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고, 자고, 읽고 (241 Page) :: 먹고, 자고, 읽고 먹고, 자고, 읽고 (241 Page) :: 먹고, 자고, 읽고

[영어 공부] In for a penny, in for a pound(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며칠 전 게임을 하던 중에 친구에게 게임 내 1차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다음 목표까지 달성하겠다고 했더니, 친구는 "In for a penny, in for a pound, heh?"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케임브릿지 사전에는 "something you say that means that since you have started something or are involved in it, you should complete the work although it has become more difficult or complicated than you had expected(어떤 일을 시작했거나 연루되었으므로 기대한 것보다 더 어렵거나 복잡하다 하더라도 그 일을 끝내야 한다는 의미의 말)"라고 나와 있다.

즉, 우리 말로 하자면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라는 의미이다.

이 말의 유래를 찾아보니, 옛날 영국에서는 1페니를 빌리나 1파운드를 빌리나 돈을 안 갚았을 때(또는 훔쳤을 때)의 처벌은 똑같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러나 저러나 똑같은 처벌을 받을 거면(같은 갚이면 다홍치마라고^^) 큰돈을 빌리는/훔치는 게 이쪽에서는 이익이니까.

Phrases.org.uk에서는 이 표현에 대해 "It suggests that, if one is decided to do something, one may as well do it wholeheartedly(어떤 일을 하려고 결정했으면 전력을 다해 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라고 풀이한다.

게임을 하던 중에 나온 말이니 "켠 김에 왕까지"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 그건 좀 오버 같지만, 어쨌든 친구 덕에 좋은 표현을 배웠다.

 

 

 

 

[웹툰 감상/추천] 골드키위새, <죽어도 좋아>

주인공 이루다는 악덕 상사 백 과장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 시대 평범한 직장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회식 자리에서 진상을 부리는 상사를 향해 '죽어 버리면 좋겠다'고 저주한다. 그 때문일까, 잠시 후 백 과장은 어이 없게 죽는다.

놀란 것도 잠시, 눈을 떠 보니 다음 날이 아니라 백 과장이 죽은 회식 날이다. 어제가 반복되는 것이다.

똑같은 하루를 사는 것도 싫고, 백 과장이 죽는 걸 봐야 하는 건 또 양심에 찔리고, 게다가 은근히 잘되어 가는 사내 썸남과의 관계를 이어 나가려면 이 타임 리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연 이루다는 악몽 같은 하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음 감상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웹툰을 보고 감상문을 쓰는 건 처음이지만 이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 몇 안 되는 웹툰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굳이 유료 결제까지 해서 본 작품이다.

게다가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 주는 작품이라 감상문을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의 중의적 의미와 기본 설정 자체가 흥미로웠다.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상사가 누구나 한 명쯤은 있을 테니까.

그런 악덕 상사를 몇 번이고 죽여 주는 이 대리 경험은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그러나 이 웹툰의 의미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인격 살해적 막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타인을 배려하는 '좋은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고찰했다는 데 있다.

백 과장 본인이 자신이 타인에게 욕을 먹을 짓을 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착해져야 타임 리프가 끝나고 소멸된다는 엔딩도 좋았지만 역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루다가 백 과장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게 정말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백 과장이라는 캐릭터가 겉모습도 준수하고 또 '포메라니안'으로 변신한 모습은 참 귀여워서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백 과장이 마음을 바꾸어 먹고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유로 루다가 갑자기 강 대리와 헤어지고 백 과장과 이어진다?

극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러면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흐려져 버린다.

백 과장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루다를 사랑하니까 루다도 그를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지구에서의 경험을 통해 '아무리 애틋하고 따뜻한 감정이라 해도 그게 언제나 보답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잘 알지 않나.

천국에서는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여기 지구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안전 이별'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지금 이 시대에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감정이 통하지 않았을 때 그걸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까지를 말한다.

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을 했는데 이를 받아들여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칼을 휘둘렀다거나 황산을 뿌렸다는 등, 신체적 피해를 입혔다는 기사를 우리가 종종 보지 않나.

자기 감정이 거절당했을 때, '감히 네(=여자)가? 네까짓 게 나를 거절해?' 하고 욱한 것인데, 이거야말로 여자를 얼마나 무시하는 행위인가.

내(=남자)가 누구를 좋아하면 그 사람은 꼭 그걸 받아 줘야 하나?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웹툰을 보면서 백 과장이 착해졌으니 이루다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여성을 마치 착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는 거나 다름없다.

