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이자연, <어제 그거 봤어?>
드라마, 예능, 영화, 다큐 등 (대체로) 한국 TV 속에 묘사된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는 책.
각 꼭지 뒤에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두어 개 실려 있어서, 학생들이 토론용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제일 먼저 소개되는 꼭지, <하이킥 시리즈에는 책상이 없다: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에서 저자는 놀라운 발견을 한다. 여성 캐릭터의 방에는 책상이 없다는 것!
'책상의 부재'는 대부분 여성 인물에게 해당됐다. 일기 쓰는 서민정, 노트북으로 인터넷 검색을 자주 하는 이현경, 공부하는 황정음과 백진희. 이들은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읽고 쓸 때 책상이 없어 화장대에 앉아야 했다. 남성 인물의 생활 환경을 비교해 보면 문제점은 더욱 극명해진다. 공부와 담쌓은 이윤호에게도, 다락방 신세인 이민용에게도, 조연인 강세호에게도 모두 책상이 있다. (...)
반면 여성 인물의 방 풍경은 많이 다르다. 책상 자체가 없고, 필요할 때는 화장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서사의 개연성을 위해서라도 책상은 몹시 필요했다. <거침없이 하이킥> 74화에서는 박해미가 러시아어를 마스터하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신지와 러시안 친구가 자신을 앞에 두고 조롱하는 것 같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어, 그들의 대화 내용을 기필코 알아내겠다는 의지 하나로 며칠 만에 러시아어를 터득한 것이다. 심지어 이 에피소드는 그가 러시아 대사관에 가서 한의학 강연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렇듯 해미는 비범하고 뛰어난 언어능력과 집중력, 의지력을 보여줬지만 공부하기 위해 찾은 게 그러니까……… '화장대'다.
(...)
답은 아주 명료하다. 화장대의 기능을 떠올려 보면, 여자라면 당연히 꾸미길 좋아할 거라는 믿음이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통념이 서사적 논리를 뛰어넘어 TV 안에 살아남은 것이다. 인물의 배경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성의 특성'일 것이라고 뭉뚱그린 게으른 판단으로 말이다. 책상의 부재는 단순히 가구 한 점 모자란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학습, 사유, 성장, 발전, 상상 등 이토록 많은 단어가 책상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위의 장면들은 여성 인물을 향한 구태의연한 해석이 그들의 방에 교묘하게 침투한 증거이자 결과다.
참 얼탱이가 없다. 여자 방이라고 책상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하다니.
유학생들을 위한 숙소에서도 남녀 가리지 않고 침대와 작은 책상 정도는 기본으로 제공해 주는데, 어떻게 이런 시대착오적인 연출이 있나 충격적일 정도다.
다른 꼭지에 나온 저자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돌이켜 보면 조금 이상하다.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삶을 일상의 미덕인 것처럼 가르치는 나라에서 여성들을 이토록 낭비하다니. 왜 수많은 여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까.
<마이 리틀 텔레비전2>를 다룬 꼭지에서 저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강부자님이 맨스플레인을 당하는 장면을 지적한다.
강부자님은 <마리텔2>를 통해 처음으로 1인 방송을 하게 되었는데, 그 주제를 "축구 얘기"로 정했다.
(...) 그리고 그가 말을 덧붙였다. "맨날 TV에서 맨 할머니 역할만 하다가 이런 거 하니까 어색하시죠?" 맞는 말이다. 80세에 가까운 할머니가 축구에 관해 전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본 적이 있었나. 내 역사에 그런 경험은 없었다. 드디어 오랜 익숙함을 강부자가 전복시킬 차례였다.
그때 두 명의 남성이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앉았다. 방송인 조우종과 스포츠해설가 한준희였다. 아무래도 방송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첫 번째 코너가 시작되었다. 바로 강부자의 역량 테스트. 맙소사. 그러니까 강부자가 축구 해설을 할 역량이 되는지 남성 두 명이 친절하게 테스트를 해준다는 것잉었다.
몇 가지 의문이 스쳤다. 강부자가 축구와 함께한 세월이 어언 몇십 년인데, 같이 맞히는 퀴즈도 아닌 역량 테스트가 꼭 필요한 건가? 저 둘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그의 축구 지식이며 역량이 진실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저들은 강부자를 평가할 역량이 되는 걸까?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테스트를 쉽게 풀어나갔다. 선수들의 등 번호만 보고도 이름을 불렀고, 특정 선수에 대한 애정 어린 설명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문제에서는 원성 반 농담 반의 말을 남겼다. "뭐야 이거 (너무 쉽잖아).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우종보다 최신 업데이트된 정보를 전하는 여유까지 보였고 조우종은 축구를 본 지 꽤 되었다면서 어쓱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강부자를 테스트할 수 있는 건 강부자 자신밖에 없어 보였다.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강부자가 축구 해설을 하는데 굳이 남성 해설자를 불러야 했을까. 축구 해설에 남자가 많은 게 그 이유라면, 왜 남자밖에 없는 것인가.
