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교육과 특히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쓴다는 것, 또는 삶을 되돌아본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감동적인 회고록. 예전부터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이북으로 산 것은 6월 초, 실제로 이 책을 읽은 건 7월 후반 휴가 기간이었다. 마침내 이걸 끝내다니! 확실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는 아이다호의 산간벽지 벅스피크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의 부모님은 모르몬 교도로, 일곱 아이들(저자 타라 위로 다섯 명의 오빠가 있고 언니가 한 명 있다)을 학교에 보내 정규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폐철 처리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블렌딩 오일을 만들어 팔거나 산파로 일했다.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일을 도와야 했다. 대체로 글 읽는 방법은 배웠지만 그들이 읽는 것은 성경이나 모르몬교 텍스트들 정도였다.
그러던 저자가 손위형제 중 하나인 타일러 오빠의 격려를 받아 ACT(미국 대학 입학 학력 고사) 시험을 치게 된다. 타일러 오빠는 이미 아버지의 독재 아래에서도 틈틈이 공부를 하다가 자유와 교육의 기회를 찾아 집을 떠났는데, 동생 타라가 똑똑한 것을 알아본 그가 타라에게도 ACT를 공부해 대학에 가라고 권한 것이다. 타라는 ACT를 두 번만에 훌륭한 점수를 받아 브리검 영 대학교에 입학하고,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했으며,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방문 연구원도 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는데, 그렇다고 이 책이 공부법을 알려 주는 논픽션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회고록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쓰는 행위 또는 삶을 되돌아보는 행위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데 더 집중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대체로 자신이 살아온 과정 중에서도 가족과의 관계와 아주 큰 연관이 있다. 애초에 저자는 산간벽지에서 모르몬교로 자라 ‘남들과 비슷한 삶’, 또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여러 층위의 여성 혐오가 깃들어 있다. 일단 아버지와, 특히 타라를 괴롭힌 숀 오빠는 인격적 문제도 있었지만 여성 혐오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하나 열거하기엔 끝이 없으니, 몇 가지 충격적인 일만 소개를 하자면 이렇다. 저자가 10-11살 때, 댄스 수업을 받는데 레오타드와 타이츠가 댄스 슈즈가 필요했다. 저자의 어머니가 이것들을 사 주었지만 “이것들은 네 방에다 간수하렴”이라며,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그 주 수요일, 레오타드와 타이츠 위에 회색 티셔츠를 덧입었다. 티셔츠가 무릎까지 내려왔음에도 나는 다리가 너무 많이 보여서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의로운 여성은 발목 위 살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10살, 11살짜리가 살을 보여 봤자 뭐 볼 게 있다고 그걸 부끄럽게 여기게 가르쳤을까?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그런 생각을 하다니… 12살만 되면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여성”이라고 보며, 주일 학교에서 ‘순결’, ‘정절’ 같은 것들을 가르친다는 모르몬교다운 생각이다(타라는 자신이 과연 한 남자의 ‘정실’, ‘첫 번째 아내’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모르몬교는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게 여성 혐오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자의 아버지도 불같은 성격이긴 한데 무엇보다 저자를 더욱더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은 숀 오빠다. 그는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애는 마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페트루치오처럼 막 다루었다. 예를 들어 물을 한 컵 가져다 달라 해서 그 여자애가 물을 가져다주면 자기는 얼음이 든 물을 원했다며 다시 돌려 보내고, 여자애가 얼음이 든 물을 가져오면 내가 언제 그걸 가져오라 했냐며 그냥 물을 가져오게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말을 바꾸고 가스라이팅을 했다. 이 거지같은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아서, 자기 동생 타라에게도 팔을 꽉 쥐어서 손목이 부러질듯 아픈 각도로 휘게 만들고, 얼굴은 변기에 처박는 식으로 학대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 타라가 맞는 말을 하면 이런 식으로 폭력적으로 군 다음에 오히려 피해자인 타라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냈다. 진짜 미친 놈… 저자가 대학에서 조울증이라는 용어를 처음 듣고 나서, 그 증상이 너무나 자기 아버지처럼 들린다며 혹시 아버지가 조울증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내가 보기에 이 숀 오빠란 사람은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한다. 나중에 저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과거에 오빠가 이러이러한 일을 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그는 칼을 들고 찾아와서 저자의 손에 쥐어주는 개미친 놈의 모습을 보여 준다. 타라는 그날 밤을 어찌어찌 피했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그날 밤에 숀 오빠가 키우던 개(그냥 작은 개도 아니고 독일 셰퍼드)가 죽었다고 한다. 숀 오빠가 제 분을 못 이기고 화풀이로 저자 대신 개를 죽인 것. 이 대목을 읽고 진짜 소름이 끼쳤다. 이런 집안에서 어머니는 그러면 저자의 편이 되어 주었느냐? 노력은 했던 것 같은데, 어느 시점 이후로는 아버지의 권위에 굴복한 것 같다. 책의 후반 내용까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으나, 결국 저자의 어머니는 저자가 바랐던 어머니, 또는 어머니 자신이 바랐던 어머니가 되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은 해 두겠다. 