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박선희, <아무튼, 싸이월드>
지난 번 <트라우마 클리너>가 깊이 있는 진지한, 그리고 긴 책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쉬어 가는 의미에서 가벼운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게 이것인데,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ㅎㅎㅎ
싸이월드가 최근 (2022년 4월) 다시 오픈했다는 뉴스에 싸이월드에 급히 접속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상당수 기능이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아 미흡하다고 하는데, 이참에 싸이월드에 대한 이 책을 읽고 싸이월드 시절을 추억하며 기다리는 건 어떨까.
싸이월드가 망했다는 소식에 느낀 감정은 각자가 보낸 그 시절의 질감만큼이나 다양했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다.
순진하게 충격 같은 걸 받기엔 지금껏 너무 많은 웹 플랫폼의 명멸()을 지켜봐왔다. 한반도 '덕후'들의 뿌리가 된 나우누리, 하이텔부터 난데없는 모교 사랑과 동창 재회 붐을 일으켰던 아이러브스쿨, 채팅과 번개 중독자를 양산했던 세이클럽, 갖가지 사조직 결성의 재미를 알게 해준 프리챌, 상시 접속 시대의 서문을 열었던 MSN 메신저……
이런 각종 플랫폼들의 '헤비 유저'였던 나는 이 방면에서 일종의 프로였다. 프로는 놀라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은 모든 것이 빠르고 일사불란한 나라다. 한번 뜨면 모두가 열광하지만, 대체재가 나타나는 순간 자비가 없다. 이들 중 상당수는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플랫폼의 영향력에 밀려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히고, 있는 둥 없는 둥 존재하다 결국 폐업 수순을 밟았다.
(...)
하지만 그런 열렬함은 일종의 착시였다. 싸이월드를 대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사실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잦은 서비스 중지와 복구, 폐업의 해프닝을 겪으면서도 그 추억을 백업하거나 그토록 소중한 싸이월드를 다시 이용하는 수고로움은 별로 감수하지 않았다. 단지 '싸이월드가 문 닫으면 모든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때마다 호소만 했다. 싸이월드 시대의 마감을 다들 그토록 안타까워하면서도 여전히 그곳을 방치했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부르짖으면서도 접속하지는 않았다. 서비스 중지와 복구가 반복되는 사이, 다들 절규와 안도의 감정적 롤러코스터만 신나게 탔다.
(...)
나는 싸이월드를 원했지만, 원하지 않았다. 싸이월드가 필요했지만, 필요 없었다. 이 회사의 폐업을 둘러싼 이런 이율배반적인 감정의 기저에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혹은 이기적인) 이유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건 유독 싸이월드만은 '좀 특별한 구석'이 있다고 말하게 되는 편애의 근원이기도 했다.
각별하지만 남세스럽고 애틋하지만 오글대는 그것. 어딘가에 안전하게 간직하고 싶지만 '굳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는 않은 그것.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지만 '딱히' 자주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은 그것. 그래도 절대로 사라지지만은 않으면 좋겠는 그것.
나의 이십대, 나의 청춘.
우리가 싸이월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싸이월드풍의 귀여운 도트 그림 표지도 귀엽지만 내용도 싸이월드를 추억하는 몽글몽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왕년에 싸이월드를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조금 손발이 오글거려도 웃고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기자라 그런지 글을 참 재미있게 잘 쓴다.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저자가 교환 학생으로 영국 대학에 갔던 이야기이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현지인과의 교류에 급격히 흥미를 잃어가는 시작점이 됐다. BBC를 틀면 오직 영어란 것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닌데 애꿏게 볼륨만 계속 키웠다. 현지에서 이수하기로 한 영문학 수업 시간에 들리는 말이라고는 '셰익스피어'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수업은 영시 수업이었다. 아무 말도 안 들리는 영시 수업에서 극작가로만 알고 있던 셰익스피어 이름만 십수어 번 출몰했다가 사라지는 하루하루가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급기야 영어를 쓰는 사람만 봐도 속이 메스꺼웠다. 이 먼 곳까지 왜 왔는지 후회됐다. 눈 마주치는 것조차 슬슬 피하는 날 보고 같은 기숙사의 영국인들은 대인기피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날 베니가 D와 F가 섞인 단어를 내뱉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다. 그는 울퉁불퉁한 내리막길에서 이민 가방과 함께 굴러떨어지려는 위기를 몇 차례 겪었다. 화물용 캐리어를 양손에 끌며 뒤를 따르던 나는 그때마다 몸을 던져 베니와 함께 그 거대한 가방을 떠받쳤다. 그 가방은 엘리베이터에조차 순순히 들어가지 않았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씨름해야 했다. 기숙사 방에 그 모든 걸 무사히 밀어 넣는 데 성공했을 때 우리에겐 중간계 전투를 함께 치른 반지원정대 같은 연대감이 형성돼 있었다.
(...)