사실 이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선녀와 나무꾼' 같은 동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꾼은 사슴을 살려 주는 착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선녀를 얻게 된다.

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동화에서 주인공(남자)은 이러저러한 큰일을 해내고 '그 보상으로' 공주와 결혼해 왕이 되거나 행복하게 산다.

이 과정에서 여자의 감정은 요만큼도 고려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가.

 

인터넷 좀 하신다, 또는 요즘 영어 슬랭 좀 아신다 하는 분들이라면 'friendzone'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거다.

 

만약 당신이 남자고 짝녀를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했다고 하자.

그녀는 고마워하며 말한다.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귄다.

즉, 한 남자가 여자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을 보이는데, 여자는 그를 그냥 '좋은 친구'로 생각하며 그저 친구로만 대한다. 바로 이럴 때 그가 'friendzone'에 있다고 말한다.

상황은 웃퍼 보이지만 사실 이건 여성 혐오적인 말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어서 잘해 줬다고 해도, (앞에서 한 말이지만) 그 사람이 내 감정을 받아 줘야 할 의무는 없다.

그건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내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똑같은 진실이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흔히 여자에게 '잘해 주면'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게 되고, 자기 고백을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잘해 준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모르겠고, 또 이걸 받는 상대방도 '그가 나에게 잘해 줬다'고 여길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일단 뭐 늦은 밤에 집에 데려다 주거나 여자가 구두를 신은 날에는 오래 걷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도움을 베푸는 행위는, 그냥 본인이 인간이고 상대가 인간이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면 울부짖지 않고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 소통을 하는 것처럼. 누가 나에게 '너, 늑대처럼 울부짖지 않고 말을 하는구나.' 하고 나에게 칭찬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누가 나에게 그랬다면 나는 그 사람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내가 인간인데 당연하지.

그런데 왜 인간이 같은 동료 인간에게 해야 하는 그 친절함과 배려를 남에게 보였다고 해서 당연히 상대방의 마음을 보상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상대방이 나를 좋아해 주면 좋고 감사한 일이지, 당연한 게 아니다. 그런데 특히 남자들은 '내가 이러이러한 행위를 하면 여자가 나를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는 남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상대방은 내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나를 거절한다.

이러면 물론 실망하고 마음이 아플 수는 있다. 하지만 여자는 '친절함'을 주입하면 '마음'을 내어주는 자판기가 아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보상물을 빼앗긴 게 아니다. 그녀는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한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백 과장이 이루다를 사랑했지만 이루다가 그가 아니라 강 대리와 결혼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이 웹툰을 읽어 나가며 백 과장과 이루다가 이어지기를 바랐을 수는 있다. 팬이니까. 우리 독자들은 백 과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좋은 사람으로 거듭났는지 알고, 또 그에게 감정적으로 이입을 하게 됐으니까.

그러나 둘이 이어지기를 '바란' 게 아니라 '당연히' 이어지기를 기대했다면, 그건 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전반적으로 시즌 3 중반까지는 이루다가 백 과장과 얽히되 어디까지나 루다가 메인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강한 상태로 진행되었는데 시즌 3 후반에는 백 과장이 어떻게든 루다를 살려 보려고 현정이도 만나 보고 강 대리랑 얘기도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즉, 백 과장이 '액션'을 취하는 주요 인물이 되는 건데 여기서 루다랑 이어지기까지 하면?

안 그래도 죽은 후 다시 살아나서도 이 웹툰은 루다의 시점이 아니라 백 과장의 시점으로 옮겨갔는데, 만약 백 과장과 루다가 이어졌다면 루다는 꼼짝없이 백 과장의 '개과천선의 보상물'이 되었을 거다.

안 그래서 정말 천만다행이다.

후기에 작가님이 '루다와 백 과장을 이어 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렇게 되면 루다가 너무 불쌍하잖아요."라고 대답하셨는데, 과연 옳다.

백 과장이 정말로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면, 루다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것을 담담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작가가 루다를 통해 작품 내내 보여 주려 했던, 성차별적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무효화될 뻔했다.

 

정말 재미있고 주제 의식도 좋은, 아주 오랜만에 본 완벽한 웹툰 작품이었다. 작화도 좋고, 깨알 같은 패러디 개그도 나는 마음에 들었다.