저자가 이 회고록을 출판하고 나서 <뉴욕타임즈>가 꼽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이렇게 많은 (타라 웨스트오버의 위키페디아 페이지 참고) 상들을 주렁주렁 받자, 그 가족들이란 사람이 이 책이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잘못 묘사했다고 주장했다(이런 기사 같은 거). 아, 예… 제가 제3자의 입장에서 봐도 자기 딸이 ‘악마에게 사로잡혔다'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별로 못 믿겠는데요… 이런 집안은 개천도 아니고 비가 내릴 때 잠깐 생긴 웅덩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데서 용이 된 저자가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내가 저자의 학문적 업적보다 저자의 아버지나 숀 오빠, 어머니 같은 가정 환경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결국 이 책의 주제를 조금 더 잘 밝히기 위함이었다. 어릴 때부터 성공한 학자가 된 시점까지 쭉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 오면서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또는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관점을 때때로 바꾼다. 저자는 일기를 꽤 꾸준히 써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너는 두려움, 악마에게 조종받는 것이다’, ‘네가 타락한 것이다’ 하는 가스라이팅을 당하자 자기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게 된다. 심지어 오드리 언니, 그러니까 저자와 마찬가지로 숀 오빠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언니까지 말을 뒤집어 ‘나는 오빠를 용서했고, 너도 그래야 한다’며 저자를 공격한다. 그래서 저자가 인식하는 ‘과거’도 변화한다. 아래 인용문은 다소 길지만, 저자가 말하는 ‘교육'의 의미, 역사를 자신이 계속 쓴다는 것의 의미를 잘 보여 주므로 한번 보여드리고 싶다.
오드리 언니의 편지를 읽은 후, 과거가 변화했다. 그런 변화는 언니에 대한 내 기억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기억들이 둔갑한 것이다. 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의 장면들, 정다웠거나 장난스러웠던 장면들, 나였던 어린 소녀와 언니였던 어린 소녀. 그 모든 기억이 한순간에 얼룩지고 흉한 모습으로 변했다. 과거는 현재만큼이나 추했다. (…)
이 괴물 아이의 모습은 한 달 내내 나를 따라다녔고, 나는 결국 그 아이를 머리에서 지울 논리를 찾아냈다. 내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낸 것이다. 내가 미쳤으면, 모든 것이 말이 되도록 만들 수가 있었다. 제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다는 논리는 나한테는 여간 불리한 것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는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병에 걸린 사람이니까. 나는 계속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더 믿기 시작했다. 어떤 일에 대해 나와 드루[후에 저자의 남편이 된, 당시의 남자 친구]의 기억이 다르면, 나는 즉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 동안의 사실들에 관해 드루의 기억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를 만난 것이 지난주였는지 지지난 주였는지, 혹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크레이프 가게가 도서관 옆이었는지 박물관 옆이었는지 등등 내 기억을 의심하는 데서 오히려 쾌감을 느꼈다. 사소한 사실들에 의혹을 갖고, 그 사실들을 기억할 수 있는 내 능력에 의혹을 가짐으로써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진짜 일어난 일인지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내 일기장들이었다. 나는 내 기억들이 그냥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어난 일들을 내가 기록했고, 그 기록들이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로 모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내 기억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내 착각과 망상이 더 깊은 곳, 내 머리의 핵심에 존재해서 모든 사건을 내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내고, 허구를 기록했다는 뜻이었다.
진짜 이 부분이 너무 마음 아팠다. 개천도 아니라 빗물 웅덩이에서 용이 났는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어릴 적에 큰 영향을 받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약해져서 이렇게 스스로를 의심하고 비난하다니… 결국 이 회고록은 16살 시절 숀 오빠에게 학대당하던 시절 소녀는 떠났고, 지금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되어 결정을 내린다는 말로 끝이 난다. 저자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책 본문이 시작하기 전 인용되는 존 듀이(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의 말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아,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교육이 끊임없이 경험을 재구성해 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교육의 목적과 과정은 동일한 것이다.
이 책을 또한 무지와 반대되는 의미의 교육이라는 키워드로도 읽을 수 있겠다. 이미 이미 글을 길게 써서 이 점은 좀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진짜로 ‘배운다'는 것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이게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산간벽지에서 학교도 다니지 않고 살았을 때, 그 상태를 그걸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올리버 제임스라는 사람을 떠올린다(이 기사 참고). 그는 기능적 문맹(아주 기본적인 정도만 읽을 수 있는 수준의 문맹)임을 고백하고 읽기를 배워가는 과정을 틱톡에 공유하며 스타가 된 인물이다. 그는 (삶을 바꾸기로 결심한) 2020년 당시 31살이었는데, 문맹이던 시절 패스트푸드점에 가도 메뉴를 못 읽으니 뭘 시켜 먹을 수가 없었단다. 읽기를 거의 요구하지 않는 테이블 치우기, 바텐더 일 같은 것을 해도 1-2주밖에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삶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읽기를 독학해 나간다. 그리고 책 100권 읽기를 목표로 하고 이 과정을 틱톡에 올리면서 그 같은 기능적 문맹 이슈를 대중에게 인지시켰다.
