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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세라 크래스너스타인, <트라우마 클리너>

by Jaime Chung 2022.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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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세라 크래스너스타인, <트라우마 클리너>

 

와, 정말 놀라운 책이다.

일단 제목의 '트라우마 클리너'는 범죄나 자살 현장, 또는 정신 질환 등으로 혼자 청소가 어려울 정도로 더러워진 집을 치워 주는 전문 청소업체, 또는 그 직원을 말한다.

작가 세라 크래스너스타인은 샌드라 팽커스트라는 트라우마 클리너를 4년간 스무 곳이 넘는 현장을 따라다니며 인터뷰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책 제목만 보면 단순히 트라우마 클리너 일은 어떤지, 어떻게 작업을 하고, 작업 현장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내용일 것 같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은 없고 그 자체로도 흥미롭겠지만, 이 책은 사실 그 이상을 보여 준다.

샌드라 팽커스트는 그 삶 자체가 흥미로운 책 한 권이 될 만한(그래서 바로 이 책이 있는 거지만) 삶을 살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의 삶은 트라우마 클리너라는 특이한 직업이 아니라 마트 캐셔나 카페 직원처럼 다소 평범하고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을 가졌더라도 여전히 흥미롭고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할 삶이었을 거라는 뜻이다.

그는 트라우마 클리너이자 트라우마 클리닝 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이고, 한때 남편이었으며, 드래그 퀸(drag queen)이었을 때도 있었고, 성 노동자였을 때도 있었으며, 성공한 사업가의 아내이기도 했다.

그렇다. 그는 트랜스젠더로, 그가 어떻게 불우한 가정 출신의 '피터'에서 화려한 드래그 퀸 '셀레스티얼 스타(Celestial Star, 한때 샌드라의 드래그 퀸 활동 시절 이름)'가 되었고 또 트라우마 클리너 '샌드라 팽커스트'가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하자면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다(그래서 이 책이 있다).

그의 길고 흥미로운 삶은 이렇게 간단히 요약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무척 굴곡이 많은데, 사실 샌드라 본인도 모든 세부 사항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저자 세라 크래스너스타인이 그와 관련된 인물을 인터뷰해서 사실을 교차 확인하는 등 최대한 그의 삶을 복원하려 최선을 다했으나, 어떤 점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삶과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 몇 군데 있는데, 일단은 트라우마 클리닝 현장을 묘사하는 부분들이 그러하다.

도로시의 집은 커피에 넣는 아몬드 밀크를 직접 만드는 카페와 회색 운동복 상의 한 벌을 280달러에 파는 부티크 숍에서 길모퉁이 한 번만 지나면 나오는 곳에 있었다. 샌드라와 나, 그리고 STC의 직원 네 명은 오전 9시가 되기 직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팀원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현관문의 경첩을 떼서 문을 뜯어내는 것이었다. 문 안쪽에 빈 샴페인 병, 신문지, 패스트푸드 포장지, 쓰레기 봉지 등이 1.5미터 높이로 가파른 경사를 이루며 빈틈없이 쌓여 있어 문이 다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레기 산은 얼어붙은 커다란 강줄기처럼 복도를 덮고 있었다.

팀원들이 두 번째로 한 일은 재빨리 마스크를 쓰고, 두꺼운 고무장갑을 끼고 허리를 굽혀 커다랗고 까만 산업용 폐기물 봉지에 쓰레기를 주워 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략은 금세 굉장히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들이 수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뒤엉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온 빗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반복했던 것도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테지만, 도로시가 (하얀 운동화 한 켤레, 돋보기, 잡지 등의) 쓰레기 더미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물건을 집어오기 위해 자꾸 밟고 다니거나 비교적 폭신한 부분을 침대로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청소 팀은 삽을 도끼처럼 내리쳐서 쓰레기 뭉치를 깨뜨리고 갈고리로 긁어내는 작전을 썼다. 조앤이 샌드라에게 쇠 지렛대를 건네 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쇠 지렛대를 가지러 가면서 샌드라가 말했다.

"봐요, 사람들은 청소라고 하면 물 양동이랑 걸레를 떠올리겠지만 우리 일은 쇠 지렛대, 삽, 갈고리, 커다란 망치 같은 걸 동원해야 할 때가 많아요."