이번엔 유료 결제로 봤지만 나중에는 단행본을 사서 소장하고 싶다.

[영화 감상/추천] Isle of Dogs(개들의 섬, 2018) - 웨스 앤더슨이 들려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 

얘가 주인공 아타리이다(옷이 심히 사이버 전사스럽다...)

아타리는 '스팟츠'를 찾으러 다닌다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개들의 털은 알파카의 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독: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배경은 메가사키(Megasaki)라는 일본의 (가상의) 한 도시. 개 독감이 널리 퍼지자 시장인 코바야시(Kobayashi, 쿠니치 노무라 분)는 도시에서 모든 개들을 추방할 계획을 세운다.

한 과학자가 개 독감의 치료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시장은 이를 무시하고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시내의 모든 개들은 쓰레기 하치장인 섬으로 보내 버린다.

하지만 그의 양자인 아타리(Atari, 코유 랜킨 분)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호해 주던 개를 찾아 작은 비행기를 타고 쓰레기 섬으로 날아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과연 이 소년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개를 찾아 데려올 수 있을까?

 

내가 이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제일 걱정했던 것은 '일본 미화로 가득 찬, 와패니즈(Wapanese, Japanese Wannabe의 준말) 영화면 어떡하지?'였다.

예고편에서 볼 수 있듯이 극 중 배경이 일본인 데다가 일본인 인물들은 일본어로 말한다(일본어 대사는 통역가라는 캐릭터를 통해 영어로 옮겨 전달된다).

심지어 포스터에도 '개들의 섬'이라고 쓰여 있다.

자, 이런데 일뽕 영화가 아닐 것인가? 아무래도 한국 관객들로서는 예민하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내 걱정은 기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전통 북 춤이나 신사 등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문화를 열심히 조사하고 연구해서 잘 녹여 낸 것이지, 딱히 감독이 거기에 취해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일본인 인물들의 얼굴 생김새나 체형도 '일본인답게' 잘 그려 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묘사할 때 종종 과장되게 찢어진 눈을 그리고는 하는데, 여기 일본인들 외양 묘사에는 그런 오버가 없다.

'동양인을 그려야지!' 하고 그린 게 아니라 그냥 '이러이러한 캐릭터를 그려야지!' 하고 생각하고 그린 것 같다.

고바야시 시장 뒤를 따라다니는 비서 격 인물이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각주:1]처럼 회색 피부에 거대하지만 등이 굽은 인물로 그려지기는 한다. 하지만 이건 이 사람이 뱃속이 시커먼 인물이라 그런 성격을 외적 특징으로 끄집어 낸 것이지, 동양인을 비하해서 괴물처럼 그렸다고 볼 수는 없다.

동양인이 '동양인'이라는 정형화된 캐릭터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그려진다. 나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딱히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일본을 미화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정말 마음 편안히 즐길 수 있었다.

왜 굳이 일본을 배경으로 했는지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본다면, 일본 문화에서 고양이가 (아마 이집트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니까, '그렇다면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서 개를 싫어하게 된 사람도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상상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다(개 대 고양이 대결 구도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 같다).

영화 시작할 때 왜 고바야시 시장네 가문이 개를 싫어하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니 말이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어쨌든, 버림받은 외롭고 차가운 개였던 치프(Chief, 브라이언 크랜스턴 분)가 아타리를 만나 점점 충실한 애완견이 되어 가는 과정이 귀엽고 재미있다.

아타리가 막대를 던지고 물어 오라니까 처음 두 번 정도는 "난 그런 거(fetch) 안 한다." 하다가 나중에는 "내가 이러는 건 네가 명령해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불쌍해서 그런 거다."라며 막대를 물어 온다.

나중에 치프에 대한 반전이 있긴 한데 억지스럽지는 않다. 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굳이 억지스러운 걸 찾자면, 우리가 극 중에서 보게 되는 이름 있는 개들이 다 여기 등장하는 인간 캐릭터들의 애완견이었다는 것.

도시에 개가 몇 마리인데 그 개들 주인이 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사람들이라고요? 에이. 그렇지만 이건 영화니까 봐주자.

 

아타리의 개 '스팟츠(Spots, 리브 슈라이버 분)'가 쓰레기 섬으로 보내진 지 약 6개월 정도가 지난 후가 극이 진행되는 배경인데, 고작 그것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개들 사이에선 이미 '첫 개'라고 불리며 엄청 오래된 것처럼 말하는 게 조금 웃기고 귀여웠다.

