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마이클 투히그, 클라리사 옹,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by Jaime Chung 2023. 10. 23.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마이클 투히그, 클라리사 옹,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제목을 보자마자 이건 나를 위한 책이라는 느낌이 왔다. 읽어 보니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완벽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라는 생각으로 실수나 작은 흠도 견디지 못하고 나를 괴롭혀 왔다. 최근에는 사수에게 일을 배우다가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수는 내가 잘못한 걸 짚어 주고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를 친절하게 알려 줬을 뿐인데, 나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사실 하나에 큰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이 가르쳐 주는 대로만 하면 정말 인생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따. 완벽주의에 시달려 온 이라면 ‘완벽이라는 신기루’라는 저자들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나는 완벽주의가 ‘결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말에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맞다. 기껏 어려운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걸 이루어도 마치 그게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내 성취를 깎아내렸으니까.

완벽은 실체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완벽에 도달하는 것이 이룰 수 있는 목표라면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지 않다. 완벽의 문제점은 그 어떤 것도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고 보는 데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언제나 결함, 실수, 실책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완벽의 정의 자체도 끊임없이 변한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생각했던 완벽이라는 개념은 막상 그곳에 도달하면 달라진다. 따라서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코 잡을 수 없다. 마치 당신과 게임을 하는 상대가 당신이 앞설 때마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과 같다. 불공평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게임이다.

완벽주의의 변덕은 고통을 유발한다. 원대한 목표를 달성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아라. 처음에 당신이 설정한 그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똑똑하고, 강인한 사람만이 달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감히 달성할 수 없을 거라 여긴다. 목표는 장학금일 수도, 직장일 수도 있으며, 턱걸이 기록일 수도 있다. 당신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 목표만 달성하면 그동안 갈구했던 인정과 보상을 받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예정대로 그 게임에서 이겼는가? 아니면 규칙이 바뀌었는가? “내가 해냈어! 난 정말 대단해!”라고 말했는가? 아니면 곧바로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라며 당신의 성취를 폄하하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는가? 완벽이라는 것은 좇아야 한다고 주입된 하나의 신기루일 뿐이며, 당신은 자꾸만 그것에 속아 결코 이길 수 없는 게임에 휘말리고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저자들은 완벽주의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눈다. ‘적응적 완벽주의’와 ‘부적응적 완벽주의’.

완벽주의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적응적’ 완벽주의와 ‘부적응적’ 완벽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적응적 완벽주의자는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유형을 말한다. 그들의 성취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행복, 삶의 만족, 성실성과 같은 긍정적인 결과물과 연결되어 있다. 적응적 완벽주의자들은 고도로 생산적이면서도 탈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삶의 방식을 좋아하고, 이 방식은 그들에게 자연스럽다.

반면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자기비판,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에 대한 집요한 추구,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의 고통, 도달했을 때의 불만족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적응적 완벽주의에 우울, 강박장애, 섭식장애, 불안장애 같은 심리상태가 수반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외에도 일상적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기분과도 연관성을 보인다. 이러한 연관성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나타나며 부적응적 완벽주의가 문화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모순적이게도 달성하고자 하는 바로 그 목표를 훼손한다. 성공일 수도 있고, 행복일 수도 있으며, 생산성일 수도 있는 목표 말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내가 하려고 했던 건 부적응적 완벽주의였다. 혹시나 내가 추구하는 완벽주의가 적응적인지, 부적응적인지 잘 모르겠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래 인용문도 참고하시라.

예상대로 이 책은 부적응적 완벽주의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알아야 할 것은 부적응적 완벽주의의 중심에는 혹독한 자기비판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혹독한 자기비판이란 그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퍼붓는 비판을 뜻한다.

자기비판은 마치 무한 재생되는 인공지능 플레이리스트처럼 가장 깊은 내면의 불안을 학습하며 점점 더 악랄해진다. 선택적으로 증거를 수집해서 당신이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증거는 배제하고,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에 대한 ‘진실’로 고문한다. 자기비판을 우리에게 덤비는 다섯 살짜리 아이 정도로 가볍게 다룬다면 별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자기비판을 진실로 받아들이면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자세한 내용은 제5장 ‘자기비판의 현실’ 참조).

부적응적 완벽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원칙, 기대, 기준을 엄수한다는 점이다. (…)

부적응적 완벽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그 기준을 맞추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주관성을 자신이 실패했음을 납득시키는 데에 이용하곤 한다. 시한을 맞춘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으니까. 훌륭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잘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니까. 완벽주의자는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에 도달했어도 그것을 성공으로 치지 않는다. 도달할 수 있었다면 그 목표는 애초부터 너무 쉬운 목표였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다면 당신이 성공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돌이켜보기 바란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견고한 객관적 기준이 있었는가? 아니면 자신이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는 독단적 기준이었는가? 성공의 정의가 수시로 변하고 규칙이 끊임없이 달라진다면 아무리 잘해도 당신은 결코 이길 수 없다.

이 책의 리뷰를 읽을 정도로 불안함을 자주 느끼는 완벽주의자들이라면 대체로 부적응적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계신 분들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애초에 목표가 잘못돼 있으니 깨진 독에 물 붓기처럼 계속 노력해도 끝이 안 나고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할까? 저자들이 제시하는 방법을 간단히 세 가지로 요약해 소개하자면 이렇다. 첫째, ‘생각은 생각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고 생각에 휘둘리지 않기. 둘째,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를 설정하기. 셋째, 자기친절 베풀기. 하나씩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일단, 생각은 생각일 뿐이라는 건, 말 그대로, 내 생각이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라는 거다. 예컨대, 당신이 ‘빨래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 생각으로 인해 곧장 빨래통을 들고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게 되지는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은 정말 생각일 뿐이다. 빨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빨래통을 하루 종일 노려봐도 실제로는 빨래를 하지 않을 수 있고,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십 년간 계속해서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 생각 자체는 힘이 없고, 진짜로 힘이 있는 건 그 생각을 따르는 우리 자신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뉴에이지’ 같은 느낌이 드나요?)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지 말고, 그 생각을 믿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살펴보라.