 

샌드라가 트라우마 클리너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그가 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 드러나서 좋았다. 자기 고객들을 존경심과 연민, 공감을 가지고 대할 뿐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한 전문 지식까지 갖춘 정말 베테랑임을 알 수 있었다.

샌드라는 검역 청소 및 복원 기관에서 발행한 카펫 청소 자격증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오염 제거 전문가 기구의 범죄 및 트라우마 생체 복원 기술자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끊임없이 업데이트가 필요한 방대한 전문 지식 말고 또 무엇이 필요한지 샌드라에게 물었다. "연민과 공감 능력이에요." 그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깊은 연민과 공감 능력, 품위, 그리고 유머 감각을 갖춰야 해요. 현장에서 정말 필요한 덕목이죠. 그리고 냄새나 현장 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죠. 악취가 정말 고약하니까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이 책을 들고 있는 샌드라 팽커스트
젊은 시절의 샌드라
이건 샌드라가 운영하는 STC의 공식 웹사이트에 올라가 있는 샌드라 사진
이 책의 저자 세라 크래스너스타인

 

출판사 책 소개를 보면 이 책이 2018년 빅토리아 문학상, 오스트레일리아 출판사업상, 도비 문학상 등을 휩쓸었다고 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이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호주 빅토리아 주를 배경으로 해서 그저 신기하고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책에서 언급되는 푸츠크레이(Footscray), 프랭크스턴(Frankston), 토키(Torquay) 등등이 다 내가 아는 곳이고 들어 본 지명이라 그저 너무 신기했다 ㅎㅎㅎ

서울에서 이 책을 읽는 것보다 샌드라의 삶에 0.1mm 정도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 그래 봤자 지명을 아는 것뿐이지만.

 

책은 샌드라의 청소 현장과 샌드라의 삶을 한 챕터씩 번갈아 가며 묘사한다. 트라우마 클리너라는 일도 물론 흥미롭지만 샌드라의 삶도 그에 못지않게 흥미롭기에 이런 방식을 택한 듯하다.

소떡소떡 먹듯이 재밌는 것과 또 다른 재밌는 거를 번갈아 읽으니 이 어찌 만족스러운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샌드라의 삶은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니 영화로 만들면 설정 과다라고 할 정도로 현실을 능가하는데, 안타깝게도 책의 교정 교열 수준은 별로다. 번역은 크게 거슬리는 부분 없이 별 무리 없이 읽을 정도인데.

위에서 인용한 문단에 세 번이나 등장하는 '쇠 지대'는 사실 책 본문에는 '쇠 지대'(강조는 본인)라고 잘못 쓰여 있었다. 한 번이면 오타라고 생각하겠는데 세 번 다 똑같이 틀려 있으니 이게 잘못된 줄 몰랐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 외에도 "회상할 때마다 민망해서 몸을 움찔거리게 되는 그 시절은 사춘기처럼 엉성하고 어색한 시기였고, <우리>라는 대명사 뒤에 숨어야만 묘사가 가능한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라는 대명사 뒤에 숨어야만 묘사가 가능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기에 대해 샌드라는 "아주 초기였고, 우리가 좀 투박했을 때였죠"라고 말했다."라는 문단에서는 도대체 왜 같은 문장(<우리>라는 대명사 ... 시기이기도 했다)이 반복되는 건지 모르겠다. 편집 과정에서 실수로 그런 게 아닐까 추측 중.

'아무것'은 붙여서 쓰는 게 맞는 한 단어이고, '서로   의'는 ('서로의'가 되어야 하는데) 뭐 하다가 이렇게 거리감이 생긴 건지 모르겠다. 역시 편집상 실수 같다.

하나만 더 지적하자면, 샌드라의 전 남편 조지를 묘사할 때 "머리가 벗겨지고 있었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머리는 '벗겨지는' 게 아니라 '벗어지는' 것이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작가나 번역가는 맞춤법을 틀릴 수 있다. 하지만 편집자는 그걸 잡아내서 고치는 게 일 아닌가. 이런 형편없는 교정교열 상태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다음 판에서는 싹 다 고쳐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트라우마 클리너 일이나 트랜스젠더의 삶에 대해 읽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권한다. 이만큼 흥미로운 논픽션 책은 또 오랜만인 듯!

 

+ 책 마지막 장에도 쓰여 있지만, 샌드라 팽커스트는 2021년, 60대 후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편안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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