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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Can You Ever Forgive Me?(날 용서해줄래요?, 2018) - 진짜 작가보다 더 진짜같이 편지를 위조한 무명 작가

by Jaime Chung 2018.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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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Can You Ever Forgive Me?(날 용서해줄래요?, 2018) - 진짜 작가보다 더 진짜같이 편지를 위조한 무명 작가

 

 

감독: 마리엘 헬러(Marielle Heller)

 

리 이스라엘(Lee Israel, 멜리사 맥카시 분)은 술을 마시며(1차 잘못) 야근을 하다가 (상사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욕설을 했다가(2차 잘못) 바로 잘린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집에 오니 베개에는 파리가 죽어 있다. 대충 파리를 떨어 내고 자고 일어나 자신의 에이전트가 연 파티를 찾아간 그녀.

그렇지만 그녀의 책을 담당하는 출판 에이전트인 마조리(Marjorie, 제인 커틴 분)가 리를 쌀쌀맞게 대하는 걸 보니 책이나 출판사와 관련해 좋은 소식을 들을 일은 없을 듯하다.

리는 소심한 복수로 화장실에서 화장지를 몇 개 훔쳐 가방에 넣고, 파티장 입구에서 코트를 맡아 주는 직원에게 '종이 쪽지는 잃어버렸지만 저 코트가 내 코트다' 하고 거짓말을 해서 남의 코트를 훔쳐 입고 그곳을 나온다.

집에 있던 책들을 팔아 보려 서점에 갔으나 책 한 권밖에 못 팔고, 무례한 점원에게 욕을 먹으며 나머지는 다시 전부 집으로 들고 돌아와야 했다. 이제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정말 막막하기만 한데 심지어 그녀가 키우는 늙은 고양이는 아프기까지 하다.

고양이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할 텐데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며 리가 술집에서 또 술을 퍼마시던 중, 우연히 몇 년 전 한 파티장에서 만난 지인 잭 호크(Jack Hock, 리차드 E. 그랜트 분)를 만나게 된다.

그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나서 헤어진 후, 다음 날 리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인 패니 브라이스(Fanny Brice)에 대한 책을 쓰기로 한다. 자료 조사 차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 살펴보는데, 그 안에 패니 브라이스 본인이 쓴 편지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아마 패니 브라이스의 지인인 누군가가 그 책에다가 편지를 넣어 놓고서 깜빡한 것 같았다. 리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 편지를 몰래 챙긴다. 나중에 서점에 가서 그 편지를 팔려고 보여 주니 진품인 거 같긴 한데 내용이 뭔가 재미가 없다고 할까, 어딘가 수집품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타자기에 그 편지지를 넣고 아래 공백에다가 패니 브라이스의 말투를 빌려 추신 몇 줄을 덧붙인다.

그리고 이제 그걸 다시 다른 서점에 가져가니 아주 재미있다고 바로 팔렸다! 이렇게 리 이스라엘의 위조 행각이 시작되는데...

 

책 팔러 가서 '내가 바로 작가 리 이스라엘이다' 밝혔는데도 형편없는 대접을 당한 리ㅜㅜ

 

술을 퍼마시다가 잭(왼쪽)을 만난 리(오른쪽)

 

그래서 리는 계속 술 친구로 그를 만나며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도 털어놓게 된다.

 

리 이스라엘이 쓴 동명의 회고록 <Can You Ever Forgive Me?>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리 이스라엘은 그다지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그녀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탈룰라 뱅크헤드(Tallulah Bankhead), 자신의 이름을 딴 화장품 회사의 CEO인 에스티 로더(Estee Lauder), 그리고 저널리스트 도로시 킬갤런(Dorothy Kilgallen) 같은 인물의 전기를 썼다.

(영화를 보면 리가 책을 팔러 간 서점에 리가 쓴 에스티 로더의 전기가 75% 할인의 대상으로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에스티 로더는 본인이 직접 자서전을 쓰려고 리 이스라엘에게 자기 전기를 쓰지 말라고 일정 금액을 제시했다. 하지만 리는 이를 거절했고, 에스티 로더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리가 쓴 에스티 로더의 전기는 CEO 본인의 자서전보다 한 달 후에 출판되었고, 대중은 당연하게도 에스티 로더 본인이 쓴 책을 더 많이 사서 읽었다. 리는 후에 그 돈을 받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 이후로는, 영화 초반에서 묘사된 것처럼, 리 이스라엘은 '요즘 대중'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생활고에 시달린 그녀는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날카로운 위트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 노엘 카워드(Noel Coward, 영국의 극작가) 등의 유명 문인들의 사적인 편지를 위조해서 팔았다.

그럼 영화와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 또는 비슷한지 살펴보자.

 

# 리가 아픈 고양이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위조된 편지를 팔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가 자료를 조사하러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 있는 공연 예술 도서관(Library for the Performing Arts)에 갔을 때, 그녀는 패니 브라이스가 쓴 편지를 세 통 훔쳤고, 각각 40달러에 팔았다.

그녀는 이 절도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회고록에 쓰기를, "그 편지들은 죽은 자들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고, 도리스(리의 애완묘 이름)와 나는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 리가 판 편지들은 노엘 카워드의 동성애적 성향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딜러들은 이 때문에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카워드의 친구였던 한 수집자는 리가 판 편지들에 그의 성적 지향성에 대한 언급이 된 것을 보고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노엘 카워드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으려 극히 조심했기 때문이다.

