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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선미, <스티커>

by Jaime Chung 2025.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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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선미, <스티커>

 

 

<비스킷>이라는 청소년 소설계의 베스트셀러를 쓴 김선미 작가의 신작. 우리의 주인공 고등학생 장시루는 민속학자인 엄마가 출장지에서 가져온 궤짝에서 기이한 물건들을 발견한다. 스티커를 만들어 붙여 저주하는 방법이 쓰인 책, 핏빛 액체가 나오는 칠보 볼펜, 그리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촉감 좋은 돌멩이. 시루는 돌멩이에게 ‘~하지 마요’라고 할 때의 ‘마요’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저주 방법이 쓰인 책과 칠보 볼펜과 같이 자기 방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그 저주 책에 나온 방법대로 저주 스티커를 그려 만들어 다크웹에서 판매한다. 어느 날, 시루는 ‘친구가 체육 쌤 때문에 의식 불명이 되었으니 복수하고 싶다’라는 내용의 저주 의뢰를 받는데…

 

일단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찮은 ‘청소년 소설’이다. 다르게 풀어서 말하자면, ‘괜찮지만 여전히 청소년 소설이라는 점이 아쉽다’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굳이 왜 이렇게 말하느냐면, 좋은 책은 굳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마음으로 쓰지 않아도 여전히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 글을 어떻게든 쉽게, 자신이 생각하는 ‘아이들 수준’에 맞게 써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은 이런 걸 배워야 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거의 교과서적으로 그려 내게 된다.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여전히 작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청소년의 모습이 이 소설에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시루가 저주 책에서 배운대로 저주 스티커를 만들어 팔면 이걸 산 구매자들이 저주하고 싶은 상대에게 스티커를 붙이는데, 반대로 이 저주 스티커를 떼고 다니는 학생이 있다. 시루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지만 다른 반인 소우주라는 아이다. 나는 이 캐릭터가 그 ‘바람직한’ 청소년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집안도 화목하고, 채식을 하며, 성격도 좋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약간 이 소설이 오글거린다고 할까, 너무 ‘교과서적’이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이런 대사 같은 거.

“그래, 하는 거야. 해 보는 거야!”

“어? 어! 그래, 해 보자, 같이.”

소우주가 배시시 웃었다.

아 제발… 저 이런 거 못 견딘단 말이에요… 나는 ‘오글거린다’라는 말이 문학의 독이라는 글에 공감하고, 그 말을 웬만해서는 잘 안 쓰려고 하는데 정말 진짜 어떤 감성이 너무 넘쳐서 내가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일본 드라마에 꼭 나오는 ‘감성 과잉’ 순간이라든가, 이렇게 청춘이 넘쳐서 ‘하하하하’ 하고 (영어로 쓰면 대문자로) 웃어 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장면. 현실에서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그런 일들.

 

그래도 왜 ‘저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사람에게 유해한지를 나름대로 저자가 청소년들을 상대로 설명하고 이해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산다. 소설 내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저주를 일으키려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 에너지가 필요하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과 증오, 미움,시기, 경멸의 감정이 재앙으로 발산되는 게 저주이다.” 저주가 발동되어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스티커가 저절로 떨어지는데, 이 떨어진 스티커가 땅으로 스며든다. 그러면 부정적인 에너지가 땅에 흡수되는데 이게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 땅이 품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자연재해가 일어난다. “작게는 진도가 낮은 지진이나 규모가 작은 해일이 일어나고, 크게는 산사태, 폭풍, 대형 산불, 진도가 큰 지진이 발생”하는 것이다. 오, 이건 좀 그럴듯한데? 개인의 부정적인 감정이 결과적으로 우리 인간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발상이 무척 신선하고 놀라웠다.

