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참 신기하다. 분명히 어떤 상황이나 사물, 느낌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으면 그것을 딱 꼬집어 이러이러하다고 묘사하기도 어렵고, 그것을 타인에게 커뮤니케이션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일단 언어가 생기면, 모든 이들이 그걸 이해하고 오히려 그 단어가 없는 언어 또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워한다. 내가 최근에 그렇게 느낀 단어는 ‘썸’이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 양측이 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있을 때의 상황을 이젠 ‘썸을 탄다’라고 표현하니까, 이 단어가 없을 때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을까 궁금해질 정도이다. 언어는 그렇게 강력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영어로 된 ‘데이트 용어’를 살펴볼까 한다.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게 연애라는 험난한 과정을 헤쳐 나가나 (나는 지금 몇 년째 한사람과 연애를 하는 중이라 다시 연애 시장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궁금해하던 차에, 뉴욕타임스에서 ‘현대 데이트 용어 가이드’라는 기사를 보았다. 이 기사를 토대로 요즘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영어 속 데이트 용어를 알아보자. 알파벳 순서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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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드크러밍(breadcrumbing): 관심이 있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연락하고 데이트할 가능성도 비추면서 상대의 관심을 끌지만, 실제로 사귀지는 않는 것. 새나 작은 동물을 유도할 때 빵가루(breadcrumb)를 주듯이 상대에게도 ‘여지’를 준다는 뜻. 물론 ‘사귀지는 않을 거지만’ 그렇게 한다는 게 이 단어의 핵심이다.
- 콥웨빙(cobwebbing): 이전에 사귀던 사람과의 추억이 깃든 물건을 모두 처분하는 것. 예전에 둘이 찍었던 사진을 지우거나 상대의 전화번호를 삭제하는 것도 포함해서 상대를 ‘잊기 위해’ 하는 걸 말한다.
- 커핑(cuffing): 수갑을 뜻하는 ‘커프(cuff)’에서 유래한 말로, 한사람에게 정착하는 것, 특히 추운 시기(한국어 화자들이 흔히 하는 표현대로 ‘옆구리가 시릴 때’)에 그렇게 하는 것.
- 사이버플래싱(cyberflashing): 데이팅 앱이나 소셜 미디어 같은 디지털 수단을 통해 상대에게 원치 않는 성적인 이미지를 보내는 행위. 소위 ‘아담’이라고 하는, 자신의 알몸이나 성기를 노출하는 사람을 ‘flasher’라고 하고 그런 행위는 ‘flash’라고 하는데, 이건 사이버 세상에서 하는 거니까 ‘사이버플래싱’이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사이버 성범죄입니다, 여러분!
- 쿠키자링(cookie-jarring): 나중에 먹을 쿠키를 담아 두는 병(jar)처럼, 당장 사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나중에 사귈 수도 있는, 일종의 ‘보험’인 대상을 마련해 두는 행위. 진짜로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날 수 없거나 그런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 자존감 채우기용으로 ‘킵’해 둔 ‘보험’을 만나는 것이다.
- 플래그(flag): ‘플래그’, 즉 ‘깃발’은 ‘신호’를 말한다. ‘녹색 깃발(green flag)’는 청신호, 다시 말해 긍정적이고 상대가 나와 사귀기에 적절한 특징(예컨대 성격이 비슷하다거나, 유머 감각이 잘 맞는다거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붉은 깃발(red flag)’은 다들 예측할 수 있듯이 부정적이고 아마도 나와 맞지 않거나 위험한 신호를 가리킨다. 예컨대 상대가 장난으로라도 나를 때리려는 몸짓을 한다면 이쪽에서는 상대가 ‘붉은 깃발’을 보여서 피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베이지색 깃발(beige flag)’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신호라는 의미다.
- 가스라이팅(gaslighting): 이건 많은 분들이 아시듯이, 상대의 이성, 지각, 기억 등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어떤 사실을 부정하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별것 아니라고 무시하거나 하는 등의 수단을 이용한다.
- 고스팅(ghosting):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는 행위. 우리가 이미 아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잠수 탄다’라고 할 수 있겠다. 갑자기 죽어 귀신(ghost)이 된 것처럼 사라진다는 뜻이다.
- 러브 바밍(love bombing): 상대에게 지극한 애정을 쏟고 연락을 계속 해대서, 그 상대가 다른 사람들(가족이나 친구들 등)로부터 고립되게 만드는 것. 관계에서 통제력을 얻기 위해 행해진다. 엄청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을 보여 주며 상대가 자신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다 보면 상대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것이고, 그러면 그 상대를 휘두르는 건 시간문제다. 위험한 행위니까 상대가 이런 걸 시전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붉은 깃발’이구나 생각하시고 안전 이별 하세요!
- 오비팅(orbiting): 상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모두 끊거나 그 상대와 사귈 마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소셜 미디어에서 팔로우하거나, 그 사람의 포스트를 보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행위. 또는 현재 사귀지는 않지만 사귀고 싶은 사람을 소셜 미디어에서 관찰하지만 직접 다가가지는 않는 행위도 ‘오비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돌듯(orbit).
- 리즈(rizz): ‘카리스마(charisma)’의 약어이자 Z 세대들이 흔히 쓰는 말, 상대와 플러팅(flirting)하고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람의 성격이 매력적이거나 그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을 때, 또는 ‘뻐꾸기’를 기가 막히게 날릴 때 ‘rizz’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시츄에이션십(situationship): ‘상황(situation)’과 ‘관계(relationship)’의 합성어로, 두 사람이 자신들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하지 않는 로맨틱한 또는 성적인 관계. 사귀지 않으면서 할 건 다 하는 상황을 즐기는 ‘섹스 파트너(friends with benefits)’와 달리, 둘 다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식 여자 친구/남자 친구? 그냥 친구? 섹스 파트너?) 모른다는 게 큰 차이이다.
- 소프트 론칭(soft-launching): 자신이 만나는 사람의 자세한 신원은 숨기면서 그 사람의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것. 둘의 사이가 앞으로 잘될지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따라서 너무 일찍 이 사람에 대해 알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뉘앙스이다. 예컨대 상대방과 찍은 (얼굴이 다 나온) 사진을 올리는 건 아직 이른 감이 있으므로 상대방의 손만 나온 사진만 올리는 식으로.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과연 21세기, 2022년의 데이트 시장은 더욱더 험난해 보인다. 위의 용어들 중 소셜 미디어처럼 예전에 없던 것 때문에 생겨난 현상도 있지만, 예전에도 분명히 있었지만 이제 와서야 그걸 묘사할 ‘언어’가 생긴 것들도 보인다. 이래서 언어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가 보다. 어쨌거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늘 사랑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오늘도 연애 사업을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인 모든 이들에게 응원한다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여러분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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