그 한심한 '언어 교류'의 정점은 그를 싸이월드에 가입시킨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언어 장벽에 가로막힌 반쪽짜리 유학 생활을 싸이월드 중독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매일 수시로 접속해서 사진첩이며 게시판에 '테스코에서 장 본 후기', '도서관에 연체료 낸 이야기' 같은 시시껄렁한 영국 생활을 업데이트했고,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를 확인했다. 강의실에서 우리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초라한 동양인이었지만, 싸이월드의 세계에서는 유럽의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영문학과 영화 수업을 듣는 촉망받는 유학생이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D와 나밖에 몰랐고, 그 두 세계의 격차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욱 싸이월드라는 판타지에 집착했다. 우리의 유일한 현지인 친구이자 자랑인 베니는 그 판타지를 완성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베니는 외국인의 싸이월드 가입이 까다롭다며 투덜댔지만 여러 인증 절차를 거쳐서 결국 미니홈피를 열었다.
그리고 음악 취향에 따라 사람의 유형을 분류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하는 일이겠지만 그걸 이렇게까지 공감 가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말은, 음악 취향에 따른 사람 유형이 정확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음악 취향 분류의 범주와 그 설명이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뜻이다 ㅋㅋㅋㅋ
나는 노래에 따라 사람의 유형을 분류했다. 누구나 알던 당대의 대중가요나 댄스곡을 BGM으로 해두는 이들 중에는 대체로 성격 좋고 원만한 스타일이 많았다. 하지만 독서 목록에 자기계발서만 잔뜩 있는 것과 비슷한 인상을 줬다. 사람은 좋은데, 진짜 인생은 모르는 느낌이었다. 팝이나 월드뮤직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대개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강했다. 특히 일본 가요를 BGM으로 해놓은 미니홈피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귀여움 속에 엑스재팬적 다크함과 영화 <러브레터>의 센티함을 동시에 가진 느낌이었다. 뉴에이지형은 자기애와 자아 도취 성향이 강하고 감상적이며 유약한 스타일이 주를 이웠다. 이를테면 한 학기 내내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술자리 때마다 울었는데 계속 군대는 안 가는 유형. 송별회만 몇 달째 하다 지쳐서 군대 가긴 가냐고, 입영통지서 온 건 확실하냐고 짜증 내게 되는 그런 스타일이랄까. 인디밴드형, 하드록형은 예술적 감식안에 대한 (아무도 몰라주는) 자신만의 철학과 자부심을 보유한 경우가 많았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미니홈피 BGM으로 해 두었던 음악은 라디오헤드(Radiohead)의 <No Surprise>였는데, 기자가 된 이후로 하도 '놀랄' 일이 많아서 "알람도 놀람도 없는 침묵 그 자체"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자에게, 그리고 아이가 있는 사람에게 이는 불가능한 꿈일 뿐... 😓
모처럼 만에 마지막 BGM <노 서프라이즈>를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반쯤 먹통인 미니홈피에서는 아무리 클릭해도 재생이 되지 않았다. 디즈니 OST와 동요로 가득 차버린 음원사이트 스트리밍 리스트에 옛 노래를 추가했다. 딩동딩동. 그 유명한 초인종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로폰과 함께 변주되는 그 집요한 딩동거림과 함께 잠들어 있던 멜랑콜리의 세포들이 기포가 터지듯이 하나둘 깨어났다. 하지만 한 번으로 족했다. 브릿팝으로 가득 찼던 플레이리스트가 '도담도담' 어플의 여덟 가지 백색소음과 핑크퐁 <상어 가족>으로 대체된 지 너무 오래돼서였을 것이다. 라디오헤드와 그 몽환적인 감성은 여전히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을지언정, 더는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
오랜만에 들은 <노 서프라이즈>가 내 삶의 진짜 '서프라이즈'를 보게 했다. 세상의 중심이 오로지 나 자신이던 시절, 나 이외 모든 문제에 대해 '아웃 오브 안중'이던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던 시절이 어느새 싸이월드와 함께 저편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재생되지 않는 BGM들처럼 멈춰버렸다. 대신 새로운 것들이 왔다. 아이들은 먼 미래와 현재를 이어주는 신비로운 물리적 실재였다. 그 작고 통통한 손을 꼭 잡을 때, 나는 그들이 자라날 미래와 연결됐다. 어설픈 자기 연민 속에서 투정 부리는 것 말고 실제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D처럼 읽던 책을 날려버리지는 못하더라도, 듣던 음악을 끄고 기꺼이 '동요 나라 100곡'을 틀 준비가 돼 있었다.
싸이월드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가득한 책의 마지막 꼭지가 어떤 모임에 가서 동년배들과 싸이월드 이야기로 공감대를 쌓다가 '싸이월드에 대한 책을 한 권 써야 할 것 같은데?'라는 말이 나와 거기에서부터 이 책의 구상이 시작된다는 내용이니, 정말 완벽한 구조다.
기가 막히게 어떻게 이런 구조로 책을 마무리할 생각을 했을까. 감탄하며 책을 덮을 (사실 나는 이 책을이북으로 읽었으니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수 있었다.
싸이월드를 흐뭇하게 추억하고 싶은 분이라면 한번 거들떠보시라. 참고로 리디셀렉트에서 이용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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