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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by Jaime Chung 2025.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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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내가 유행에 뒤처지는 타입이라는 것은 나도 기꺼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유행을 뒤늦게 따라잡는다 해도, 그 유행이었던 것이 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비록 내가 <Frozen(겨울왕국)>(2014)를 개봉 1년이 지난 후에야 보고서 ‘아, 이래서 사람들이 엘사니 안나니 렛잇고니 하고 다녔구나’ 하긴 했어도, 적어도 나는 <겨울왕국>이 인기 있을 만한 영화라는 점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는 도저히 모르겠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2016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후보에 올랐고, 205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소설 1위’와 가디언지가 선정한 ‘작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의 명예를 안았다. BBC도 같은 해에 이걸 ‘올해 최고의 소설’로 꼽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화자인 레누는 60년간 친구였던 릴라가 사라졌다는 말을 그녀의 아들 리노에게서 듣는다.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지난 날 자신들의 우정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근데 나는 이걸 정말 이해 못 하겠다. 사람들은 표현이 아름답다고 하던데 나는 일단 캐릭터들과 줄거리에 치여서 문장까지는 보지도 못했다. 나는 여성주의 소설, 여성들 서사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한다. 근데 이 소설 속 두 주인공, 그러니까 화자 레누와 그녀가 애타게 바라보는 친구 릴라의 관계를 도저히 모르겠다. 옮긴이의 말은 이들의 관계가 상호의존적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레누가 릴라를 거의 여신으로 모시는 하녀병에 걸린 것 같다. 얘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릴라가 세상에서 최고로 똑똑하고, 최고로 예쁘고, 모든 남자애들이 얘만 사랑하는 것 같다. 물론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진리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로 그 잘난 사람들에게 집착해서 끙끙 앓지는 않는다. 왜냐, 그건 건강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진짜 ‘릴라는 똑똑해! (릴라가 레누에게 학교 공부를 가르쳐 주는데, 그게 진짜 선한 의도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잘난 척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릴라는 예뻐! (예전엔 깡마르고 못생겼는데 사춘기 지나면서 얼굴도 더 예뻐지고 몸매도 좋아졌다고 한다) 모든 남자애들이 릴라를 사랑해! (아니 진짜 모든 남자애들이 얘만 보면 헬렐레하고 레누는 이걸로 기가 죽는다)’ 이 패턴 하나가 책 내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레누가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어쩌다 이게 부러져서 릴라가 고쳐 주기로 한다. 며칠 후, 릴라가 레누의 고쳐진 안경을 쓰고 나타나는데 레누는 그 와중에 릴라는 안경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괴로워한다. “그 순간은 안경이 새것이라는 사실보다 릴라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안경을 쓸 필요가 없는 릴라에게는 안경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데 안경을 써야만 하는 내겐 안 어울리는 걸까.’” 이건 그냥 정신병 아니야? 모든 걸 얘한테 비교할 거면 인연을 끊든가 아니면 정신과 상담을 받든가 해라.

 

더 미치겠는 건, 그렇다고 얘네가 레즈비언도 아니라는 거다. 이성애자 여성 사이에 친근한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여성 혐오적인 말을 내가 하려는 게 아니니, 이 말을 하는 이유를 들어보시라. 레누가 릴라의 몸에 대해 하는 말이 너무… 수상쩍다. 사춘기가 되면서 릴라의 몸이 더 여성스럽게 변하자 그는 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릴라의 얼굴은 균형이 잡혀가고 있었다. 시원한 이마와 갑작스럽게 가늘어지는 커다란 눈, 아담한 코와 광대뼈, 입술이며 귀가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찾아나가고 있었고 머지않아 그 균형점을 찾을 것 같았다. 말총머리로 묶으면 마음을 사로잡는 기다란 목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랑스러운 작은 가슴은 점점 더 봉긋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등의 깊은 곡선은 팽팽한 둔부의 오목한 부분까지 이어져나갔다. 발목은 아직 어린아이 발목처럼 가늘었다. 하지만 그 발목이 이미 소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신체에 적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리노와 춤을 추는 릴라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내아이들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스콸레가 특히 그랬고 안토니오나 엔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다른 여자아이들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릴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내 가슴이 릴라의 가슴보다 큰데도, 질리올라가 균형 잡힌 몸매에 완벽한 다리를 가진 눈부신 금발머리인데도, 눈이 아름다운 카르멜라가 도발적으로 몸을 움직였는데도 말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릴라와 대적할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릴라의 신체는 남성들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이 가까이 다가오며 내는 소리처럼 그들의 넋을 빼내는 기운 같은 것이었다. 남자들은 음악이 멈추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겸연쩍게 미소 지으며 과장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름은 빼고 말하자면, 릴라가 결혼식을 하게 되는데 레누는 이런 생각을 한다.