하긴, 인간이 느끼는 시간과 개들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다르니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 뻘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개조차도 성별 프레임을 통해 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 초반에 치프가 자기를 따르는 개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너희들 이름은 '킹(King)', '렉스(Rex, 라틴어로 '왕')', '듀크(Duke)', '보스(Boss)'이지 않느냐고, 왜 그렇게 길들여진 애완동물처럼 나약한 소리를 하느냐고 꾸짖는 장면이 있다.

다 강인하고, 권력을 가진 존재들과 관련된 이름들이다(이 영화를 안 봤어도 이 말을 듣고서는 '아, 그럼 수컷 개들이겠구나.' 하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암컷 개들의 이름도 유심히 봤다. 여주인공 격인 개의 이름은 '넛메그(Nutmeg)', 육두구라는 향신료를 가리킨다.

스팟츠의 짝인 암컷은 '페퍼민트(Peppermint)'. 향이 좋은 허브로 차 등에 많이 쓰인다는 건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 둘 다 '향이 좋다'는 특성이 여성성과 연결된다.

틸타 스윈튼(Tilda Swinton)이 목소리를 연기하는 자그마한 개는 '오라클(Oracle)'이다.

오라클은 TV를 보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 영리한 개인데, 말하자면 직업에서 이름이 연유된 셈이다(오라클은 고대 희랍에서 신탁을 받는 사제를 뜻하는데, 델포이의 여성 사제들이 유명하다).

이 오라클의 파트너 격인 개는  '주피터(Jupiter)'. 이 주피터는 로마 신화의 우두머리 신 이름이고, 그리스 신화로 치면 제우스에 해당한다. 얘는 당연히 수컷이다.

여기까지 보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개에게도 암수를 구별해 그 성에 맞는 이름을 부여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성에 맞는다'는 건 우리가 인간 남성, 여성에게 가지는 개념들이고 말이다.

특이하게도 '스팟츠'라는 이름만이 '점박이'라는 뜻이고 중성적이라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중성적이기에 더욱더 수컷 개에게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암컷 개에게 '스팟츠'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수컷 개에게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는 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여성은 언제나 그 성을 감추거나, 적어도 전면에 떠오르지 않도록 할 수 없다고 여겨지니까 말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헷갈린다면, 많은 예술(특히 문학)에서 '남성이 기본 성, 즉 그냥 인간이고 여성은 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상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건 영화고 영화 속에서는 동물이 말하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존재로 의인화되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인간을 대하듯 이 동물들을 생각하게 되어서 더욱더 그렇게 느껴진 걸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에게는 한번 생각해 볼 법한 주제였다.

 

이 영화 평을 '웨스 앤더슨이 들려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쓴 것은, 전반적인 느낌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특히 마지막 결말 때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아래 복권은 스포일러도 상관없다는 분들만 긁어 주세요.

마지막에 아타리가 메가사키 시의 시장이 되는데 고바야시가 죽었다고 해서 양자인 얘가 시장이 될 수 있나?

시장직이 무슨 왕도 아니고 물려줄 수가 있어? 내 생각엔 이거야말로 되게 일본스러운 일이다.

일본에서는 지방 의회 의원이 죽고 난 후 자녀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이거 픽션 아니고 실화 바탕이었나 싶었다.

게다가 아타리랑 같이 모험을 한 친구들도 다 한 자리씩 맡는다. 얘네 다 중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띠용???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냥 '주인공은 공주와 결혼해 왕이 되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식으로 끝나는 동화 같은 결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웨스 앤더슨만의 미적 감각이 이번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도 잘 발휘되었다.

이분의 미적 감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게 오히려 우스울 듯하니 그냥 나는 자막 얘기만 하겠다.

화면에 일본어가 나올 때 자막이 딸려 나오는데 포스터에 쓰인 'Isle of Dogs' 글씨와 같은 폰트로 스타일리시하게 보여 준다.

자막을 배치하는 센스도 좋다. 원문을 고려하면서 안정감 있게 잘 배치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 느낌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다 아실 듯.

 

 

참고로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Rushmore, 1998)> 이후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사단 중 일원이었던 제이슨 슈워츠먼(Jason Schwartzman)은 이번 영화에는 연기에 참여하지 않고 각본 작업만 같이했다. 아쉽다.

