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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염승숙, 윤고은, <소설가의 마감식: 내일은 완성할 거라는 착각>

by Jaime Chung 2023.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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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염승숙, 윤고은, <소설가의 마감식: 내일은 완성할 거라는 착각>

 

 

나는 오늘, 이 리뷰를 쓰기 전 스테이크에 치즈를 곁들인 (냉동) 야채(를 해동한 것)를 먹었고, 후식으로 단게 당겨서 커스터드대니시를 먹었다. 굳이 뭘 먹었는지 밝히는 건, 오늘 소개할 책이 글 쓰는 이들이 먹는 음식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블로거도 작가라고 치고, 매주 포스트하는 글을 써야 하는 것도 마감이라고 친다면.

<소설가의 마감식: 내일은 완성할 거라는 착가>은 두 소설가, 염승숙과 윤고은이 쓴, 소설가의 음식에 관한 에세이이다. 이 두 소설가는 팟캐스트 <테이블>을 진행했고, 그 팟캐스트 내의 코너인 ‘쓰는 동안, 입은요?’에서 이 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이 리뷰를 쓰면서 검색해 봤는데 <테이블>은 2019년에 종료되었고 이전 방송들도 다 삭제된 듯하다). 소설가들이 글을 쓸 때 먹는 음식, 또는 원고를 송부하고 나서 자축의 의미로 먹는 음식 등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곳이 이 책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솔직히 나는 이 두 저자를 잘 알지 못했는데, 읽다 보니 왜 오랜 기간 동안 글을 쓰는 작가인지 알 수 있었다. 일단 글을 재미있게 잘 쓰니까! 둘이 같이 팟캐스트를 진행할 정도면 합이 잘 맞는 친구인 듯한데, 그래서 그런지 글도 느낌이 비슷하다. 물론 뭐가 누구 글인지 알아볼 정도의 개성은 있지만. 어쨌든 두 작가들이 번갈아가며 같은 소재, 예컨대 공복, 차(茶), 식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읽는 재미가 있다. 글로 하는 티키타카랄까? 일례로, 염승숙 작가가 ‘공복’에 대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상태’라고 말하며 잠에서 깬 직후에는 정말로 뭘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윤고은 작가는 공복에 섭취하면 더 좋다는 식품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많이 (여러 가지를 골고루) 먹을 수 있을지를 궁리한다.

염승숙 작가가 첫 번째 꼭지의 마무리에서 “소설가라면 언제 어디서든 글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응급실 의사와 같다고 말한 필립 로스는 바보 멍청이야… 괜한 원망도 해가면서, 나는 풀어내야 할 이야기, 마무리 지어야 하는 원고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했다가, 그다음 (윤고은 작가의 꼭지 이후 이어지는) 자신의 차례가 시작하자마자 “필립 로스를 바보 멍청이라고 원망하다니, 제정신인가! (언제 어디서든 응급실 의사처럼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한다니, 순간 울컥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투정 부리고도 싶어지는 것이다.”라고 후회하는 것도 귀여웠다. 윤고은 작가도 귀여움으로는 이에 못지 않은데, 자신을 비롯한 작가들은 대체로 커피를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차가 주는 이미지가 매력적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그 매력적인 이미지를 널리 퍼뜨리는 ‘홍차 점조직’의 존재를 상상해 그들을 원망한다. 이거 너무 귀엽지 않냐고요!

〈Tea For Two〉의 노랫말 같은 그 세계에는 정갈한 테이블보가 깔려 있고 3단 트레이와 사랑스러운 색감의 홍찻잔이 꽃잎처럼 흩뿌려져 있다. 홍차를 좋아하느냐고? 아니, 잔만! 홍찻잔이 커피잔보다 더 예뻐 보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뿐,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꼭 홍차라는 보장은 없다. 찻잔 내부에도 장식적 요소가 있으니 그걸 살리기 위해서는 커피보다 차의 색감이 더 어울리긴 하겠지만. 책상 앞에서 머그를 도끼처럼 들어 올릴 때와는 다르게 홍찻잔을 잡으려면 손 모양도 아름답게 구부려야 한다. 아무래도 나와 차의 관계는… 쇼윈도인 것 같다.

이건 다 ‘홍차 점조직’의 영향이다. 그들은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점조직 형태로 활동한다. 활동의 목적은 독자들의 무의식 속에 홍차가 스며들게 하는 것. 이를테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어느 티타임에는 이런 대화가 등장하는데 어쩐지 잊히지가 않는 것이다. “레몬 아니면 크림?”이라고 묻고 “크림.”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다시 “구름 한 점만큼!”이라고 말하는 페이지. 그렇게 매혹적인 풍경마다 홍차가 있다. 홍차는 이렇게 이미지를 (내게) 팔고 나는 홍차 맛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홍차스러운 무언가를 동경하게 되었다. 홍차 점조직은 차와 곁들일 만한 음식들을 나열하면서 교묘하게 영업한다. 거기에 홀리기 시작한 건 최근 일이 아니다. 아마도 열 살이 되기 전에 읽었던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이 맨 처음이었을 것 같은데, 막내 에이미를 통해 ‘머핀’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호기심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으로 넘어가면 조금 더 잔인해지는데 앤이 표현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앤과 다이애나의 티타임에 등장한 라즈베리 코디얼(혼동으로 인해 술을 마시게 되었지만)이라든지 버찌파이, 레이어케이크 같은 것에 침이 고인 나는 거의 20년을 집착하다가 어느 여름 그 소설의 배경이었던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떠나기도 했다.

 

“쓸고 닦는 것엔 집착하면서 정리 정돈은 왜 잘 못할까”를 고민하는 염승숙 작가가 “여전히 주방의 작은 원형 식탁에서 자주 원고를 쓰거나 마무리하고 있다”라고 쓴 부분은 무척 공감이 됐다. 염승숙 작가는 서재용 책상을 따로 마련해서 더 이상 식탁에서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책과 문구류, 영수증과 청구서까지 온갖 물건이 “책상 위를 난삽하게 메우고 있”기 때문에 앉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도망치고 싶다는 결심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니 모리슨조차 ‘거대한 탁자’를 갖고 싶어 했다면, 내가 그런 것도 이상한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난 정상이었어 🙂

쓸고 닦는 것엔 집착하면서 정리 정돈은 왜 잘 못할까 고민하던 언젠가, 나는 토니 모리슨조차 평생 글쓰기 좋은 ‘거대한 탁자’를 갖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듣고 깊은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책상 위에 남아 있는 작은 공간을 가리키며 “언제나 이 정도의 공간밖에 남지 않거든요. 이 버릇을 고치려고 하는데 안 되네요.”라고 시무룩해하는 토니 모리슨이라니! 그 또한 끝내 정리되지 않는 책상 앞에서 절망을 느꼈던 것이다. 아이들이 깨어나지 않은 새벽녘에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동이 터오는 걸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흑인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빌러비드』를 쓰는 와중에도!

두 작가의 귀여운 글에 홀려서 금방 읽었는데, 애초에 종이책 기준 180쪽밖에 안 되어서 길지도 않다. 아쉬워라. 이런 책이 또 뭐가 있을까.윤고은 작가의 꼭지 중에서 먹는 것, 또는 요리와 작가들을 잇는 책으로 줄리언 반스의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가 언급되는데, 이 책도 읽어 보고 싶다. 메모메모. 어쨌거나, 작가들은 특별히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한 이라면 이 두 소설가들의 ‘마감식’ 이야기를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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