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곽경훈, <의사가 뭐라고>
저자는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로, 이 책은 그의 '응급실 관찰기'이다.
그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편이라 사람들이 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는 잘 예측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공감하지는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적어도 응급실 의사로 일하는 데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라고 쓴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자신의 레이더망 안에 들어온 모든 인물,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냉철하게 묘사한다.
의사는, 특히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는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선입견을 경계해야 한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응급실에서 행패를 부리는 주정뱅이가 어느 날 응급실에 와서 정말이지 알 수 없는 황당한 얘기를 횡설수설하며 비틀거린다면 예전처럼 단순히 술에 취했을 수도 있지만, 고령이나 간경화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경막하 출혈이 생겼을 가는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며 '심리적 원인으로 인한 과호흡'의 전형적 증상을 호소하는 비교적 건강한 젊은 성인은 단순한 '심리적 원인으로 인한 과호흡'이 아니라 발작성 심실성 빈맥(PSVT)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환자와 보호자에 대해 선입견을 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일하다 보면 선입견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질환과 연관된 선입견뿐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에 관해 갖는 선입견도 무시할 수 없다. 남루한 옷차림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나타나는 보호자에게도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응급실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사람을 통해 '내가 간다, 나의 소중한 가족이 간다'라며 알려오는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선거로 뽑힌 선출직 공무원이나 그런 선출직 공무원을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하는 사람들, 대기업 간부, 노조 임원, 대기업 1차 하청업체 사장 같은 사람들이 지인이나 아랫사람을 시켜 '가고 있으니 준비하라'는 얘길 전하면 그들의 바람과 달리 엄청나게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긴다.
이 에세이를 읽다 보면 저자의 '말발'이 세다는 생각이 들며 약간 겁이 날 정도다.
아무리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조금 더 말투를 유창하게 들리도록 만들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한들, 이렇게나 '세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예컨대, 내과 당직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환자 입원 의무를 꺼려 하며 (전화를 건) 저자에게 까칠하게 구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식이다.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혹시 제가 저도 모르게 영어나 독일어 혹은 라틴어로 얘기했나요? 선생님 수준을 고려해서 분명히 한국어로 얘기했는데 왜 그렇게 물으시죠?"
또는, "어디가 아픈지, 무엇이 문제일 것으로 추정되는지, 왜 입원하는지 이미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구 중구난방으로 중언부언하진 않았습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충분히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못 알아들으신다니 이해할 수 없군요."
놀라운 건 이게 "기분이 안 좋긴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화를 낸 건 아닌" 수준의 말투라는 것.
"왜 이런 대화가 오가는지 제가 아니라 선생님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본인이 병원에서 진료하며 어떻게 행동했는지, 응급실에서 연락 왔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돌이켜보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모르겠으면 거울을 보고 거기 비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죠."
와, 무서워... 저자는 자기가 '싸움꾼'이라는 사실에 남들이나 자신이나 대부분 동의한다고 밝힐 정도다.
그러니까 "선생님, 저한테 시비 걸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세요. 다만 마음 굳게 먹어야 할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배우신 분이라 쌍욕 한마디 안 하시면서 말로 잘 때리시네. 사실 이 말투가 무섭긴 한데 그래서 이 책이 더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가 아마 밀리터리 덕후인 듯,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제2차 세계 대전 같은 전쟁 이야기가 종종 응급실의 상황을 빗대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응급 상황에서 다른 의사나 간호사들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또한 환자에게 적절한 처방을 내리지 못하는 당직 의사를 '형편없는 지휘관'에 비유하는 식이다.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맞이하는 응급 상황은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와 비슷하다.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오는 긴장된 상황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대담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을 단순히 흥분해서 고함지르는 것과 착각하는데, '권위의식 가득한 꼰대 놀음'을 '카리스마 넘치는 행동'이라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판단이다. 소리 지르고 화낼 필요가 있다면 당연히 소리 지르고 화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한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각자 할 일을 명확히 지시하는 것이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 환자는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건 얼마나 허탈한 감각일까.
고대 희랍 신화의 카산드라가 딱 의사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분명히 지금 당장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예후가 나쁠(=곧 사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왜 그리 의사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지.
예컨대 책에서는 자진 퇴원 서약서까지 필요가 있겠느냐던 뱃사람 환자의 경우가 나온다.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뱃일은 고사하고 2층도 계단으로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안 좋아질 수 있는데, 환자는 '며칠 뱃일 좀 보고 부산에서 (치료를) 하겠다'고 느긋하게 받아들인다.
이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걸까, 아니면 상황의 심각성을 정말 (의사가 자세히, 무서운 말로 설명해 줘도) 모르는 걸까.
읽는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직접 그걸 대면하는 저자 본인은 어떨까 싶다.
의사는 어디까지나 선택 가능한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또 그런 해결책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의학적 사항에 관해 설명할 뿐이다. 최종 선택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심지어 무서운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지켜볼 때면 착잡한 기분이 들 따름이다.
나는 병원에 갈 일이 없어서 모르지만, '질병은 개인의 얼굴을 지운다'라는 제목의 꼭지의 첫 문단만큼은 정말 공감했다.
질병은 인간에게서 육체적 강건함만 앗아가는 게 아니다. 질병은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죽음을 재촉하며 정신을 좀먹을 뿐만 아니라 질병에 걸린 인간의 외모조차 비슷하게 만들어 개인이 지닌 독특하고 찬란한 특징만큼 빼앗아간다. 감기나 장염 같은 짧게 앓고 지나가는 경증 질환은 예외지만 중증 질환이나 만성 질환은 그 질환에 걸린 환자 특유의 외모가 존재한다. 이런 질환에 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누구든 외모에서조차도 개인의 특징이 사라져 '환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다.
노란 얼굴과 볼록 나온 배, 근육이 사라져 볼품없이 쪼그라든 앙상한 팔과 다리는 만성 간 질환을 의미하고, 까맣고 탄력 없이 거친 피부와 날카로운 빛을 잃어가는 눈은 만성 신부전 환자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어쩜 그리 다 각자 독특하게, 자신만의 개성이 있게 생겼는지 구경만 해도 신기한데, 오래 투병을 한 사람을 보면 솔직히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듯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던 거다. 슬픈 사실.
바쁘고 정신없고 조금도 쉴 틈 없는 응급실에서 환자와 동료 의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날카로운 필치로 묘사하는 에세이를 찾는다면 이 책이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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