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애비게일 슈라이어, <부서지는 아이들>
자녀의 모든 불편함과 불안을 해결하고 예방해 주려는 현대의 육아법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도발적인 책. 근데 읽어 보면 맞는 말이다. 학교 교사나 학원 강사 등 교육계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이미 입을 모아서 요즘 애들은 다르다고 말한다. 남들을 NPC 취급하고, 남의 기분이나 예의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부모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한다. 부모들은 아이의 모든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고, 학교 교사나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보모쯤으로 여긴다.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특별 취급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저자는 (미국의) 요즘 청소년이 심리 치료에 과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오늘은 기분이 어떻니?”라고 묻고,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권장하며, 학생의 가정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고 개입하려 든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유해하다. ‘기분’, 감정만이 중요하며(이 외에 아이가 해야 하는 일, 그러니까 공부라든지 집안일 돕기라든지 하는 것은 무시하고), 조금의 불편함이나 어려움만 있어도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그냥 숫기가 없다고 여겼을 아이에게 이제는 ‘사회 불안 장애’가 있다는 딱지가 붙고,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아이는 ADHD라는 진단을 받고 리탈린 같은 약을 처방받는다. 물론, 실제로 큰 장애가 있다면 정신과적 약 처방은 필요하고 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청소년의 뇌는 아직 성장 중이기에 섣불리 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게다가, 심리 치료가 정말로 그렇게 도움이 된다면, 청소년은 둘째치고 왜 성인들도 몇 년씩, 몇십 년씩 심리 치료를 끊임없이 받는가? 나는 저자가 이 점을 짚어낼 때 특히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여태까지 은근히 의심해 오던 것을 그가 정확한 언어로 단호하게 지적하는 걸 보고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그런데 이런 기하급수적 성장의 스토리에는 역설이 들어 있다. 치료가 더 널리 보급될수록 질병 발생률과 중증 사례는 줄어야 마땅하다. 매년 4만 명이 넘는 미국 여성의 목숨을 앗아 가는 유방암을 생각해보자. 1989년 이래로 유방암의 초기 발견 및 치료가 늘어나면서 유방암 사망률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산모 사망률은 어떨까? 항생제가 널리 보급된 이후 출산 중 사망하는 산모 숫자가 크게 줄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 높은 치과 치료를 더 쉽게 받을 수 있게 되자 이 없이 사는 미국인의 수가 줄어들었다. 아동 질병을 위한 예방접종 및 치료가 발달하면서 아동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불안이나 우울증을 위한 치료법이 더 발달하고 널리 확산되는 동안 청소년의 불안과 우울증은 오히려 ‘급증’했다.
치료의 ‘증가’가 우울증의 ‘감소’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찜찜한 사실을 발견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최근 일단의 연구자들도 같은 사실을 알아챘다. 이들은 「치료는 늘었으나 우울증은 줄지 않았다: 치료-유병률의 역설」이라는 제목의 동료 심사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저자들은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주요 우울증에 대한 치료가 보편화되었고 질도 높아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구 국가들 가운데 이와 같은 치료로 주요 우울장애 발생이 감소한 나라는 ‘한 곳도’ 없었다. 많은 나라에서 발생률은 오히려 증가했다.
수십 년 동안 치료적 개입이 증가했으므로 그런 결과에 이른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항생제가 보급되면 감염에 따른 사망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심리 치료가 더 널리 확산되면 우울증이 감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청소년의 정신 건강은 1950년대 이후 꾸준히 ‘악화’되었다. 1990~2007년(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전이다) 정신 질환에 걸린 아동의 수는 35배 증가했다. 과잉 진단이나 정신 질환의 정의가 확대된 것이 이러한 급속한 변화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줄지 모르지만, 우리는 청소년 자살이 놀라울 만큼 증가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뉴요커》는 “1950~1988년에 자살한 15~19세 청소년의 비율이 4배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정신 질환은 아동이 지닌 장애의 주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두 추세가 동시에 나타난 것, 즉 심리적 장애에 대한 인식 및 검사, 진단, 치료가 크게 확산된 시대에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나빠진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두 추세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는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동시 발생은 이상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적어도 그것은 많은 치료법과 전문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단서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많은 청소년과 성인이 심리 치료에 매달리는 것은 부분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감정’에 너무나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에 기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이 정말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내가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있지 않나? 내가 기분이 나빠도 숙제가 있으면 숙제를 해야 하고, 누구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고 등등. 나도 맨날 ‘운동하기 싫다’고 중얼중얼 욕하면서도 결국 운동을 하는데. 기분은 기분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이지. 게다가 매일 24시간 내내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저자가 인터뷰한 전문가, 심리학자 율리아 첸초바 더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실상 아이들에게 굉장히 불완전한 신호, 즉 그들의 감정이 언제나 타당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감정을 체크하고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감정을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알려주는 길잡이로 삼으라고 말입니다.”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높은 선반에 있는 물건을 꺼내려고 회전의자에 올라서는 것과 비슷하다. 발밑에 놓인 회전의자처럼 감정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순식간에 미끄러져 균형을 잃고 넘어질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감정을 돌보는 행위는 그 감정을 더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에 집중하라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더’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더턴은 많은 치료적 개입이 아이가 감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려한다. 감정은 불안정할 뿐 아니라 조종하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내가 온갖 감정을 느끼게 유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거나 특정한 발언을 하면 어김없이 감정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더턴은 “그건 굉장히 쉬워요”라고 했다).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에 사는 우리는 감정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려준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감정은 수많은 자극과 신호에 대한 반응일 뿐이며 따라서 틀린 경우가 많다. 분노를 느낀다고 해서 당신이 반드시 옳거나 다른 사람이 당신을 부당하게 대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은 친구를 부러워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친구가 가진 것을 진짜로 갖고 싶은 것은 아닐 때도 있다. 우리는 자신을 학대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느끼기도 하고,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을 원망하기도 한다. 감정은 언제나 우리를 속인다.
