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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마키부로(원작), 무라사키 마이(그림), <악역 영애 안의 사람>(라노벨) / 마키부로(원작), 시라우메 나즈나(글, 그림), <악역 영애 안의 사람>(만화)

by Jaime Chung 202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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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마키부로(원작), 무라사키 마이(그림), <악역 영애 안의 사람>(라노벨) / 마키부로(원작), 시라우메 나즈나(글, 그림), <악역 영애 안의 사람>(만화)

 

 

⚠️ 아래 독서 후기는 마키부로가 쓴 <악역 영애 안의 사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에미라는 평범한 대학생이 ‘별의 소녀와 구세의 기사’라는 여성향 RPG 게임 속 악역인 레밀리아의 어린 시절에 빙의한다. 에미는 레밀리아가 부모에게나 다른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기에 남주인공 윌리어드에게 집착하고 결국 악역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기에 레밀리아를 불쌍하게 여겼고,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진짜로 레밀리아에 빙의하게 되자, 에미는 자신(레밀리아)의 주변 인물들을 모두 힘껏 도와 그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는다. 이는 에미가 단순히 게임에 관한 지식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에미가 타고난 따뜻하고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느 날, 원작 게임의 여주인공인 ‘별의 소녀’ 피나가 등장하는데 알고 보니 그녀 역시 이것이 게임임을 알고 있는 현대인이 빙의한 것이었다. 문제는 피나가 윌리어드, 데이비드, 스테판, 클로드 등의 공략 가능한 남성 캐릭터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는 물론이요, 현질 아이템까지 써가면서 (에미가 빙의한) 레밀리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 자기도 모르게 홀린 황태자 윌리어드는 (에미가 빙의한) 레밀리아에게 파혼을 선언하고, 자신이 신뢰를 쌓아 왔다고 생각한 상대에게 이런 배신을 당한 에미는 레밀리아의 몸 속에서 의식을 잃고 만다. 그동안 에미가 움직이는 레밀리아의 몸 속에서 에미가 하는 행동을 보며 에미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하고 진심으로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아이인지를 알게 된 레밀리아는 이 순간 다시 자기 몸의 주권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가 사랑하게 된 에미를 위해서라도, ‘악역 영애 레밀리아의 행복’을 위해 에미를 이렇게 만든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하는데…

줄거리 요약을 쪼오끔 길게 했는데, 이게 (만화 기준) 첫 2화 정도의 줄거리이다. 이게 요즘 리디 북스 코믹 중 다운 1위라고 들었는데, 직접 읽어 보니 왜 그런지 확실히 알겠다. 무척 흥미진진하다. 만화판이 너무 재미있는데 현재 국내에는 1, 2권만 나와 있어서 (일본에서는 3권까지) 원작인 라이트 노벨까지 구입해서 읽었다. 총 4권(만화 2권, 라이트 노벨 2권)을 하루 만에 호로록 다 읽을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하고 재미있었다. 일단 분량부터 이야기하자면, 만화 버전은 2권까지가 대체적으로 원작 소설의 1권의 절반 정도 되니까, 이 정도 페이스로 만화를 계속 낸다면 아마 8권까지 나올 듯. 원작에서는 한두 문단으로 가볍게 넘어간 것도 만화에서는 조금 더 이야기를 짜넣어서 극화했는데,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예컨대 마족 상인의 경우는 원작에서는 이름도 없는데 만화에서 ‘손’이란 이름이 생겼고 고양이를 닮은 매력적인 얼굴도 얻었다. 만화를 성공적으로 만든 또 다른 요소는 역시나 캐릭터 디자인이 아닐까. 원작 라이트 노벨에도 삽화는 있었는데 확실히 만화 버전이 더 레밀리아가 긍지 높고 능력치도 뛰어난 악역 영애 느낌이 잘 산다.

하지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에 이 만화/라이트 노벨이 잘되지 않았나 싶다. 요즘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없는 웹소설이나 웹툰 찾기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나는 뭐 그렇게까지 이 소재들을 싫어하지 않아서 이 작품에도 기회를 줘 봤다. 내가 어떤 캐릭터에 빙의를 하면 그 캐릭터의 원래 주인인 사람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이건 그런 점을 다루고 있어서 신선했다. 게다가 악역 캐릭터에게 서사를 주는데, 사실 알고 보면 선역인 캐릭터(’별의 소녀’ 피나)가 악랄한 짓을 했기에 100% 정당 방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악역 캐릭터가 어떻게 악역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다가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 버린 디즈니의 <Cruella(크루엘라)>(2021)보다 훨씬 낫다. 일단 에미라는 인물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 아주 마음이 선하고 선해서 게임 속 인물에게 빙의되었을 때 ‘여긴 어디야? 나는 누구야?’ 하는 놀라움보다, 원래 살던 시대와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가족을 볼 수 없어서 슬퍼하고 ‘(가족을 놔두고) 죽어서 미안해’라며 엉엉 우는 인물이라니. 게다가 자신이 가진 게임에 관한 지식과 자기가 원래 살던 시대의 지식을 자기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사용한다. 이 만화/라이트 노벨을 다른 이들도 그대로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스포일러는 안 하겠지만, 극 초반에 언급되는 예시를 들자면 의붓동생 클로드의 아버지(=레밀리아의 숙부)가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시나리오도 막았다. 클로드 외에 주변 사람 하나하나 모두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 주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는다. 정말 햇살캐라고나 할까. 이렇게 선한 인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훈훈했다. 극 중 레밀리아의 표현대로, “타고난 착한 성품. 도울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않고는 못 배기고 그러기 위한 노력은 일체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이 에미였다.” 나는 이렇게 올곧게 선한 인물이 좋더라.

어쨌거나 그녀가 의식을 잃고 나서는 레밀리아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에 그녀의 행복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칼을 간다.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는 복수물인데 요즘 유행하는, ‘참교육’ 감성이 아닌 것도 좋았다(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일 때 그런 ‘참교육’ 운운하는 작품이 있던가?). 레밀리아는 오직 에미를 향한 사랑으로 성실히 노력해서 자기 능력치를 올리고 자기 머리를 굴려서 세운 계획으로 아주 차근차근 복수를 진행해 나간다. 나는 고대 희랍 신화의 소위 ‘악녀’들이라 불리는 이들, 예컨대 클뤼타임네스트라, 메데이아, 키르케 같은 여인들을 좋아하는데, 여기 레밀리아에서도 그런 ‘위대한 마음(megalopsychia)’가 느껴진다. 어떤 의미로든 큰일을 하려면 통이 커야 하는 법. 레밀리아는 분명히 그릇이 커다란 사람이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여장부들을 좋아한다면 레밀리아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레밀리아가 머리를 써서 복수를 하나하나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는 게 정말 짜릿하그든요.

악역 영애물은 이제 좀 식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만큼은 다르다. 이미 이 작품은 GL로 착즙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GL 팬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재미있으니까 그냥 한번 보세요! 재미는 보장합니다! 만화로 부족하면 라이트 노벨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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