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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야 지야시, <Transcendent Kingdom>

by Jaime Chung 2025.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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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야 지야시, <Transcendent Kingdom>

 

 

가나계 미국인 작가 야 지야시의 소설. 국내에는 이 작가의 데뷔작 ‘Homecoming’만이 <밤불의 딸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와 있다. 이 책은 국내엔 아직 정발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가나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소녀 기프티가 오빠 나나의 죽음과 무기력한 어머니, 그리고 그 와중에 위안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기프티와 나이 차이가 좀 있던 오빠 나나는 운동, 특히 농구를 잘했는데 어느 날 한쪽 발목에 부상을 입으면서 진통제에 중독된다. 그러다가 진통제 중독으로 사망에 이르고, 어머니는 크나큰 충격으로 침대를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기프티는 오빠 같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고, 또한 왜 인간은 중독에 빠지는가도 이해하고 싶어서 뇌를 연구하게 된다.

 

솔직히 이건 엄청 다이내믹하거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줄줄이 일어나는 소설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재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잔잔하게 좋았다. 특히 표현이 정말 기가 막히다. 맨 첫 번째 장, 소설의 포문을 여는 첫 두 문장이 이거다.

Whenever I think of my mother, I picture a queen-sized bed with her lying in it, a practiced stillness filling the room. For months on end, she colonized that bed like a virus, the first time when I was a child and then again when I was a graduate student.
내가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녀가 누워 있는 퀸 사이즈 침대를, 방을 채우는 숙련된 정적을 떠올린다. 몇 개월이고 계속해서 그녀는 그 침대를 마치 바이러스처럼 식민지로 삼았는데, 첫 번째는 내가 어렸을 때였고 그다음에는 내가 대학원생이었을 때였다.

어머니가 아들을 잃은 일로 우울증을 얻어 침대에서 나오지를 못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침대를 식민지로 삼은’ 바이러스에 비유하다니 정말 여기서부터 너무나 충격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표현하지?

 

기프티는 엄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말 그대로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는 기가 막힌 문장이다.

My mother’s back was always turned to me. It was like she had an internal sensor for when I’d be entering the room to deliver the koko. I could picture the movie montage of us, the days spelled out at the bottom of the screen, my outfits changing, our actions the same.
어머니의 등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언제 코코(가나의 수수죽)를 배달하러 방에 들어올지를 알아차리는 내부 센서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화면 아래에 날짜가 쓰여 있고, 내 옷은 바뀌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똑같은 영화 몽타주를 그려볼 수 있었다.

 

제목이 왜 ‘Transcendent Kingdom’인지는 이 문단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장을 직접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뒤에 붙는 수식어를 앞으로 끌어오면서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다(그냥 직독직해를 해야…). 그런데 그 문체가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런 주제와 글쓰기에 참 잘 어울린다.

Though I had done this millions of times, it still awed me to see a brain. To know that if I could only understand this little organ inside this one tiny mouse, that understanding still wouldn’t speak to the full intricacy of the comparable organ inside my own head. And yet I had to try to understand, to extrapolate from that limited understanding in order to apply it to those of us who made up the species Homo sapiens, the most complex animal, the only animal who believed he had transcended his Kingdom, as one of my high school biology teachers used to say. That belief, that transcendence, was held within this organ itself. Infinite, unknowable, soulful, perhaps even magical. I had traded the Pentecostalism of my childhood for this new religion, this new quest, knowing that I would never fully know.
나는 이걸 백만 번쯤 해 봤지만, 뇌를 보는 일은 여전히 나에게 경외심을 가지게 했다. 내가 이 작은 쥐 안에 있는 작은 장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이해가 내 머릿속에 있는 비슷한 장기의 온갖 복잡함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하려고, 가장 복잡한 동물, 내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 말하던 대로, 그(신)의 왕국을 초월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구성하는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 그 작은 이해로부터 추론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 믿음, 그 초월성이, 이 장기 안에 갇혀 있다고. 무한하고, 알 수 없는, 영혼으로 충만하고, 아마도 마법적일 그것. 나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내 유년 시절의 오순절교회 믿음을 이 새로운 종교, 이 새로운 요청으로 바꾸었다.