하지만 아이의 감정을 정기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좋지 않을까? 미국의 모든 심리 치료사와 교사,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현관문에 온도계를 걸어놓는 일과 비슷하다고 믿는 듯하다. 딱히 해롭지도 않으면서 이따금 유용하다고 말이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샤리테 대학 병원의 정신과 의사 미하엘 린덴Michael Linden은 그것이 매우 좋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은 부정적 감정을 유도합니다. 그런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아침마다 “브레이든, 오늘 기분이 어떠니?”라고 물으면 아이는 부정적 대답뿐 아니라 긍정적 대답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린덴은 그렇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세상에 늘 행복하고 즐거운 기분에 젖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하철에 앉아 반대편에 앉은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죠. 행복은 하루 중에 느끼는 주요 감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나쁜 점 중 하나는, ‘트라우마’ 같은 용어를 이용해 ‘과거에 이런 일이 있어서 지금 내가 이렇다’며 현재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힘든 기억 하나쯤 없는 사람은 없다. 과거에 부모님이 잘못했을지언정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걸 방어막 삼아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남 핑계만 대면 인생이 나아집니까? 저자가 인용하는 임상심리학자 조슈아 콜먼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건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어릴 적 ‘트라우마’를 평생 스스로 안고 가는 성인은 한국에도 쌔고 쌨다. 도대체 왜? 부모님이 무언가 잘못을 했을 수는 있지만 진짜 그게 심각한 범죄가 아니고서야 그거 하나로 자신의 삶이 모두 망가진 건 아닐 텐데. 성인이 되면 부모님도 그냥 나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처음인 어른일 뿐이었고, 그 당시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하지 않나. 아무리 힘들었어도 현재와 미래를 바꾸려면 이제는 나도 다 컸으니 과거는 과거에 남겨 두고 나는 내 삶을 살겠다,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지(꼰대처럼 들린다는 거 알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나).
콜먼에 따르면 이 사회에 서서히 퍼지는 가장 유해한 생각 중 하나는 성인이 되어 겪는 모든 심리적 문제의 근원을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동안 심리 치료사들은 근거도 없지만 틀렸다고 증명할 수도 없는 견해를 바탕으로 수많은 폐해를 불러왔다.
심리 치료사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유도하곤 한다. 직업 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겪는다면, 또는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숨겨진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찾아보게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부모에게 책임이 있으므로, 결국 찾아낸 ‘어린 시절 트라우마’는 당연히 부모를 비난할 근거가 된다.
우리는 모든 일이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정확히 밝혀내고 싶어 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라고 결론 내리고 싶어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와 같은 성향을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effort after meaning’이라고 부른다. 유치원생 자녀가 자폐스펙트럼장애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과 혼란에 빠진 어머니가 있다고 치자. 그녀는 아이가 어릴 때 맞은 백신 탓에 자폐가 생겼다고 결론을 내리면 비로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혹한 불운을 초래한 원인으로 지목할 대상도 없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지?”라는 질문의 답도 모른 채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싫어한다. 과거에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뒤 뇌의 내측 전전두피질(이성적 사고, 의사 결정, 추론 등 고차원적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옮긴이)의 활발한 작동으로 드디어 지금 겪는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동기 트라우마가 성인의 특정한 정신 건강 문제를 초래하는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연구들은 편향을 만들어내는 요인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 확실한 것은 아동기 트라우마가 성인의 정신병리학적 문제를 일으키는 데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너무 단순하고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이렇다. 아이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권위 있는 부모가 되어라. 아이가 독립적이고 유능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아이의 일에 개입하기를 멈춰라. 아이에게서 전자 기기를 치워라. 아이가 없고, 심지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나조차도 흥미롭게 읽은 책이라, 부모가 되고 싶어 하는, 부모가 될 예정인, 또는 이미 부모인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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