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곽미성,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피자, 온갖 종류의 파스타, 가우디, 딘 마틴이 부르는 ‘That’s Amore’, 소피아 로렌, 그리고 특히 그녀가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Matrimonio all’italiana(이탈리아식 결혼)>(1964)… 내가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들이다.
이 책의 저자는 19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정착해 살아 오다가, 오랫동안 동경해 오던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한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이탈리아어를 프랑스어로 배운다? 중국계 캐나다인인 모 아이돌이 앞으로 데뷔할 보이 그룹의 중국 진출을 위해 중국어를 담당할 멤버의 후보로 오디션을 통과해 한국에 왔더니, 예상과 달리 중국어를 하나도 몰라서 강남역 학원에 다니며 중국어를 배웠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롭고 재미있지 않은가. 저자는 이탈리아에 여행을 갔을 때 이탈리아인들에게 도움을 받은 고마운 추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산다고 해도 여전히 구경꾼으로 남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탈리아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여행 이후 파리로 돌아온 저자는 어학원에 등록하고 토요일 아침 3시간씩 이탈리아어를 배운다. 거기에서 만나는 이탈리아어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또 이탈리아에 어학 연수를 다녀온 다른 학생의 ‘뽐뿌’를 받아 직접 이탈리아 볼로냐에 2주간 어학 연수(1주는 수업, 1주는 남편과 여행)를 다녀온 경험까지, 언어를 배우고자 눈물겹게 노력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저자가 이탈리아어 ‘초급’일 때 일어난 일들이라 할지라도 수업의 각 회를 꽤 밀도 있게 묘사하므로 실제로 현실의 시간으로 치자면 그리 길지 않을지라도, 글을 읽는 때만큼은 그 수업 한 회 한 회를 저자와 같이 겪는 것처럼 꽤 알차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나라의 언어이든 그 나라의 문화와 떼어 놓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이 많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 솔직히 아는 게 없고,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모두 딱히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따지자면 완벽하게 무관심한 제3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문화, 특히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의 국민성에 대한 분석은 너무나 흥미롭게 읽었다. 예컨대, 저자는 어느 날 수업에서 ‘~을 했다’는 의미의 복합과거 문법을 설명하는 단원의 예문 오디오 파일을 듣는데, 그 내용이란 이러하다. 세르지오가 발렌티나에게 어제 뭐 했느냐고 묻기에 발렌티나는 어제가 조르지오 생일이었어서, 마르타를 만나서 같이 에페리티프를 하고 파티에 갔다고 대답한다. 세르지오는 ‘무슨 조르지오?’ 하고 되묻고 발렌티나는 ‘우리 이웃 집 조르지오’라고 상기시켜 준다. 이에 세르지오는 “아 맞네! 오 맘마미아! 완전히 잊고 있었어! 맘마미아! 이런 망신이 있나!”라고 절규한다. 한국인은 이웃 남자의 생일을 잊었다고 이렇게까지 절박하고 절망적으로 절규할 일이 뭐 있나 싶겠지만 이탈리아는 이웃들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편이다.
