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신예희, <마침내 운전>
나는 30대 초반이지만 아직도 운전 면허가 없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ㅈ소기업’이었기 때문에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회사의 규모가 작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회사가 직원들을 착취했고, 그곳에서 일하는 게 직원들 정신 및 신체 건강에 유해했기 때문에 ‘ㅈ소기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하면서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급기야 사장 부부 내외를 차로 들이받고 싶다는 상상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 정신 상태로 운전 면허를 땄다간 위험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도로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 일부러 면허를 따지 않은 게 지금까지 이르렀다.
진심 반, 농담 반인 변명은 이쯤 하고, 이 책 이야기를 해 보자. 저자인 신예희 작가는 내가 재미있게 읽은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과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를 썼다. 그는 젊은 시절 운전 면허를 따고 딱 두 번 운전해 봤는데, 하필이면 그 두 번째 운전 때 남의 차를 박는 작은 사고를 냈단다. 초보 운전자는 넋이 나갔고, 그 이후로 다시 운전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운전면허증을 장롱에서 꺼낸 것은 15년이 지난 후, 마흔 살이 되어서이다. 다시 아파트 주차장에서 운전 연수를 받고 운전을 시작했다. 이 책은 그가 마흔 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운전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마음 조마조마하게 초보 운전자 시절을 보냈는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그리고 어떻게 운전에 익숙해졌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저자답게 실수투성이 운전 이야기를 아주 유쾌하게 풀어놓는데, 그게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참고로 나처럼 운전을 모르는 사람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으니 안심하시라). 예컨대 이런 부분은 어떤가.
연수 마지막 날, 강사가 자그마한 장난감 자동차를 선물해주었다. 어머, 귀여워라. 이 시간을 오래오래 기억해달라는 의미일까, 라며 아련하게 감상에 젖으려는 순간 강사가 말했다. “이걸로 후방 주차 연습 좀 하세요. 종이에 주차선 그려서요.” 아 네, 잘 알겠습니다. 하긴, 연수 기간 내내 수도 없이 그를 기겁하게 만들긴 했다. 그새 득음했는지, 첫날과 마지막 날의 성량 차이도 상당했고. 내 거친 핸들링과, 불안한 깜빡이와, 그걸 지켜보던 강사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연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면 이런 부분?
그래도 뿌듯하다. 엄청나게 뿌듯하다. 차갑고 뜨거운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는걸. 뒤이어 야간 운전과 빗길 운전, 때론 두 가지가 합쳐진 운전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맞닥트렸고, 살기 위해 헤드라이트(전조등)의 세계를 영접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대낮에 면허를 취득한 관계로 라이트를 켜볼 기회가 없었답니다, 호호…. 처음 몇 번은 하이빔(상향등)과 헷갈려서 자꾸 엉뚱한 걸 켜곤 했다. 어느 늦은 시간, 신호 대기 중에 옆 차선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선 연신 손을 흔들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하아안참 전부터 내 차의 하이빔이 켜져 있었다며 호통을 쳤다. 예? 제가요? 아이구야, 족히 삼십 분은 켠 채로 밤길을 달렸으니 혼날 만했네. 이건가 저건가, 더듬더듬 겨우겨우 전조등으로 바꾸어 켰다.
와이퍼는 어땠냐고? 비가 갑작스레 후두두둑 쏟아지던 날, 눈에 뵈는 게 없는 채로 어찌어찌 사용법을 배웠다. 셀프 주유소에 진출한 날, 셀프 아닌 주유소에 진출한 날 모두 생생히 기억난다. 예희야 정신 차려, 너 경유 아니야. 노란색 노즐이 휘발유라고…, 라며 주문을 외웠지.
게다가 첫 차의 애칭은 ‘죄송이’였다고.
깜빡이는 마법의 버튼이다. 온 사방에 손가락 하트를 날리는 마음으로 꾸욱 누른다. 나의 첫 차 레이에겐 ‘죄송이’라는 애칭이 있었다.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다른 운전자와 보행자에게, 그냥 온 지구의 생명체에게 너무 죄송해서 그랬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정확히 뭘 잘못한 건진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내가 또 뭔 일을 저질렀겠거니 하며 일단 버튼부터 눌렀다. 죄송합니다, 좀 봐주세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기동력 덕분에 얻은 자유와 여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썼다.
운전은 내 삶을 바꾸어놓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깊은 변화다. 기동력을 손에 얻으니 온갖 가능성이 싹을 틔웠고, 금세 일상의 스케일이 커졌다. 마흔 살, 두려움을 안고서 선택한 덕분에 멋진 전환기를 맞이했다.
일찌감치 면허를 취득해놓고서도 오랫동안 운전을 미룬 이유는 여러 가지다. 방향치에, 겁도 많다. 거리 감각도 부족하다. 나도 남도 위험하게 만드느니, 세계 평화를 위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인간은 미지의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과연 그때는 하나같이 합리적인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하나같이 변명이다.
뭐, 덕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도 남도 안전하긴 했다. 하지만 나는 운전을 했어야 했다. 잔뜩 긴장한 채 부들부들 떨며 도로에 나갔어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못 들은 척 귀를 막고, 입가에 변명을 머금고서 십수 년을 미뤘다.
인생은 길다. 내가 지금 몇 살이든, 대충 타협하고 포기하기엔 언제나 너무 이르다. 그런 식이라면 다른 많은 것들도 손사래 치며 지레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마무리하자며 대충 얼버무리고 말 것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그러는 건 너무 아깝다.
아직 늦지 않았다. 늦다니, 그런 게 어딨어. 지나온 날에만 사로잡혀 잔뜩 센치해지는 대신, 부릉부릉 시끄럽게 내일을 향해 달리겠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저자는 마흔 살에 운전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8년이나 운전 경력이 쌓인, 나름대로 ‘경력자’ 운전자가 됐다. 읽으면서 저자가 참 존경스러웠다. ‘마흔 살에 웬 새로운 일, 웬 운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새로운 걸 시도하지 않아도 시간은 똑같이 지나가게 마련이다. 어차피 지나갈 시간, 무엇 하나 새로운 걸 시도해 보는 게 낫지. 그러면 나중에 뭔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도 저자만큼이나 조심스럽고 걱정이 많은 편인데, 저자 덕분에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났다. 새로운 일을 도전해 볼까 고민 중이신 분께 한번 넌지시 권할 만하다. 아니면 그냥 재미있는 에세이를 찾고 계신 분도 한번 거들떠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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