또 다른 트리비아로는, 미국에서 온 교환 학생 '트레이시(Tracy)' 역을 맡은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은 프랑스어가 유창한 덕에 프랑스어 더빙 버전에서도 그대로 트레이시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 제목은 말장난이다. 'Isle of Dogs'는 빨리 말하면 'I Love Dogs'처럼 들린다.

 

  1. 흔히 얼굴이 녹색이고 머리에 나사가 달린,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형 괴물을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맞는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을 만들어 낸 과학자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영화 감상/추천] Life of the Party(라이프 오브 더 파티, 2018) - 마야 루돌프, 빛나는 신 스틸러

전남편의 짐을 다 불태워 버리려는 디애나

1980년대풍 파티에 참석한 디애나와 매디,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

디애나에게 빠진 잭(약간 로버트 패틴슨 닮게 나온 듯?)

감독: 벤 팰콘(Ben Falcone)

 

대학생 딸을 개강에 맞춰 캠퍼스에 데려다주던 디애나(Deanna, 멜리카 맥카시 분)는 캠퍼스를 벗어나기도 전에 남편 마이크(Mike, 스티븐 루트 분)에게서 이혼하자는 말을 듣는다.

충격을 받은 디애나는 집 안에 있는 그의 물건을 모조리 정리하며 우연히 자신의 대학 시절 사진을 보게 되고, 대학을 끝마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후회도 잠시, 그녀는 대학에 등록해 마지막 학기를 완수하고 졸업장을 따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과연 같은 학교를 다니는 딸과도 잘 지낼 수 있을까? 아줌마라고, 늙었다고 비웃음 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 것인가?

 

국내에서도 <스파이(Spy, 2015)>, <더 히트(The Heat, 2013)> 등으로 이름을 알린 코미디언 멜리사 맥카시의 영화.

<태미(Tammy, 2014)>와 <더 보스(The Boss, 2016>에 이어 자신의 남편인 벤 팰콘과 같이 각본을 작업하고 주연을 맡았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빛이 나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주연이 아닌 조연, 마야 루돌프(Maya Rudolph)이다.

(마야 이야기는 잠시 후에 본격적으로 하기로 하고, 일단 전반적인 이 영화의 평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멜리사 맥카시의 코믹 연기는 좋으나, 장면의 유기적 흐름이라든지 등장인물의 행동에 있어 개연성 등이 빈약하다는 점 때문에 주연의 노력이 빛이 바랜다.

예를 들어, 디애나가 프랫의 여자애들에게 롤 모델처럼 영감을 주는 말을 해 주고, 애들도 다 감명을 받았는데, 갑자기 누군가 파티를 하러 가자고 하는 식이다.

앞뒤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지 못하고, 그 사이를 대충 땜질했다는 느낌?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메이크오버나 워크오브셰임(원 나잇 후 상대방의 침실이나 집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것), 파티, 그리고 대마초가 든 음식을 먹고 예상치 못해 취해 난장판을 만드는 사건 등, 대학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한 번쯤 나올 법한 이벤트들은 모두 집어 넣은 탓일까.

마치 '대학물 영화라면 당연히 이런 게 있어야지!' 하는 안일한 사고를 가지고 각본을 쓴 결과물처럼 느껴진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디애나의 학비 마련을 위한 파티(영화 제목인 'Life of the party'는 '파티의 분위기를 살리는 사람, 파티에서 잘 노는 사람'을 가리킨다)가 특히 그러하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가 카메오로 출연해 노래를 부르는데도 관객은 '그런데 이 파티를 도대체 왜 해야 해?' 싶은 것이다. (이 팝 스타를 이 파티에 불러들일 수 있었던 '반전' 이유조차 또한 억지스럽다.)

 

또한 인물들도 어딘가 인위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미드 <커뮤니티(Community)>에서 브리타(Britta) 역을 맡았던 질리안 제이콥스(Gillian Jacobs)가 이 영화에서는 8년간 코마에 빠져 있었던 '코마 걸'로 등장하는데 각본상 그녀에게 너무 많은 개성을 부여한 나머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마치 '난 4차원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 거야!' 하고 작정한 듯, 온갖 쿼크(quirk)를 부여하다가 너무 과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이상한 캐릭터는 이미 디애나의 룸메이트인, '고스(goth)' 리오노어(Leonor, 하이디 가드너 분)가 있는데 말이다.

