 관련돼 있지만, 파라노이아는 아이덴티티에 집착하고 천착해 그것을 꼭 붙잡는 반면, 스키조프레니아는 하나에 아이덴티티에 자신을 대응시키지 않는다.
과거의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 등의 연속성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순간의 느낌, 생각, 기분에 따라 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파라노이아는 한곳에 터를 잡고 오랜 시간 동안 살아 온 터줏대감이고, 스키조프레니아는 바람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떠도는 떠돌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파라노이아는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평생 직장' 의 개념도 희박해졌고 변화도 여느 때보다 더 급박하고 크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 단 하나의 직업, 단 하나의 정체성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사다 아키라가 지적한 두 번째 핵심은 도망친다는 점이다. 아사다 아키라는 파라노이아형을 정주하는 사람, 그리고 스키조프레니아형을 도망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정주하는 사람에 대치시키면 이주시키는 사람이라든가 이동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사용했다. 이 지적은 매우 예리하다. '도망친다'는 '딱히 명확한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벗어나겠다'를 뜻한다. 이 뉘앙스, 즉 '반드시 분명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이곳은 위험할 것 같으니 일단 움직이자'라는 마음 자세가 스키조프레니아형 인간의 특징이다. (...)
중요한 것은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재빨리 도망치는 일이다. 시선을 응시하고 귀를 기울여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라. 앞서 언급한 아사다 아키라의 발췌에서는 "의지가 되는 것은 사태의 변화를 인식하는 센스, 우연에 대한 직감, 그뿐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세계의 리더들은 왜 직감을 단련하는가>에서 "축적형 이론 사고보다 대담한 직감이 중요하다"라고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위에서 아직 괜찮다고 안심시키더라도 스스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도망쳐라. 이때 중요한 것은 위험하다고 느끼는 안테나의 감도와, 도망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다. 사람들은 으레 착각하곤 하는데, 도망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용기가 있기에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
다른 수많은 사람이 "일단 이 배에 탄 이상 마지막까지 애써 봐야지!"라고 벼르고 있을 때 "나는 이 배와 함께 가라앉을 생각이 없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나서 도망치려면 얼마민큼의 용기가 필요할지 상상해 보자.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를 대비시켜 보면, 후자는 전자보다 경박하고 나약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재 세계에서는 용기와 강인함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파라노이아 유형을 지향하고, 용기와 강인함을 지닌 사람만이 스키조프레니아 유형의 인생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다.
나는 이 말에 감동을 큰 받았다. 이 꼭지는 심지어 제목도 끝내주게 멋지다. "재빨리 도망칠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
그래, 즐겁지 않으면 떠나야지. 들뢰즈는 파라노이아는 무성한 나무(트리), 스키조프레니아를 뿌리(리좀)에 비유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인간은 땅에 뿌리가 박힌 나무가 아니니 지금 있는 곳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냥 그곳을 떠나라고, 그래도 된다고 말이다.
'브리콜라주'라는 개념도 내게는 위안이 되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남미의 마토 그로소(Mato Grosso) 원주민들을 연구하여 저서 <슬픈 열대>에 소개했다. 원주민들은 정글 속을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하면 그 시잠에서는 어디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무언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 물건을 자루에 넣어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주운 '뭔지 잘 모르는 물건'이 나중에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한 일도 있기에,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 능력이 공동 사회의 존속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신기한 능력, 즉 주변에서 발견하는 뭔지 잘 모르는 물건을 비예정조화 차원에서 수집해 두었다가 여차할 때 요긴하게 활용하는 능력을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라고 명명하고, 근대적이고 예정조화적인 도구의 조성과 대비해 고찰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예정조화적인 사상(용도 시장을 명확히 하고 나서 개발에 착수하는 사고관을 지닌 유파)보다 더 기개 있고 유연한 사상을 내세웠다. 실은 전형적인 근대 사상의 산물로 여겨지는 기술 혁신에서도 브리콜라주의 사고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실제로 축음기나 항공기 외에도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만들어 봤더니 나중에 막대한 가치를 생성해 냈다'는 식의 발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도대체가 쓸모도 없고 그저 힘들기만 하다고 느껴지는 이 시간도 어쩌면 브리콜라주가 아닐까. 언젠가는 이 경험이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오겠지. 그렇게 믿는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았던 꼭지 하나만 더 소개하자면 앨런 케이(Alan Curtis Kay)의 미래 예측에 관한 꼭지다.
컴퓨터 과학자 앨런 케이는 1972년에 저술한 논문 <모든 연령대 어린이들을 위한 컴퓨터>에서 현재의 태블릿 PC 비슷하게 생긴 것의 그림을 그려 소개했다.
그렇다면 그가 미래를 예측해 "아, 앞으로 기술이 발전해 이렇게 작고 가벼운 PC가 보급되겠군!" 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이런 게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고 그린 후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한 거란다. 놀랍지 않은가.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이라는 앨런 케이의 말(이자 이 꼭지의 부제)이 정말 천재성으로 번득이는 듯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그렇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라고 남에게 질문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어떻게 만들고 싶은가?라고 자문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렇게 실용적이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철학책은 또 오랜만이다. 처음에는 '음, 글쎄...' 하고 읽다가 중후반부터 무릎을 탁 치는 꼭지들을 발견해 아주 유용하게 잘 읽었다. 삶의 고민을 철학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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