 

다만 내가 아무래도 사소한 것에, 말을 글자 그대로(literal)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 고등학생인 소우주가 증조할아버지 유지로 스티커 떼는 일을 쭉 해 오고 있다면, 1세대를 30년으로 잡아 그가 한 120년 전 인물이라 생각하자(여기서 잠깐 설정 공개. 소우주의 증조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저주 책을 만든 후 죄책감에 휩싸여, 그 후손들은 이 저주를 다 되돌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분이 이 저주 책을 쓰고 만든 게 1905년이다. 대한제국 선포가 1897년이고 러일전쟁이 1904년. 1905년은 을사늑약이 일어난 해다. 그때 무슨 스티커가 있었다고요? “증조할아버지가 살던 시대에는 스티커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그저 저주를 팔았다는 소문만 났다나 봐.”라고 소우주의 입으로도 직접 말하는데, 분명 이 소설 초반에 이렇게 쓰여 있다.

첫 장에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볼 법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스티커로 저주를 거는 방법

 

아니, 당시에 스티커라는 개념이 없었다면서 왜 저주 책에는 “스티커로 저주를 거는 방법”이라고 버젓이 쓰여 있는 거지? 다들 아시겠지만 그 시대에 스티커라는 게 있었을 수가 없다. 나도 궁금해서 찾아봤다. 혹자는 세계 최초의 스티커가 1839년이라 하고 혹자는 1880년대라고도 한다(출처). 우리나라엔 훨씬 더 늦게 들어왔겠지. 어차피 저주를 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이 저주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대면 알아서 착 붙는 건데 굳이 스티커라고 할 필요가 있었나? 영화에서 강시 같은 저주받은 존재들에게 부적을 붙일 때 그 부적이 스티커 재질 종이에 만들어져서 그 존재들에게 부적이 착 붙는 게 아니잖아. 그냥 부적에 어떤 힘이 깃들어 있으니까 붙는 건데 굳이 이걸 스티커라고 할 필요가 있었나? 부적이라고 하면 너무 전통적으로, 오래돼 보여서? 청소년들을 위해서 현대식으로 바꿔 봤어요?

게다가 칠보 볼펜은 또 어떻고. 칠보(七寶) 공예는 일찍이 16세기에 일본 금속공예가가 조선인에게 칠보 기법을 배웠다는 기록(출처)가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래된 우리나라의 기술이라 어색할 것이 없지만, 그걸 ‘볼펜’에 접목시켰다고요? 한국 최초 필기구도 찾아봤는데 1960년대 초반까지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기도구가 붓, 연필, 잉크를 찍어 쓰는 펜, 만년필밖에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볼펜의 시초가 1938년 헝가리의 신문 기자가 만든 거고. 1946년 영국 사업가 마틴이 이 특허를 사서 수성잉크를 넣어 제대로 모양이 잡힌 볼펜이라는 걸 판매했다. 1950년대에 볼펜의 완성형 제품이 세상에 나왔다(전부 출처는 여기). 피라고 추정되는 액체가 이 필기구에서 흘러나온다고 묘사되는데 그냥 만년필이라고 했어도 됐을 것을 굳이 볼펜이라고 해서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깨알 지식! 예컨대 18세기 인물이 스마트폰을 쓰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것을 영어로 ‘anachronism’이라고 한다). 이게 너무 거슬려서 책 읽는 내내 그 생각이 자꾸 들었다. 호그와트에서도 깃펜을 쓰는데 1905년에 무슨 볼펜이야! 차라리 무당이 부적을 그릴 때 쓰는 염료(경면주사(鏡面朱砂)나 영사(靈砂)를 간 것)가 저절로 나오는 붓이라고 했으면 한국적이고 멋있었을 텐데.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엄청 뛰어난 소설은 아니다. 청소년을 타깃으로 한 게 너무나 확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여기에서 한계라는 것은 청소년 소설이라 성인이 읽기에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고, 앞에서도 말했듯 청소년들을 위해 쓰다 보니까 어떤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을 많이 담았기에 청소년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훈계조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견디기 어려워하는 감성도 실려 있다. 청소년들을 위해 쓴다는 전제 없이 자유롭게 썼으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왔을지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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