덧붙여 언제나 "Can I say something?" 하고 말을 시작하는, 어색한 여자애(IMDB에도 배역 이름이 안 나온다. 배우 이름은 제시 에니스)는 답답한 걸 캐릭터로 잡았는지 몰라도, 벌써 디애나 주변에 이상한 인물들이 너무 많다.

정말 과유불급이다. 각 캐릭터들의 개성이 포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매력적인 인물이 없다.

차라리 펑퍼짐한 아줌마 디애나에게 뿅간 훈남 청년 '잭'(Jack, 루크 벤워드 분)은 개성이랄 게 없는 단순한 인물이라 오히려 이쪽이 더 매력적이다.

디애나의 딸 매디(Maddie, 몰리 고든 분)조차 엄마랑 같이 학교에 다니는 게 좋았다, 싫었다, 너무 쉽게 마음이 휙휙 바뀌어서 각본의 질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게 아니면 편집 실력이 형편없든 것이든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나오기만 하면 빵빵 웃음을 터뜨리는 배우가 있었으니, 그게 (드디어!) 마야 루돌프이다.

마야의 캐릭터 크리스틴(Christine)는 단순하다. 디애나의 절친이고, 섹스를 좋아하는 아줌마. 이게 끝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나오는 모든 장면의 멱살을 잡고 이끌어나간다.

라켓볼장에서 디애나의 신세 한탄을 들어 주던 중에 디애나가 친 공에 소중이를 맞고 나서 "내 버자이너에게 사과해."라고 한다든지,

마이크와의 이혼 절차 중 중재(mediation) 시간에 디애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당신이 크리스틴을 데려왔다니 믿을 수가 없네." 하고 말하는 마이크에게 "나야말로 네가 잡년이랑 놀아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거든." 한다든지,

디애나와 헤어진 후 다른 여자를 만나며 젊은 척을 하려고 해리슨 포드처럼 한쪽 귀에 귀걸이를 하고 나타난 마이크를 보고 "해리슨 포드는 은하계를 해방시키기 위해 데스 스타(Death Star, <스타 워즈(Star Wars)>에 나오는 제국군의 우주선 이름)를 폭파시켰지. 너는 뭘 했는데?" 한다든지.

아, 그리고 진짜 웃긴 장면이 있는데 이걸 말하면 반전이 들통 나서 차마 못 적겠다.

이 장면이 정말 대박이니 여기에서 마야를 주목하시라!

하지만 확실한 건, 마야는 나올 때마다 웃기다는 것이다.

멜리카 맥카시는 주연이니 스크린 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또 이 (디애나의 말에서 인용하자면) "shitshow"의 각본을 쓰기도 했으니 이 영화가 낮은 평을 받게 한 데 일부 책임이 있지만, 마야 루돌프는 매번 웃김으로써 조연으로서, 그리고 신 스틸러로서의 책임을 모두 다했다.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라는 말은 이 영화의 마야 루돌프를 위한 표현이다.  마야!

[영화 감상/추천] Swinging Safari(스윙잉 사파리, 2018) - 197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

이쪽이 콩가루 가문 부모님들이시고

여기 왼쪽 남자애가 제프

여기 왼쪽 여자애가 멜리. 날이 더워 KFC 치킨 통에 인쇄된 커널 샌더스 할아버지 얼굴이 멜리의 배에 찍혀 버렸다.

보기만 해도 아프다...

 

감독: 스티븐 엘리엇(Stephan Elliot)

 

197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노비스 해변(Nobbys Beach) 근처의 교외에서 벌어지는 콩가루 가문 이야기.

14살 소년 제프 마쉬(Jeff Marsh, 애티커스 롭 분)는 옆집 동갑내기 소녀 멜리(Melly, 다아시 윌슨 분)를 짝사랑하고 있다.

어느 날, 해안가로 죽은 고래가 밀려오는데, 사람들은 처음엔 놀라워하다가도 이내 썩어 가는 고래에서 나오는 악취 때문에 이 사체를 폭파해 버리려고 한다.

다만 감수성 풍부한 멜리는 이 고래를 멀리 바다로 보내 주고 싶어 한다. 제프는 그저 그녀 곁을 맴돌 뿐이다.

한편, 제프와 멜리의 부모님은 이보다 좀 더 야릇한, 어른들만의 일탈을 계획하고 있는데...

