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허새로미,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by Jaime Chung 2022. 5. 2.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허새로미,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바이링구얼(bilingual)'인 저자가 한국어를 다시 돌아보는 글이다.

모국어라서 너무 익숙해져 버린 한국어의 특징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그리고 또 책이 길지 않아서) 한 1시간 만에 뚝딱 읽었다. 정말 놀라운 책이다.

 

저자가 미국 대학원에 유학을 갔을 때 집도 구하지 못하고 데려간 황구(강아지 이름)와 추위에 덜덜 떨며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할 때 "어떻게 돼가요?"라는 말 한마디에 언어가 갑자기 봇물처럼 터져나온 경험이 이 책의 첫 꼭지이다.

이것도 물론 감동적이지만, 나는 한국어의 특징 또는 함정(부정적인 특징)을 짚어보는 꼭지들이 더 좋았다. 예컨대 이런 것들.

한국의 국적기 항공사들은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그저 예의를 지키고 친절한 정도가 아니라 '불편한 눈치'를 주면 '알아서' 해결해준다. 일본의 고급 료칸에서는 손님이 산책 나갈까 생각만 해도 방 밖에 신발을 가지런히 가져다 둔다고 한다. 나의 눈치를 빠르게 캐치하여 들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편안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셔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힘이 센 사람이다. 눈치 사회에서 말을 적게 해도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영화 속 부자나 갱단 두목이 손가락 까딱해도 주위에서 필요한 것을 척척 대령하는 장면도 같은 이치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 되면, 질문하고 자꾸 말 시키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나의 권위를 해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눈치가 마냥 억압이고 폭력인 것만은 아니다. 분위기를 잘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지능이 높고 협동적인 인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첫눈에 반한 사람끼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을 느낀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가족과 친구들은 기침 소리에도 상대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곤 한다. 그러나 눈치가 너무 많은 지시 사항을 생략하는 준엄한 백지이고 우리가 거기에 뭐라도 적어야 하는 수험생일 때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말이란 하는 사람이 바꿔나가야 한다고 믿으며 눈치의 시험장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가족들이 TV를 보고 있는 거실에 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정이 없네"라는 한마디를 맥락 없이 던져보았다. 가족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왜, 뭐 줄까?"라고 묻거나 그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정 없다'의 실체는 그때 확실해졌다.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달라는 얘기고, 나조차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달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정이 떨어진다는 말은 선언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위협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이 떨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정이 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가 서로 미워하며 살게 되는지 연락을 끓게 되는지 혹은 당신과 내가 그렇게 가까운 관계조차 아니어서 (포털 사이트의 댓글란에서 항의와 비난의 의미로 정 떨어진다고 적은 사례를 자주 보았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지는 알려진 바 없고 말하는 본인도 모른다. 
'손찌검'은 이상한 단어다.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는 뜻인데 어디를 얼마만큼 때리는지, 맞은 사람이 얼마나 아팠는지를 안개처럼 흐려놓는다. 손으로 때린 것은 알겠는데 몇 번이나 가격했는지는 모른다. 손을 쫙 폈는지 주먹이었는지 백핸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어린 시절 본 드라마에서처럼, 어쩌다 보니 손과 신체가 접촉했고 짝 소리 정도는 났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비교적 분명한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행위자와 당하는 사람 간의 위계 차이다. '손찌검'을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쳐보면 "사장이 욕설을 퍼붓고 손찌검을 했다" 혹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손찌검을 했다"와 같은 문장이 자주 보이는데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을 때린 경우나 모르는 사람을 때린 경우는 손찌검이라는 단어를 덜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감정적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이라면 '손찌검'이 될 확률이 높다. 상대를 쉽게 한 대 때릴 수 있는 권력이나 신체적 물리력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손찌검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한국에서 나서 자라면서 집에서, 학교에서, 혹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말을 예쁘게 하라는 요구를 종종 들어왔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언짢아지지만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말을 예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어는 말을 어떻게 맺느냐가 중요한 언어이므로 '해주세요'를 '해주실 수 있어요?' 정도로 바꾸라는 얘기일까? 즉, 좀 더 정중한 표현을 써달라는 것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보기에 예쁘도록' 무표정보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라는 것일까? 예쁘다는 것은 시각적인 판단인데 언어 신호를 어떻게 예쁘게 보낸다는 걸까?

말을 예쁘게 하라는 요구는 주로 직위가 낮은 사람, 여성, 어린이,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직종을 향한다. 국회의원, 대학교수, 혹은 중년 남성, 한국에 체류 중인 백인에게 말 예쁘게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

말을 시각적으로 예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예쁘다는 것은 주관적인 미추의 기준에서 시작하는 형용사이고, 단정하다거나 깨끗하다는 판단과 비교해봐도 어디가 어때야 예쁜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니 말문이 막히게 된다. 내가 하는 말의 형식이 무례했는지 혹은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존대를 더 강력하게 사용했어야 했는지 심지어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하던 얘기는 예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혹은 전체가 기각되고 만다. 여러 번 들으면 입 열기 무서워지고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게 된다. 정확히 뭘 바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요구한 적도 없는 승인을 유예당하는 일. 전달하고픈 핵심보다는 그 외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각을 내면화하는 일.

 

위에 인용한 문단들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충분히 보여 준 것 같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저 저자의 통찰력이 놀랍다는 말만 덧붙여도 충분할 듯.

언어에 대해 깊이 사유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사유를 바로 여기에서 모국어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이 책을 가이드로 삼는 것도 좋겠다. 

참고로 최근에 리커버 개정판이 나왔고, 이북도 개정판으로 이용 가능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