이 오디오파일 속 대화문에는 이탈리아인만의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이레네 선생님의 주문처럼 대화에 감정이 과도하게 실려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에서 15년 넘게 산 영국인 저널리스트 존 후퍼는 저서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에서 다른 유럽인들과도 구별되는 이탈리아인만의 특성이라고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이탈리아 사람에게는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그래서 자유자재로 성질을 내는 능력을 익히게 된다. 목청을 의식적으로 높이고 몸동작을 크게 하노라면 이따금 상대방의 얼굴에서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과 함께 거의 유쾌한 놀라움이 뒤섞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동료의 말을 인용하며 이탈리아인과 다른 유럽인들의 차이를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차이에 비유한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인들을 보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다른 유럽인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내가 보기에) 이웃과의 관계에 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이탈리아어 수업에서 이런 설명을 들었다. “프랑스에서는 매해 5월 이웃 축제Fête des Voisins라는 날을 만들어 이웃들과 교류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날이 필요 없어요.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평소에도 잘 알고 지내고, 특히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이웃들끼리 어제 저녁에 뭘 먹었는지까지 알 정도로 가깝게 지낸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앞집 이웃’을 가리키는 명사가 따로 존재해요. 디림페타이오dirimpettaio라는 단어인데, 프랑스어에는 없는 명사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오디오파일 대화문 속 남자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때 남자는 혹시 커뮤니티의 손가락질과 비난이 두려웠던 게 아닐까. 미국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보니, 1세대 커뮤니티에서는 이웃끼리 너무 친한 나머지 아이들이 자기 집 저녁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같은 건물 다른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남자의 이웃들도 그만큼의 친밀한 관계일 수 있지 않은가. “글쎄, 2층 사는 세르지오가 3층 조르지오의 생일을 잊어버렸대.” “뭐라고? 세르지오가 그런 놈이었어? 상종 못 하겠네.” 이런 대화가 오가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면 나라도 남자처럼 절규할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탈리아어에 조금씩 더 익숙해져가면서 이탈리아인 특유의 성향을 하나 더 파악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대화가 먹는 이야기로 흐른다’는 것이다.
3개월 동안 진행된 첫 학기에서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시장에서 요리 재료를 사고,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호불호를 이야기하며 음식을 주문하는 법까지 마스터한 셈인데, 그다음 학기 수업에서도 음식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계속됐다. 가시밭길 같은 이탈리아어 수업에서 매번 음식이 주제로 등장하니, 이탈리아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비행기를 탈 마음의 준비가 된 나로서는 반가웠다. 이미 집에 이탈리아어로 된 요리책도 여러 권이고, 이탈리아 요리 관련 책도 많이 읽었던 터라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도 있었다. 이탈리아 문화 중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지고 대중적인 것이 오페라와 더불어 음식일 테지만, 그럼에도 프랑스인의 평균보다 더 많이 먹어 봤고,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또 한 가지, 이탈리아어 교재에 초반부터 이상하리만치 자주 등장했던 표현이 있는데 바로 “오프로 이오(Offro io)!”다. 우리말로 하면 “내가 쏜다!”, 혹은 “내가 낼게!” 같은 뜻인데, 나는 이 말을 “몇 시입니까?”보다 먼저 배웠다. 교재에 어찌나 자주 등장하는지 잊으려야 잊을 겨를이 없었고, 반복 끝에 “그라치에”, “본조르노” 같은 인사처럼 툭 치면 나올 정도가 됐는데, 과연 내 생애 한 번이나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이탈리아인도 한국인처럼 계산대 앞에서 “내가 낼게요”, “아니 내가 낸다니까. 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하며 실랑이를 벌이는 민족인가? 프랑스어로 “내가 쏠게Je vous invite!”라는 표현을 프랑스에 산 지 몇 해가 지나 알게 됐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어쨌거나 이탈리아인은 프랑스인에 비해 지갑을 여는 일에 화끈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친구에게 이탈리아어 교재가 얼마나 먹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지 이야기하자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말이 있어. 러시아어 교재에서는 모두가 공장에 일하러 가고, 프랑스어 교재에서는 모두가 카페에 간다고.” 그 말에 “맞아, 프랑스어는 그랬지. 러시아는 공장이래?” 하며 한참을 웃었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어라 함은 대체로 영어, 그것도 미국식 영어에 경도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외국어라 하면 역시 가까운 나라들의 언어, 즉 일본어와 중국어일 것이고,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등이 그 뒤를 따른다. 내가 배우고 싶은 언어가 ‘메이저’가 아니라도 어떠랴. 언어를 통해, 그리고 그게 안 되면 손짓발짓을 통해서라도 타인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일 텐데. 이 책은 굳이 이탈리아어를 동경하거나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언어를 통해 멀리 있는 이들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바람을 품어 본 적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싶은 이가 읽어 보면 더 좋을 듯하다. 언어를 더 열심히, 꾸준히 배워야겠다는 열의가 활활 불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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