자, 방금 내가 말한 것 같은 실질적 문맹 상태가 자유, 또는 행복이라고 느껴지시는지? 레스토랑에 가도 메뉴를 못 읽어서 주문을 못하고 글을 못 읽어서 본의 아니게 ‘반항적’이라며 자주 일을 잘리는 게 좋아 보이냐는 말이다. 저자도 브리검 영 대학교에 입학한 첫 해, 첫 학기에 자신이 본의 아니게 무지로 인한 실수를 저지르는데, 개중에 ‘홀로코스트’라는 글자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교수에게 말한 게 가장 큰 실수다(당연히 강의실 분위기는 싸해졌고, 저자는 그런 문제로 농담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저자는 그 전까지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따라서 뜻도 몰랐다. 유럽이 ‘한 나라’가 아니라 대륙이라는 것도 대학에 와서야 이해했다. 문맹이 아니라 글을 읽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움이 부족해, 소견이 좁아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걸 자유나 행복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실질적 문맹, 무지함의 맨얼굴이고, 이건 멋지거나 괜찮지 않다. 유럽이 나라가 아니라 대륙이라는 걸 아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좀더 실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보자. 돈이 있어도 지식이 없으면 집 매매는커녕 월세 계약도 못할 거다. 그 계약서에서 뭐라고 하는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법의 보호를 요청해야 하는지(아주 간단한 예로 임대차 계약 확정 일자 받기) 모를 테니까. 그걸 몰라서 사기당하고 피해당하면 누구라도 행복하지 않을 거다. 물론, 사기당한 피해자가 잘못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최소한의 방어조차 할 방법을 모른다면 당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무척 불행하리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서, 교육이, 지식의 확장만이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당장 학교에 안 간다고 좋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이 주제에 대해서 ‘언스쿨링’도 언급하려고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뺐다. 하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이에 대한 호주 ‘60 Minutes’ 다큐도 참고하시라).
참고로 저자는 2022년 2월에 <뉴욕타임즈>에 “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증거가 아니다(I Am Not Proof of the American Dream)”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여기에서 저자의 겸손함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저자가 거의 독학으로 브리검 영 대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점수를 받은 것은 맞지만, 애초에 브리검 영 대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이 대학교가 모르몬 교도들의 지원을 후하게 받아 학비가 상대적으로 상당히 저렴(그 당시 1,640 달러)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대학 1학년 때 어느 날 갑자기 전기가 통하는 듯한 엄청난 통증을 턱에 느꼈는데, 몇 년 전에 깨진 치아가 계속해서 썩어가고 있던 거였다. 치료비는 무려 1,400달였다. 저자가 가던 (모르몬교) 교회의 비숍이 학비 보조금을 신청해 보라고 해서 저자는 마지못해 이를 신청했고, 무려 4천 달러를 받았다. 이것으로 저자는 이를 치료하고, 무려 ‘처음으로’ 교과서도 샀다. 집세도 냈다. 이렇게 돈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학비와 집세를 내기 위해 하던 아르바이트를 야간에서 낮으로 바꿀 수 있었고, (아르바이트비는 적어졌을지언정) 낮에 수업 시간에 잠들지 않아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부(富)라기보다는 안도감(security)의 경험이라고 저자는 썼다. 저자는 ‘내가 공부를 잘해서’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 이렇게 대단해졌다는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공부 과정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열심히 했다는 것이 전부고, 공부 방법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저자는 자신이 대단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저자는 ‘남들도 나처럼 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이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밝히듯, 당시 자기에게 가능했던 방법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걸 저자도 알기 때문이다. 그때는 부동산 물가도 오르기 전이었고, 그래서 대학생이라면 으레 직면해야 할 방세도 지금만큼 비싸지 않았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저자가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개천 용이 되어 보자!’라든가 ‘인생 역전 해 보자!’ 같은 ’교훈’을 얻는다고 한다면… 음, 아무리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지만 그건 잘못 읽은 게 분명하다.
아이고, 책이 너무 마음에 들고 또 생각할 거리도 많다 보니 신이 나서 리뷰 글을 너무 길게 썼다.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0명) 수고하셨습니다! 이 기나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 진짜 좋으니까 한번 읽어 주세요. 완전 강력 추천합니다!! (제발 이 회고록만큼은 저넷 월스의 감동적인 회고록 <더 글라스 캐슬>처럼 거지 같은 할리우드 영화로 각색되어 망쳐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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