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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토 마사아키, <플레이밍 사회>

by Jaime Chung 202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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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토 마사아키, <플레이밍 사회>

 

 

부제목이 설명하듯, ‘캔슬 컬처에서 해시태그 운동까지 그들은 왜 불타오르는가’를 연구한 책. 일본인 저자가 일본의 사건을 위주로 (예외적으로 ‘미투(#MeToo)’ 운동은 미국 위주로) 대부분의 현상을 살펴보고 설명하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인 독자들에겐 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은 물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예시로 드는 사건들이 아무래도 외국 일이다 보니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엔 좀 어렵달까. 저자 말이 맞으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비판적인 사고를 견지하며 읽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뭘 알아야 평가를 하지!).

저자의 설명 중 내가 제일로 공감한 건, ‘약자’의 위치 선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래 인용문의 맥락을 설명하자면,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오사카부 지사가 휴업 요청에 응하지 않는 파친코 가게의 이름을 공표했고, “일부 사람들이 이 점포로 몰려들었고, 그 외에도 각지의 파친코 가게에 다양한 공격을 가하는 등 그 폭주가 가속화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가게도 잠시 문을 닫아야 하고, 소비자들도 외출 및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의 이용을 자제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못했던?)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이나 구마모토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이재민에 대한 애도와 공감, 지원 등이 일본 전역을 뒤덮었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다양한 활동으로 구체화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종이 학을 접어서 보내 주는 걸 말하나?), “이번 코로나19의 경우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유가 뭘까?”

우선 ‘약자’에 대한 정의와 관련이 있다. 즉 지진 등이 발생했을 때는 어디까지나 피해를 입은 이재민이 약자로 인정된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피해자인 감염자뿐만 아니라 경제 활동 제재에 따른 간접적인 피해자로서 영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거나 고객을 잃은 상인, 나아가 그 거래처 등 다양한 존재가 약자의 정의에 포함되기는커녕 오히려 약자를 정의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류의 누구나 잠재적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약자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니 애초에 누구를 배려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더욱 심각한 이후로 ‘약자’의 위치 설정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거기에서는 ‘강자인가 약자인가’라는 축에 더해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라는 또 다른 축이 문제가 된다. 즉, 지진 등 재해 상황에서 이재민은 어디까지나 그 피해자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의 경우에 감염자는 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도산이 두려워 영업을 계속하려는 점포 등도 잠재적인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로도 취급된다. 그 결과, 약자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여겨지면서 반드시 배려해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약자를 약자로 간주하기 어려워졌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국민 마음에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누가 약자인가’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저자는 “2000년대 이후에 우리는 약자를 약자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솔직하게 내밀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저어하며, “그 결과, ‘누가 약자인가’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그것으로부터 ‘약자의 특권’이라는 궤변이 만들어지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보는 현상, 다시 말해 ‘내가 약자니까 네가 배려해 줘야 해 빼애애액’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좋은 답변보다 좋은 도망법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나야말로 약자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즉 음식점, 생활보호수급자, 재일 교포 등은 특권을 얻기 위해 약자인 척하고 있을 뿐인 ‘가짜 약자’이며 오히려 그러한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약자’라고 답해 보리면 이 귀찮은 질문에서 매우 간편하게 벗어날 수 있다.

‘바야흐로 여성 상위 시대’, ‘알파걸들의 시대’ 운운하며 이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뒤처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마치 남성이 언제 단 한 번이라도 약자였던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나, 자기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니까 여성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며 시스젠더 여성의 자리와 권리를 빼앗아오려는 자들(예컨대 MTF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스포츠 리그가 아닌 ‘여성’ 스포츠 리그에 굳이굳이 끼어드는 이들)은 이 인용문을 읽고도 느끼는 바가 없을까?

 

제2장 ‘소셜 미디어의 논리와 신자유주의 정신’에서는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테러’를 한 이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스테이크 체인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학생이 냉장고 안에 들어가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린 한 아르바이트생의 이야기를 든다. 이 체인점은 단 며칠 만에 “클레임이 5센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파일에 가득” 찼다고 한다. “게다가 그러한 불만을 제기한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의 단골손님이 아니라 가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었다고. 이들이 분명 잘못된 일을 한 것은 맞지만, ‘대단한 악행’이라고 부를 만한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게는 그다음 날부터 휴업하고 일주일 후에는 문을 닫았으며, 학생이 다니던 전문학교에도 항의가 접수되었고 학생은 당분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무거운 벌을 받은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일찍이 “우리는 어떤 행위가 범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비난하기 때문에 범죄인 것이다”라고 논한 적이 있다. 즉 범죄가 범죄인 것은 그 행위 자체에 내재한 성질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비난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 결과, 그것이 범죄로 취급받게 되어 더욱더 범죄가 된다.

많은 이들이 위에서 언급한 아르바이트생의 행위를 ‘나쁜 일’이라고 정의하고, 그 사람에게 일탈자 딱지를 붙인다. 그 과정에서 그것은 점점 “‘나쁜 일’이 되어 가고 결국엔 ‘테러’, 즉 ‘터무니없이 나쁜 일’로 간주되고 게시자에게는 엄벌이 내려진다.” 뒤집어 말하자면 질책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나쁜 일이라고 규정하는 ‘좋은 일’을 하는 셈인데, 소셜 미디어에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유지하며 자신을 연출한다. 즉, ‘나는 이렇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분하고 비난하는, 개념 있는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을 세우는 행위이자 이를 쇼처럼 보여 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지적이었다.

 

책의 제목이 ‘플레이밍 사회’인 이유는 이렇다. 저자가 원문에서 ‘염상(炎上; 불이 타오름)’이라고 쓴 것은 ‘비난, 비방 등의 글이 빠르게 올라오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플레이밍’으로 번역했다고. 실제로 영어권에서 ‘flaming’은 ‘온라인에서 모욕, 비방을 계속해서 포스트하는 형태의 사이버불링(cyberbullying)’을 뜻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자가 언급하고 예시를 드는 사건의 대부분이 일본의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이 사건들에 관한 약간의 조사를 할 의향이 있다면 이 책이 ‘불타오르는’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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