 

영화관에서 이 영화 예고편을 보았을 때는 정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피임약을 선물로 받고서 기쁨에 울음을 터뜨리는 딸의 모습이나, "남자 인생에 한 번쯤은... 젠장, 그냥 받아라." 하며 14살짜리 아들에게 콘돔을 쥐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정말 코믹하게 보였던 것이다.

예고편만 보면 정말 오스트레일리아스럽고 빵빵 터지는 코미디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제목의 '스윙잉(swinging)'이 그런 의미인 줄 몰랐지!

아니, 사실 단어 뜻만 놓고 보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말 이 커플들이 파트너를 교환해 섹스하려고(=스윙잉) 하는 줄은 몰랐다고!

그래, 이것 자체로는 코미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별로 안 웃기다는 거다.

재치 있는 대사로 웃음을 빵빵 터뜨려야만 좋은 코미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코미디라고 하기에는 너무 불쾌하다.

그 이유는 이 예상도 못 한 섹스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주인공 제프 때문이다.

얘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친구들과 '스턴트 영화'를 찍는데, '아무리 어릴 때 상상력이 풍부하다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잔인하고 폭력적인 걸 좋아하지?'싶었다.

굳이 여기에 구체적으로 무엇무엇이 잔인했다고 일일이 다 쓰고 싶진 않지만(그걸 읽게 되는 독자분들은 무슨 죄야!) 내가 워낙에 '폭력은 비성숙한 정신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너무나 불쾌했다.

물론 그 나이에는 이성보다는 신체를 더 잘 쓰니까, 스턴트 같은 류에 관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독은 그걸 왜 굳이 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로 결정한 건지 모르겠다. 폭력 자체를 너무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애완용 거북이가 아이가 휘두른 크리켓 배트에 맞아 날아갔다는 걸 굳이 그렇게 보여 줘야 했나?

나는 가벼운 '코미디'를 기대하고 영화관에 간 건데, 내가 왜 거기서 그런 식으로 폭력이 묘사될 때 어깨를 움찔거리며 불편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걸 다른 수단으로,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텐데 말이다. 예를 들어 만화로 대체한다든가, 은유법을 쓴다든가.

실제로 날아오는 파라솔에 배를 꽂혀 그렇게 큰 부상을 당할 수 있는지,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는 제쳐 두고서라도, 왜 굳이 그런 '강한' 설정을 넣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이 점이 내내 꺼려졌다.

 

게다가 멜리가 본인 가족에게도 구박받고 사니까 불쌍한 애라는 건 알겠는데 영화 내내 혼자 우울해하니까 답답하다.

고래 이야기 또한 이 영화 속에 왜 있는지를 모르겠다.

영화 막바지에 시장이 사람들을 고용해 이 썩은 고래 시체를 폭파시켜 버리는데, 그걸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엔 "저거 그냥 터지는 걸로 끝날 리가 없는데. 산산조각 나서 다시 떨어질 텐데. 그건 생각하고 폭파시키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장면에선 정말 산산조각 난 고래 고기가 마을을 덮쳐 구경꾼들이 소리를 지르고 뛰어간다.

시장이 고용한 전문가들도 당혹한 표정이다. ...왜? 직업이 폭파 전문가인 사람들이 그걸 생각을 못 했다고?

감독님, 진짜 이런 식으로 억지를 써서 영화를 만드시면 어떡해요...

<프리실라(The Adventures of Priscilla, Queen of the Desert)>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고 해서 기대하고 봤는데 와장창 깨졌다.

그러고 보니 이 감독의 <이지 버츄(Easy Virtue)>도 결말이 여주와 진짜 상상도 못한 인물과 그 집안을 떠나는 거여서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영화에서 소소하게 웃음을 주는 장면이 있다면, 부모들이 제프와 멜리의 관계를 알게 되고 이 두 청소년들을 이어 주려고 애를 쓰는 장면이다.

그게 유일하게 이 콩가루 집안 부모들이 자녀에게, 정말 이상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마음 쓰는구나 느낄 수 있는 때이다.

 

IMDB 리뷰를 보니 197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의 모습을 아주 잘 재현해 냈다, 어릴 적 생각이 난다는 글이 있다.

검색을 해 보니 당시 문화를 알아야 웃을 수 있는 농담, 점프수트, 터퍼웨어에 나오는 음식 등이 그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나야 그 당시가 어땠는지 모르니 공감하기가 어렵다.

1970년대의 오스트레일리아 문화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듯하다(저는 모르겠어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