진화적 관점에서 보는 생각과 느낌의 위력과는 별개로 생각과 느낌이 반드시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생각과 느낌은 실제로 그 어떤 행동도 하게 만들지 못한다. 당신은 직관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해서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아이가 실제로 하늘을 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의지’만으로 변화를 이룰 수는 없다. 의지를 끌어모은다고 저절로 행동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라는 것은 당신이 그 행동을 할 때에만 일어난다. 반대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은 감자칩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나 또다시 일을 미루어선 안 된다고 생각할 때처럼 말이다. 이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생각 자체가 힘을 지닌 것이 아니라 생각에 복종하는 것이 힘을 지닌 것이다.

대신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권한다. 첫째, 생각을 생각으로 여겨라. 생각은 생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둘째, 사고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라.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건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셋째, 생각들이 하는 말을 고려하되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라. 논리에 맞고 진실처럼 보이는 것(일관성)보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기능)에 집중하면 완벽주의의 덫을 피할 수 있다.

 

두 번째,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를 찾아라. 저자들 말대로, “무엇이든 가치가 될 수 있다. 신념의 옹호, 진정성, 자율성, 연민, 창의성, 소통, 청렴,신뢰, 자연 모두 가치가 될 수 있다.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 설레며 하루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라. 거기서 출발해라. 가치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으며,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다. 당신이 선택했기에 옳다.” 완벽주의의 원칙이 아니라 가치를 따르면, 그것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은 조금 더 감당할 만해진다. 적어도 그것들은 우리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성공하기’처럼 주변 사람들의 기대나 바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에 교회 가기’처럼 할 일 목록에 적었다가 쉽게 완료하고 지울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사랑받기’처럼 당신의 통제권을 벗어난 것도 아니다. 가치가 자신의 통제권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본래 사랑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사랑받기 위해 항상 더 노력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랑받기’는 처음 두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사랑받는 것은 스스로 일으킬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될 수 없다. 사랑스럽게 행동하기로 선택할 수는 있지만 사랑받는 것을 당신이 선택할 수는 없다. 가치가 자신의 통제권 안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가치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개념과 연결된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가치를 선택한다면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권력을 무심코 양도하는 것이다. 결국 무력감을 느끼게 되고 느낌과 원칙이 행동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은 행동의 결과를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 일을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감수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낙제해서 그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고, 애인과 영화를 보기로 한 날 바람을 맞혀서 그의 분노를 사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선택이 아무리 내키지 않더라도 여전히 선택은 선택이다. 나는 졸업 후에 취업 원서를 내기로 선택했다. 모두에게 친절하기로 선택했다.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기로 선택했다. 비행기 출발 네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기로 선택했다. 매주 일요일에 빨래를 하기로 선택했다. 행동들을 선택으로 인식한다면 당신이 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들도 분명해진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의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기로 선택하는 대신 의욕이 없는데도 시작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원칙과 두려움이 아닌 가치에 기반을 둔 선택을 할 때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그려보아라.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당신을 완벽주의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충족감과 활력을 준다. 완벽주의 원칙들과 가치가 팽팽하게 대립할 때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옳은 게 중요한가, 자유로운 게 중요한가? 가치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평생 당신의 행동을 통제해왔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 걸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쭐해진 어린아이처럼 세상이 주는 온갖 선물이 그 두려움을 덮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자기 친절은 말 그대로 자신에게 친절,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리 완벽해지려고 노력해도 당신은 인간이니까. 인간은 실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가족이나 친구 등 소중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신에게는 막말을 하고 가혹하게 구는가? 남에게 주는 사랑과 이해심을 자신에게도 베풀어야 한다.

완벽주의의 관점에서는 단순히 스스로에게 실수를 허용하는 것이 자기친절인 경우가 많다. 상사에게 보낼 이메일의 인사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한 시간 넘도록 고민했다면,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해서 보내버리는 것이 자기친절이다. “인사말을 제대로 못 썼어도 괜찮아. 상사가 내 메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난 괜찮은 사람이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자기친절은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마치 해독주스를 마셔서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것처럼 어쩌다 한 번씩 작정하고 선심 쓰듯 자신을 돌보면 평상시에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마구 갈구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친절의 행동으로 아주 거창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친절의 장벽을 높이며 결국 자기친절의 기회를 더욱 피하게 된다. 마치 팔굽혀펴기를 하루에 300개씩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것과 같다. 무리한 목표를 세우면 어떻게든 운동을 피할 궁리만 하게 되지 않는가.

자기친절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당신이 그런 친절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자기친절은 일종의 특별대우라 훌륭한 일을 성취했을 때에만 누릴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기 쉽다.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양치질을 할 자격을 얻기 위해 특별한 일을 해야만 하는가? 완벽주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당신이 결코 충분히 잘할 수 없으리란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자기친절을 누릴 자격이 있을 정도로 잘한 일은 결코 없다’, ‘목록에 적혀 있는 모든 일들을 해치우기 전에 휴식이란 있을 수 없다’, ‘비호감에게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결과물에 칭찬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자기비판의 해독제가 바로 자기친절인데 자기비판이 자기친절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주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저자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친절하게 잘 설명해 주니까 책을 읽으면 더욱더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처방(’생각은 생각일 뿐이다’)을 완전히 익혀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불안감이나 완벽주의뿐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도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삶이 가벼워질까.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처방을 제안해 주므로 불안함과 완벽주의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