릴라의 알몸을 처음 본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은 그때의 감정이 릴라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느낀 쾌락에 대한 수치심이었음을 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____(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름 삭제)가 만지고, 범하고, 망가뜨리고, 임신시킬 수도 있는 갓 열여섯 살이 된 그녀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면서 흔들린 내 마음에 대한 민망함이었음을 안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감정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느껴지는 극도의 불편한 감정처럼 느껴졌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동요하지 않고서는 그 몸에서 손을 뗄 수 없는데, 막상 손을 떼면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릴라가 알게 될까봐 걱정되어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격렬한 감정을 확실히 정리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내 격렬한 감정적 동요는 그 감정의 원인을 제공한 이의 흔들림 없는 순수함을 해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었다. 내 감정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 방에 남아 신랑의 어깨 너머로 릴라의 딱딱해진 젖가슴과 날씬한 허리, 팽팽한 둔부와 새까만 음모, 길쭉한 다리와 부드러운 무릎, 움푹 들어간 발목과 섬세한 발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그 어둡고 가난한 방 안의 허름한 가구에 둘러싸인 채 타는 듯 뜨거운 피가 흐르는 혈관과 요동치는 가슴을 안고 고르지 않은 물 묻은 바닥 위에 내내 서 있고 싶었다.

아니,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면 ‘아니, 얘가 벌써 결혼을 한다니…’ 하며 내가 뒤처지는 느낌도 들고, 이제 상대가 결혼했으니 시집살이며 남편과의 꽁냥꽁냥, 그리고 혹시 모를 출산 따위에 대한 걱정으로 ‘이제 얘가 나랑 같이 놀아줄 시간 없는 거 아니야?’ 같은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나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위 인용문처럼 지나치게 성적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레누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릴라를 그토록 성적인 눈으로 보는 건데? 이성애자 여자들은 아무리 절친이 소중해도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한다고! 친구 결혼식에서 시원섭섭한 감정을 느낄지언정 이런 이상한 생각은 안 해요!!

 

내가 이 소설을 잘 이해하지 못한 건, 어쩌면 이게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중 첫 번째 권으로, 두 소녀의 유년기와 사춘기만을 다루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아직 뭘 몰라서 미친 생각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곤 한다. 그러니까 이 레누가 릴라를 거의 여신인 양 떠받들어 모시는 것처럼. 독자인 나는 화자인 레누가 해 주는 말을 통해 이 둘의 관계와 이 소설 속 세상에 대해 알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딱히 믿을 만한 화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누와 릴라가 성장하면 좀 나아지려나 싶지만 이미 이걸 억지로 읽으면서 학을 뗐기 때문에 2-4권을 더 이상 읽을 생각은 없다. 어쩌면 내가 이탈리아 문화와 문학을 잘 몰라서 이 소설을 이해 못하는 건가? 이탈리아 감성 모르면 나가라 이거야?

 

애초에 프롤로그에서 릴라가 사라졌다는 말을 언급했는데 이 1권이 끝날 때까지 조금의 힌트도 안 주고 그냥 유년기와 사춘기가 싹 지나간다고요? 하다못해 책 끝날 때쯤에는 현재로 돌아와서 릴라의 흔적을 하나라도 발견했다든지, 무슨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마무리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꺼내놓은 일을 하나도 마무리하지 않고 2-4권으로 넘긴다고요? 됐습니다.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겠다고 5월 말에 시작해서 좀 읽다가 손을 뗐는데, 이번 7월 긴 휴가 때 내가 끝을 보리라고 마음먹고 꾸역꾸역 읽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래서 내가 얻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냥 이걸 읽었으니 이제는 치워 버릴 수 있다는 안도감뿐. 책으로 인한 즐거움은 없다. 뭐, 호평을 많이 받은 좋은 책이라고 하니까 여러분 마음에는 드실지 모르나 저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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