리가 판 노웰 카워드의 편지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자 많은 딜러들이 그녀의 편지를 사려 하지 않았다.

 

# 딜러들이 그녀의 편지를 사려 하지 않자, 그녀는 편지들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화에 나온 것처럼럼, 그녀는 주요 대학의 도서관을 다니며 진품인 편지들을 똑같이 복제하고, 진품은 슬쩍하고 그 자리에 복제품을 넣어 두었다.


 

# 한 딜러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FBI를 상대로 그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증언을 하지 않는 대신 돈을 요구했다.

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녀는 앨런 와이너(Alan Weiner)라는 딜러가 정말로 그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고, 후에는 훔친 편지들을 그에게 팔았다.

 

# 영화 속 미워할 수 없는 게이 친구 잭 호크는 리가 몇 년 전 파티에서 만난 사이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잭 호크는 리의 오랜 친구였다.

 

# 영화 속 잭 호크는 홈리스인 것처럼 암시되지만, 사실 잭 호크는 고급 아파트에 살았다.

 

# 영화에서처럼 호크는 리가 위조한 편지를 대신 팔아 주면서 그 대가로 받은 돈의 일부를 슬쩍했다. 예를 들어 편지값으로 1,500달러를 받았다고 하고 리에게 750달러를 줬다.

리가 (자기가 받은 돈 말고) 호크가 든 나머지 돈이 얼마인지 보자고 하니 그제서야 사실 2,000달러를 받았다고 실토했다.

이후로 리는 호크가 편지를 팔 때 같이 다녔고, 거래가 끝나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했다. http://time.com/5391193/can-you-ever-forgive-me-true-story/)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참 위로가 됐다. 영화의 스토리가 딱히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감동을 받을 만하다기보다는 음, 교훈을 얻어야 할 '반면교사'에 가까운 거 같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여성의 모습이 너무나 비전형적이기 때문이다.

나이도 들었고(극 중에 언급되는 걸 보면 51세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것보다 더 들어 보인다), 날씬하지도, 예쁘지도 않으며, 돈도 없는 여성. 게다가 성격도 참 더럽다. 돈이 있었으면, 유명했다면 사람들이 리의 불같은 성질과 비사교성도 참아 줄 법하건만, 돈이 없기에 그녀는 자신의 출판 에이전트에게도 무시를 당한다.

그런 그녀가 찾아낸, 생계를 이어갈 방법은 죽은 문인들의 사적인 편지를 위조하는 것뿐. 그것도 게이 남성인 친구를 부하로 부리면서 말이다.

그녀는 미디어에서 여성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들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그래도 영화는 그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도덕적인 판단은 유보하고 그냥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어차피 그녀는 나중에 FBI에게 체포되어 판결을 받고, 이것도 영화에서 보여 주기에 딱히 도덕적인 판단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예쁘지도, 젊지도, 착할 필요도 없는 그녀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우리가 미디어에서 수없이 보아 온 여성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미디어 속 그 여성들이 전부 가짜라거나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건, 미디어에서는 여성이라면 자고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규칙 등을 세워 놓고, 그에 맞는 여성상 위주를 보여 준다. 그게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간에 일정한 문턱을 넘어야만 미디어에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리 이스라엘은 그런 규칙에 들어맞지 않는다.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도 아니고,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영화라는 미디어에서 있는 그대로 묘사된다. 그녀가 심지어 레즈비언이라고 내가 말했던가?[각주:1]

나이 들고, 뚱뚱하고, 못생기고, 성격도 더러운데 레즈비언이기까지 한 그녀는 보통 다른 미디어라면 끄트머리로 밀려나다 못해 아예 등장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여러분이 평소에 접하는 미디어에서 리 이스라엘 같은 여성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떠올려 보시라). 이렇게 미디어는 특정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감춘다.

그렇기에 내가 이 영화에서 리 이스라엘과 그녀를 연기한 멜리사 맥카시를 보고 감동을 느낀 것이다. '여자라면 이래야 해!' 하는 구속을 다 벗어던진 자유로운 느낌이었다고 할까. 미디어에서 보여 주는 전형적인 여성이 아니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들려 줄 수 있구나, 하고.

감독은 리 이스라엘의 자서전을 읽고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겠지만, 영화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도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여성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자의적인 규칙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여기서 평범하다는 건 평균적이라는 게 아니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대중적이고 일반적이라는 의미이다)' 여성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영화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동시에 이 영화는 흥미로운 범죄 이야기이기도 하니 그쪽에 관심이 있다면 그런 관객의 호기심도 만족시켜 줄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엄청난 액션은 당연히 없고, '미션 임파서블'에나 나올 법한 고도로 섬세한 작업(이런저런 최신 기기를 이용한)은 찾아볼 수 없으니 그런 것까지는 기대하지 마시라.

그렇지만 맨 마지막 장면은 꽤 통쾌하다. 진짜 작가보다 더 진짜같이 편지를 위조한 무명 작가의 위엄! 한번 거들떠 보시라 ㅎㅅㅎ

  1.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리에게는 일레인(Elaine)이라는 헤어진 여자 애인이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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