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Dirty Girl(더티 걸, 2010) - 발랑 까진 여자애 + 의기소침한 게이 남자애 = 엄마 아빠!
감독: 아베 실비아(Abe Sylvia)
배경은 1987년의 미국. 한 고등학교에서 '잘나가는' 여자애 대니엘(Danielle, 주노 템플 분)은 음, 자유분방한 성 생활을 즐긴다고만 해 두자.
어느 날, 그녀는 수업 시간에 약간 성적인 말을 했다고 교장실로 보내진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그녀에게 '특별반 수업'을 듣게 만든다.
그녀는 '특별반'은 멍청이들을 위한 거라고, 가기 싫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과정을 제대로 끝내야지만 다시 다른 아이들과 '정상적'인 수업을 들을 수 있단다.
'특별반' 수업 내용은 대개 미국 고등학교 성교육이 그러하듯, 부모가 되는 일의 어려움과 책임을 가르치기 위해 '가짜 아기'를 돌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는 돈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옛날이라 그런지 인형도 아니고 그냥 밀가루 포대 작은 것을 하나씩 나눠준다.
게다가 그녀의 짝으로 선정된 남자애는 의기소침하고 후디 모자를 푹 덮어 쓴 게이 남자애 클라크(Clarke, 제레미 도지어 분)다.
선생님은 짝이 된 사람들끼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밀가루 포대에 얼굴을 그리고 옷을 입히는 등 꾸며서 오라고 숙제를 내준다.
대니엘은 이 바보 같은 짓에 참여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명성'은 이미 '특별반 수업이나 듣는 애'로 추락해 버렸고, 덕분에 마음에 드는 남자애를 유혹하는 데도 실패한다. 그 남자애가 그냥 그녀를 비웃고 가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클라크를 자기 차에 태워 집에 데리고 온 그녀. 아기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클라크가 묻자 '조안(Joan)'이 어떻겠느냐고 한다.
대니엘은 여성 록 스타 '조안 제트(Joan Jett)' 같아 좋다고 했는데 클라크는 아름다운 여배우 '조안 크로포드(Joan Crawford)' 같다고 좋단다.
그녀는 그의 게이스러움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숙제는 하면서 조금씩 그와 친해지는데...
'특별반' 수업에서 짝이 된 대니엘(왼쪽)과 클라크(오른쪽)
'특별반' 수업 중 발표 중인 대니엘과 조안(가운데 밀가루 포대), 그리고 클라크
대니엘의 엄마 수앤. 밀라 요보비치 존예...
수앤(왼쪽)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남자 레이(오른쪽)
수앤(왼쪽)과 연대를 맺고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인 페기(오른쪽). 수앤 왼쪽 가방에 담긴 조안 완전 귀여움ㅋㅋㅋㅋ
클라크(왼쪽)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대니엘(오른쪽)
아마 국내에는 <어톤먼트(Atonement, 2007)>의 로라 퀸시(Lola Quincy) 역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주노 템플이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또 다른 주연 배우 제레미 도지어는 이 영화가 첫 장편인 신인 배우인데, 연기를 썩 잘한다.
줄거리 소개에서도 간단히 이야기했지만, 웬만해서는 어울릴 거라 생각할 수 없는 두 주인공, 즉 '발랑 까진 여자애(영화 제목처럼 'dirty girl')'와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아버지가 절대 될 수 없는) '게이 남자애'가 짝이 되어 부모의 역할을 맡게 된다.
대니엘은 처음에는 이 숙제를 하기 싫어하지만 점차 클라크의 사연을 알게 되고 그와 친해지면서는 자신의 역할에 이입하게 되고, 둘 다 정말 자신이 부모인 것처럼 행동한다.
대니엘은 '일기장에게(Dear Diary)...'로 시작하는, 조안의 시점에서 쓴 가상의 일기를 내레이션으로 들려 주는데, 이때 자신은 '엄마', 클라크를 '아빠'로 지칭한다.
조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첫 숙제를 할 때 클라크가 밀가루 포대에다가 눈을 그려 줬는데 영화 중후반에서는 CG로 이 표정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슬퍼하거나 웃거나 하는 식으로.
아니, 그까짓 밀가루 포대가 뭐라고 이렇게 귀엽지 싶을 정도로 진짜 깜찍하다. 나중에는 이 밀가루 포대가 진짜 인간 아기보다 귀엽다고 생각하게 됨ㅋㅋㅋ
영화 전반에 가족, 그것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테마가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는 대니엘/클라크와 그 부모, 이렇게 2대에 걸쳐 이야기된다.
대니엘은 엄마인 수앤(Sue-Ann, 밀라 요보비치 분)의 이름을 막 부를 정도로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데, 그래도 수앤은 대니엘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쩔쩔맨다.
