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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다지마 요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배>

by Jaime Chung 202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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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다지마 요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배>

 

 

최근 영화 <바비(Barbie)>(2023)가 흥행함에 따라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관한 평을 공유했다. 개중에 내가 보기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 하나는 (지금 원글은 삭제되고 없는데) ‘바비 후기: 이 영화를 단순히 탈코르셋으로 해석하면 필패한다’라는 글이었다. 이 글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게 오늘 후기의 주인공인 이 책을 읽도록 준비해 주었는데, 이 책의 제목으로 요약될 수 있는 중요한 콘셉트를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저자인 다지마 요코는 일본의 영문학자이자 저명한 페미니스트이다. 그녀는 여성의 처지를 갤리선의 노예에 비유한다. 태초에 남성은 남성끼리, 여성은 여성끼리 살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남성은 임신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활동이 자유롭고 벌이도 많아서 재산을 축적할 수 있다. 재산이란 모일수록 더 갖고 싶어지게 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진다.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병사가 됐든, 일을 시킬 수 있는 인력이 됐든 간에 말이다. 어쨌거나 재산이 모이면 그 재산을 후세에 물려 주고 싶어져서 혈통에 연연하게 되고, 핏줄이 확실한 상속자 아들을 가지고 싶어 한다. 따라서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약탈당하고 납치당해서 남자의 나라로 끌려오게 된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도구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임신을 하게 되고, 체력은 쇠약해지고 도망치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남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여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여러 가지로 궁리한다.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발을 작게 만든 중국의 전족이 그 방법 중 하나다.

거기다 복장으로 여자의 몸을 구속합니다. 기모노나 치마가 그에 해당합니다. 동시에 윤리 도덕으로 여자의 몸과 마음을 구속합니다. ‘처녀 숭배’나 ‘정조’ 관념도 거기서 생겨났습니다. 그런 다음 결혼제도로 여자를 구속하고 결혼 제도에 기꺼이 둘러싸이고 싶어 하는 멘탈리티를 가진 여자들을 만들어냅니다. ‘여자다움’이라는 사회 규범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자는 남자의 노예가 되도록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온갖 속박을 받고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결혼 제도는 애초에 남자들이 여자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고안해낸 것입니다. 여자들끼리만 있게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단결해서 도망을 꾀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여자의 몸을 구속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던 남자들은 식민지 지배의 철칙 중 하나인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기법대로 주인 한 명에 노예 한 명, 남자 한 명에 여자 한 명을 할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 제도라는 미명하에 숨겨져 있는, 그 기저에 깔린 사고방식입니다. 여자가 결혼해서 상대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한 자신은 남자의 부하이며 노예인 것입니다. 이 ‘노예선’을 젓는 여자들을 저는 ‘주부 노예’라고 부릅니다.

 

남녀가 완벽하게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는 한, ‘사랑’ 또는 연애 결혼이라는 아이디어는 오히려 여성에게 유해하다. 그 개념 하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삶을 남자의 발밑에 내려놓는 일을 ‘기쁘게’ 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제도로서 있는 한 ‘사랑’은 오히려 이 제도를 온존시키는 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 여자들은 이 부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연애 결혼이 생겨서 오히려 더 어려워진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 할머니 시절에는 얼굴도 전혀 모르던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렇기에 노예가 되어 의무를 다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영혼까지 팔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연애해서 결혼하면 여자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그저 다 바칠 따름이니 남성 사회에 이만한 이득이 또 없습니다. “그래도 여자라면 연애 결혼이 훨씬 기쁜 일이죠. 적어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고를 수 있으니까요. 똑같이 노예가 되고 똑같이 헌신하는 것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연애 결혼을 통해 결혼이 즐거워진 대신에 더 착취당하기 쉬워졌다는 생각도 가능합니다. (…)

똑같은 노예 일을 하루 종일 하더라도 최소한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즐거울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한마디라도 “와, 당신이 만든 요리 정말 맛있네!”라는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기꺼이 매일 정성을 다하겠죠. 똑같은 노예라도 마음 편하고 즐거운 노예로 있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도 죄의식을 품지 않아도 되고 말이죠. 이러니 여자가 갤리선의 배 밑바닥에 있는 조건에서는, 사실은 연애 결혼만큼 남자에게 이득인 것은 없다는 겁니다.