 

위 인용문에서도 드러나고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소설의 주제 중 하나가 종교다. 기프티는 어릴 적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자라면서 오빠의 죽음 이후로 교회에도 발을 끊게 된다. 종교를 회의적으로 보는 게 현대 지성인의 기본 자세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이지만, 어쩌면 이성과 일치하지 않아도 여전히 어떤 신적인 존재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그 마음을 잃기 때문에 그게 더 순수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 I was such a self-righteous child. First, in the days of my Christianity, when I said things like “I’ll pray for you” to my classmates who were reading books about witches and wizards. Then, in those first few years of college, when I become dismissive of anyone who cried about breakups, who spent money frivolously, who complained about small things. By that time my mother had already “healed through prayer,” as Pastor John put it. Healed, but in the way a broken bone that’s healed still aches at the first signs of rain. There were always first signs of rain, atmospheric, quiet. She was always aching. She would come visit me when I was in undergrad at Harvard, bundled up against the winter, even if it was spring. I’d look at her coat, her head scarf wrapped tight, and wonder when I had stopped thinking of her as a strong woman. Surely, there’s strength in being dressed for a storm, even when there’s no storm in sight?
나는 독선적인 아이였다. 우선은 내가 기독교인이던 시절, 내가 마녀와 마법사들에 관한 책을 읽는 급우들을 위해 “너를 위해 기도해 줄게” 같은 말을 할 때. 그다음에는 대학 처음 몇 년 동안, 애인과 헤어졌다고 우는 사람들, 경솔하게 돈을 쓰는 사람들, 사소한 일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던 때. 그 시점엔 존 목사님이 말하던 대로, 어머니는 벌써 “기도를 통해 치유되었”다. 치유되었지만 비가 오려고 하면 아직도 쑤시는 부러진 뼈처럼 치유되었다고. 언제나 비가 올 것 같은, 그런 대기의 고요함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쑤셨다. 그녀는 내가 하버드의 대학원생일 때, 심지어 봄일 때에도, 겨울 날씨에 맞서 단단히 껴입고, 나를 보러 오곤 했다. 나는 그녀의 코트, 단단히 싸맨 머리 스카프를 보고 언제부터 그녀를 강인한 여인으로 보지 않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분명히, 폭풍에 대비해 옷을 껴입는 데에도, 시야에 폭풍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힘이 있지 않는가?

 

종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제일 공감했던, 종교 관련한 인용문 하나 더. 세상 많은 일들이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치면 성경도 마찬가지 아닌가? 성경에는 분노, 질투, 차별의 말도 있고 사랑, 관용, 자비의 말씀도 있다. 그중에서 어떤 부분을 인용하느냐는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 이게 바로 내가 종교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 이 부분이 엄청 통렬해서 마음에 들었다.

But while it was easy to be literal about some teachings of the Bible, it was much harder to be literal about others. How, for instance, could Pastor John preach literally about the sins of the flesh when his own daughter got pregnant at seventeen? It’s almost too cliché to be believable, but it happened. Mary, as she was ironically named, tried to hide her condition for months with baggy sweatshirts and fake colds, but it wasn’t long before the entire congregation caught on. And soon Pastor John’s sermons about the sins of the flesh took on a different weight. Instead of a punitive God, we were told of a forgiving God. Instead of a judgmental church, we were encouraged to be an open one. The Bible did not change, but the passages he chose did; the way that he preached did as well. By the time Mary’s due date rolled around, she and the baby’s father were married and all was forgiven, but I never forgot. We read the Bible how we want to read it. It doesn’t change, but we do.
성경의 어떤 가르침들에 대해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는 쉽지만, 다른 것들을 그렇게 하기는 더욱 어렵다. 예를 들어, 존 목사님은 어떻게 본인 딸이 17살에 임신했을 때 육신의 죄에 대해 글자 그대로 설교힐 수 있었던 걸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클리셰스럽지만, 이 일은 진짜 일어났다. 아이러니한 이름을 가진 메리는 헐렁한 맨투맨과 가짜 감기로 자신의 상태를 감추려 했지만, 모든 회중이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 존 목사님의 육신의 죄에 대한 설교는 다른 무게를 떠맡았다. 처벌을 내리는 신 대신에 우리는 용서하시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남을 판단하는 교회 대신에,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진 교회가 되도록 격려받았다. 성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가 고른 구절들은 변했다. 그가 설교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메리의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지자, 그녀와 아기의 아버지는 결혼식을 올렸고 모든 것은 용서받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다. 성경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변한다.

 

기프티는 같은 랩의 한이라는 남자(아시아계로 추정)와 서먹서먹한 사이로 시작해 점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고 그 이상으로도 발전한다. 이 커플 너무 귀여워! 처음에 대화하는 장면에서부터 귀여운 커플이 될 거라는 느낌이 왔다. 아니 소설 속 남의 연애 왜 이리 재미있지… 또한 기프티는 주위에 캐서린도 있고 그 이전에는 레이몬드랑 앤도 있었고, 좋은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사람들을 자기가 밀어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오빠 나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싫어서, 그 비밀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기를 생각해 주는 좋은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는 게 진짜 너무 가슴 아프고 찡하다. 기프티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위로받아도 되는데, 그럴 자격이 있는데… 🥲

 

표현이 정말 기가 막히고 기발하고 좋은 소설이었다. 나름대로 완전 꽉 막힌 해피 엔딩으로 끝나서 너무 다행이다. 언제 번역되어 나올지 모르겠으니 영어 원서 읽기가 너무 큰 부담이 아니라면 한번 읽어 보시라. 묵직한 주제를 잘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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