수앤은 사실 고등학교 때 대니엘을 임신해서 낳게 되었고, 애 아빠와는 헤어졌다. 지금까지 대니엘을 혼자 키우다가 최근에 모르몬 교인 레이(Ray, 윌리암 H. 머시 분)를 만나게 되어 그와 결혼해 대니엘에게도 아빠를 만들어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대니엘은 레이는 자기 진짜 아빠가 아니라고 싫어하고(그가 모르몬 교라서 다소 보수적이고 딱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그의 아들딸과도 사이가 안 좋다.
클라크도 역시 아주 보수적인 아버지 조셉(Joseph, 드와이트 요아캄 분) 때문에 고생이다. 조셉은 아들 클라크가 게이라는 게 한심하다. 그는 클라크도 '치료'를 받으면 이성애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조셉의 아내이자 클라크의 어머니인 페기(Peggy, 메리 스틴버겐 분)는 아들이 게이여도 사랑하지만,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남편의 기에 눌려서 아들을 잘 도와주지 못한다.
이렇게 두 주인공(대니엘, 클라크) 모두 이상적인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대니엘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클라크는 아버지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두 주인공의 어머니들은 부드럽고, 상냥하고,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자식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강인한 여인들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메리 스틴버겐은 이런 느낌의 캐릭터를 연기한 것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밀라 요보비치는 늘 '액션 여전사' 느낌이었기에 이렇게 '델리케이트한' 가정주부 역할을 연기한 것이 다소 놀라웠다.
대니엘이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는 등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손을 이렇게 다소곳이 하고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밀라 요보비치의 연기 스펙트럼도 꽤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밀라 요보비치가 <쥬랜더(Zoolander, 2001)> 같은 코미디에 나온 것도 봤는데 왜 여태껏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 2002)> 시리즈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어쨌거나 대니엘은 자신의 진짜 아빠를 찾으러 캘리포니아를 방문하고 싶어 하는데, 클라크는 처음에 이를 거절한다(대니엘은 운전을 금지당해서 차를 가지고 가려면 클라크가 대신 운전을 해 줘야 했다).
그러다가 클라크가 게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거의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잘 도망쳐 나와서 대니엘의 집으로 직행해 그녀를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출발한다.
여기에서부터 영화는 여행 영화의 색깔을 띈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 대니엘과 클라크는 조엘(Joel, 니콜라스 디아고스토)이라는 남자 스트립 댄서를 만나기도 하는데, 이때 클라크는 그에게 반해서 시시덕거린다.
조엘이 스트립 댄스를 추는 장면도 나오는데, 사실 이 영화는 이렇게 '극 중 쇼'를 네 번 보여 준다.
처음이 조엘의 스트립 댄스, 그다음이 길을 가다가 돈과 기름이 다 떨어져서 한 바(bar)에서 스트립 댄스 경연에 참가해 춤을 추는 대니엘의 쇼, 그 바로 다음이 클라크의 공연, 그리고 영화 맨 마지막에 대미를 장식하는 대니엘과 클라크의 듀엣까지.
각 쇼의 길이가 길지는 않아서, 중간중간에 막간 쇼를 보는 듯한 즐거움이 있다. 사이사이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서 어디에 몰려 있다는 느낌도 별로 안 들고, 눈요기도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꽤나 여성주의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기가 눌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메리는 아들이 대니엘과 함께 대니엘의 아빠를 찾으러 떠났다는 걸 알게 되자 사색이 되어서는 "아직 그 남자(=대니엘의 친부)에게 감정이 있는 거냐"며 따지는 레이에게 "선생님,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에요!(Sir, this is not about you!)" 하며 그를 막아선다.
(시간상으로는 위에서 말한 것보다 조금 앞이지만) 남편이 밑도 끝도 없이 대니엘네 집에 침입했다가 이웃에게 신고당해 '가택 침입죄'로 구치소에 갇히자 당장 나를 풀어 달라는 남편의 보석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렇게 페기가 용기를 내자 파들파들 약해 보이기만 하던 수앤도 페기와 함께 딸을 찾아나서고, 이 둘은 자신의 자녀를 찾기 위해 연대한다.
크, 이 얼마나 가슴 따뜻해지는 장면인가.
게다가 이 영화는 어떤 미디어에서도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캐릭터인 '발랑 까진(=성적으로 활발한) 여성'과 '게이 남성'이 친구가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담았기에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일까, 맨 위의 영화 포스터를 보면 알겠지만 '그들이 말하게 하라(Let them talk)'라고 쓰여 있다.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그들이 마이크를 잡게 된 셈이다.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는 않으므로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대니엘과 클라크가 '모험'을 떠나 점차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정말 부부처럼 서로를 사랑하게(이성적으로 그런 거 말고 진짜 순수하게 정신적으로) 되는 게 참 감동적이었다.
'아버지는 떠나도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고 돌본다'라는 게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바인 듯한데, 결국 대니엘과 클라크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돌아와서 다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어 무척 다행이었다.
참 나, 진짜 부부도 아니고 이성애자 여자랑 게이 남자가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하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8ㅅ8 웬만한 사랑 이야기보다 더욱 감동적이었다.
다소 80년대스러운 영상이라 무시하지 말고 한번 거들떠 보시라. 정말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좋은 영화다. 강력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