물론 황후귀족과 노예 사이에도 애정은 있고 인간과 개와 사이에도 사랑은 생겨납니다. 사랑은 어디에나 어떤 상황에서도 생겨납니다. 그것이 인간의 훌륭한 점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사랑이 있고 없고만으로 생각하면 대상의 실체가 잘 안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민주적이지 못한 신분 관계로 유지된다면, 사랑은 지배의 다른 이름이고 남자의 어리광도 역시 지배의 다른 이름이 됩니다. 남성 문화가 남자에게는 일을, 여자에게는 사랑을 할당한 것은 결국 이 결혼이라는 착취 시스템을 존속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남성 사회에 과잉 적응한 여자들마저 같은 여자들에게 사랑만이 유일한 여자의 삶이라고 부추깁니다. 지금까지야 그것밖에 살길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제 슬슬 눈을 뜨는 게 좋을 때가 왔습니다.

 

세상에 멋진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이 ‘사랑’이라는 생각 하나 때문에 그 똑똑한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는 게 얼마나 화딱지가 나는지. 한 가지 더 공감한 부분을 공유하자면, ‘여자의 복장이 드러내는 여자라는 신분’이라는 소제목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일련의 문단이다.

우리는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이나 색상, 무늬를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규제가 작용하고 ㅇ씨고 무의식중에 그 규제에 따라서 디자인이나 색상과 무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수수한 색과 무늬를 입는다든가,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남자아이라면 블루, 여자라면 핑크 옷을 선물한다든가 말이죠. (…)

그렇게 생각해 보면, 여자가 온종일 ‘여성스럽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복장을 입어야 한다는 건 여자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자의 옷차림 역시 여자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

치마보다 움직이기 편하고 일하기 편해서 바지를 골랐는데 “여자니까”라는 이유로 금지된다면 도대체 여자의 복장이란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여자가 활동성 있는 남자들 옷을 자유롭게 입지 못한다면, 원래부터 여자의 복장 그 자체가 여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남자보다 못한 신분을 표현하는 차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에는 “바지를 입은 자가 자유를 갖는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것은 남자들에게 하는 말이긴 하지만, 활동성 있는 바지를 입는 사람이 더 인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복장은 시대가 지날수록 자유를 속박하는 쪽으로 갑니다. 인간은 두 다리로 걸어다니니까 바지류의 옷이 가장 활동하기 편할 겁니다. 무라카미 노부히코의 <복장의 역사>에 따르면, 고대에는 여자나 남자나 지금의 잠방이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엔 여자도 군사, 정치, 경제 같은 온갖 일에 관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성의 지배력이 강해짐에 따라 여성의 복장은 두 다리를 하나로 묶는 형태가 됩니다. 헤이안 시대 이후의 여자의 재산이 남자 쪽으로 옮겨지고 나서는 남자의 하카마는 발이 나오는데 여자의 하카마는 발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다리가 나오지 않으면 걷는 것도 불편하고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기모노와 타이트스커트도 다리를 하나로 묶기 때문에 활동이 속박당합니다. 속박될 뿐만 아니라 하반신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외부에서 손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즉, 강간 같은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기모노나 치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여자 교복이 일률적으로 치마로 정해져 있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나도 중고등학교 때 치마 교복을 입었고, 어제는 남의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치마를 입고 또 발이 무척 불편해지는 힐을 신었기 때문에, 이 말에 120% 공감했다. 저자 말대로, “바지보다 활동성이 적은 복장을 억지로 입어야 하는 것은 불편을 강요당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구속이고 속박이며 차별일 뿐입니다.” 최소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활동하기 편한 바지를 입혀야 하지 않나? 여자 중고등학생에게 치마를 교복으로 입히는 건 ‘어쨌든 너희는 여자니까 불편한 치마를 입어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닌가. 요즘에는 나 때보다 그래도 바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조금은 늘어난 것 같지만, 아예 애초에 치마 대신 바지 교복을 기본으로 만드는 게 맞는 것 같다.

 

정말이지, 이 책을 읽으며 눈이 뜨인 기분이었다. 기존의 사고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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