난 이 에피소드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 이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아니, 아무리 '맨스플레인'하고 싶어도, 그래도 80세에 가까운 할머니에게 '테스트' 따위를 하는 건 좀 재수 없고 예의 없는 짓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던 걸까?
제작진이 나이가 있다 해도 기껏해야 40~50대일 텐데(사실 이것보다는 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강부자님에 비하면 아기나 다름없는 핏덩이인데! 감히 어른을 시험해?
뭔가 묘한 K-유교 사상적 분노인 거 같지만 어쨌거나 제작진들이 최소한 이런 생각이라도 했다면 그렇게 무례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이 스포츠나 게임 등, 전형적으로 '남성들이 좋아하는 것' 또는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남성들은 '진짜로 (여자인 네가) 그걸 좋아하는 게 맞는지' 시험하려 들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주변에 이미 많고, 아래 책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 있으니 여기에선 더 이상 길게 말하지 않겠다.
2021.06.28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여러 차례의 점검과 필터를 거쳐 나온 TV 프로그램에도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성들 주변엔 얼마나 일상적인 맨스플레인과 애교 요구가 범람하고 있을까? 우리는 사회가 유능한 여성을 어떻게 오용하고 있는지 게속해서 되짚어 봐야 한다. 시대착오적인 요구 사항에 휘말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도 중요하다. 이 경계는 모든 여성에게 적용된다. 제시부터 강부자까지, 나부터 당신까지. <나 혼자 산다>와 <마리텔2>의 문제점을 발견한 것만 해도 2019년 3월, 같은 시기였다. 한 달에 최소 두 번씩 이런 장면들을 맞닥뜨린다고 가정해 보자. 나도 모르게 그 풍경에 잠식되면서 나를 잃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는 아무거나 될 수 있는 걸까? 아무래도 여성 시청자에게는 TV를 보기 전 질문 하나가 더 필요해 보인다.
"나는 어떻게 낭비되고 있을까?"
위에서 살펴보았듯, 내용은 정말 좋은데 편집이 다소 아쉽다. 나는 리디셀렉트에서 이북으로 다운 받아 봤는데 오직 스크롤 보기를 허용해야만 모든 페이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처음에 이걸 몰라서 '어, 왜 책 내용이 이렇게 띄엄띄엄이지? 왜 이 다음에 안 이어지지?' 하고 헤맸더랬다.
그리고 책 교정교열도 미묘하게 별로다. 다리는 '두꺼운' 게 아니라 '굵은' 건데 '두껍다'라고 잘못 쓰인 게 두 번이나 나왔다(핑클 멤버가 잘못 말해서 그냥 그대로 쓴 거 같은데, 그런 건 굳이 똑같이 쓸 필요 없지 않나?).
끈 역시 '얇은' 게 아니라 '가느다란' 것이다(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 책에 나온 건 아니지만 '허리'도 마찬가지다. 허리는 '가늘거나', '굵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놀래켰다'는 표준어가 아니므로 '놀랬다' 또는 '놀라게 했다' 정도로 바꾸어 써야 한다.
작가가 원고를 쓸 때 틀리게 쓸 수는 있어도 편집자가 발견해 고쳐야 하지 않나. 아니면 출판사에서 교정교열 전문가에게 외주를 주든가. 이렇게 사소하지만 쉬운 걸 틀렸다고? 솔직히 놀라울 정도다. 이 좋은 책에 이런 재를 뿌리다니.
한 가지 아쉬움은 더 있다. 정말 감탄하고 공감하며 읽었지만, 그래서 더 이 책에 오류나 부족한 점이 하나도 없기를 바란다.
저자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배타미, 차현, 그리고 송가경이라는 세 멋진 여성을 찾아내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영화 <미스 슬로운(Miss Sloane, 2016)>과의 유사성이 심하다는 표절 논란이 있었다(대놓고 단정 지어 말하지 않는 건, 단순히 내가 법적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 이런 논란이 있는 작품을 좋은 작품의 예로 소개하는 게? 그렇게 현대 한국 TV에 좋은 작품이 없나? (아마도).
그래서 그게 좀 아쉬웠다. 표절 논란이 있는 부분과 이 책에서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미디어에 표현되는 모습은 중요하다. 그것이 언제나 현실을 담은 것은 아닌 데다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TV를 그냥 보기만 할 게 아니라 보면서 '생각'까지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물론 TV를 비롯한 미디어를 보는 게 멍청하다거나 시간 낭비라는 게 아니고, 미디어에서 보여 주는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미디어에 묘사되는 모습도 우리가 바꾸어나갈 수 있다.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면 된다. 듣지는 않을 수가 없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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